모든 시민은 기자다

해임안은 거부권 대상 아니라더니 새누리당, 왜 말 뒤집나?

[데스크 칼럼] 대통령의 자의적 헌법 해석, '위법' 논란 방치하는 여당

등록|2016.10.05 20:47 수정|2016.10.05 20:47

청문회 나온 김재수 후보자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9월 1일 국회 인사청문회장에 나와 답변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 남소연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아래 해임안) 사태는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끝난 것이 아니다.

새누리당의 항의성 파업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단식은 끝났지만, 김 장관의 진퇴 문제는 결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김 장관이 버틸 수록 이 문제로 인한 정치비용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김재수 장관 해임안은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

야당들이 제출한 해임안 사유 중 인사청문 과정에서 불거진 '황제 전세'와 '친모 방치'는 김 장관의 해명을 수긍할 대목이 있었다. 취임 후 직무수행 과정에서 드러난 허물에 책임을 묻지 않고 해임안을 통과시킨 것도 상식적으로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국회가 법적으로 합당한 절차에 따라 해임안을 통과시킨 뒤에도 이러한 이유들을 들어 국회 결정에 불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역대 '해임안 통과' 장관 5명 모두 정치적 사유로 물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국회 해임안(또는 불신임안) 통과로 물러난 장관 5명 중에 법적인 하자가 문제된 경우는 하나도 없다. 1955년 임철호 농림(농정 실패), 1969년 권오병 문교(반말 답변), 1971년 오치성 내무(실미도 사건), 2001년 임동원 통일(방북단 돌출 행동), 2003년 김두관 행정자치(한총련 시위 통제 실패) 장관의 해임 사유들은 각각 달랐지만, 정치적 함의는 하나같다. 대통령 탄핵은 요건이 까다롭고 정치적 부담도 크니 휘하 장관을 대신 물러나게 해서 행정부를 견제하겠다는 취지다.

지금과 공수가 완전히 뒤바뀐 2003년 김두관 장관 해임 사태를 복기해보면 더욱 그렇다.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은 그해 8월 8일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의 미군 사격훈련장 점거 시위를 막지 못한 책임을 김 장관에게 물었다. 하지만, 당시 김 장관은 정부조직법상 행자부의 독립외청인 경찰청의 업무 전반을 지휘·감독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경찰청장 임면권이 없는 야당이 해임건의안 통과로 노무현 정부를 우회 압박했다는 게 더욱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새누리당이 해임안 처리를 강행한 '속내'는 9월 3일 오전 의원총회에서 더 명확히 드러났다. 그날 의원총회에서는 이런 얘기들이 나왔다.

홍사덕 원내대표 : "드디어 오늘 오후 대선패배 이후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대결한다. 표결 여하에 따라 코드독재를 저지할 수 있느냐가 판가름난다."

김무성 의원  : "나는 노무현을 이 나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노무현이 이런 기조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 당이 퇴임 운동을 벌어야 한다."

홍준표 의원 : "해임건의 건은 거부권의 대상이 아니다. 법안이 아니므로 따라야 한다. 따르지 않으면 헌법 위반이다. (거부권 행사의) 다음 절차는 탄핵 절차로 갈 수 밖에 없다."


원유철 의원 : "반성하지 않고 독선·아집으로 위기 심화시키는 노정권 국정실패에 대한 엄중한 경고 전달해야 한다. 국회 통과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거부권 행사 흘린다. 반성할지 오기·독선 정치 할지 국민 똑바로 판단할 계기 삼아야 한다."

맹형규 의원 : "부결되면 당은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내년 총선에서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해임안 제출에 미온적이었던 남경필·이성헌 등 소장파 의원들이 가담한 가운데 국회 과반수를 차지한 새누리당의 뜻대로 김두관 해임건의안은 20여 분만에 일사천리로 가결됐다. 20대 국회에는 당시 해임안 표결에 참여한 의원이 9명이나 남아있다(김무성·서청원·심재철·원유철·이주영·정병국·정우택·정진석·홍문종).

공은 노 대통령에게 넘어왔지만, 청와대에서는 "야당이 해임시키라고 다 해임시키면 어느 장관이 제대로 일하겠냐"(유인태 정무수석), "국민들도 부당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이병완 홍보수석)는 대결론이 고조됐다. 해임안 통과 이틀 전 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9월 1일)에서는 해임안 반대 의견(47.5%)이 찬성(31.0%) 의견을 웃돌았다.

해임안 가결 다음날(9월 4일) 열린 여야 대표 청와대 초청 만찬에서 장관 해임을 관철시키려는 최병렬 새누리당 대표와 해임 철회의 명분을 찾는 노 대통령 사이의 신경전은 팽팽했다.

▲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9월 4일 저녁 박관용 국회의장, 민주당 정대철,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자민련 김종필 총재를 청와대로 초청, 만찬을 함께 하는 모습. ⓒ 연합뉴스


최 대표 : "김두관 장관 가지고 더 얘기할 생각 없다. 대통령이 이 문제를 분명히 해라. 헌법정신을 이해하는, 법률가인 대통령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을 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우리의 기대와 반대되는 결정이 나오면 분명히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보고 정면 대응할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 : "그렇다면 헌법재판소의 최종판단을 받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

최 대표는 노 대통령에게 당일 아침 <조선일보>에 실린 김철수 교수(세계헌법학회 한국지회장)의 칼럼을 인용하며 "법률가의 의견을 경청하시길 바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두관 사표는 2주 걸려, 주말 넘기면 '김재수 마지노선'도 무너져

김철수 교수는 기고문에서 "(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법률을 모르는 대통령과 달리 '해석 개헌'을 하겠다고 하고 법치가 아닌 코드정치를 하겠다고 하고 있어 국민은 불안하기만 하다"라고 주장했다. 해임안 통과 전 "새누리당은 신중해야 한다"는 사설을 낸 <중앙일보>도 해임안이 통과되자 "국회가 헌법에 규정된 권한에 따라 해임안을 가결한 이상 그 결정은 존중되어야 한다"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대통령의 '장관 지키기'가 국회와 정부의 정면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을 걱정했던 것이 대다수 언론들의 대체적인 논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청와대 기류가 바뀌고 있다"는 내부 기류가 언론에 보도되는 가운데 김 장관은 9월 17일 마침내 사표를 제출했다. 해임안 통과 2주 만의 일이었다.

오는 8일이면 김재수 장관도 해임안 통과 2주를 넘기게 된다. 이번 주말을 넘기면 박근혜 정부는 기 싸움의 '마지노선'을 넘었다고 판단해 본격적인 '버티기 모드'로 들어설 공산이 크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 장관 해임안을 수용하지 않는 선례를 남기게 된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현대의 권력은 천년만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간의 통념을 깬 20대 여소야대 국회 탄생 같은 일이 내년 대선에서 이뤄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새누리당은 행정권력을 잃더라도 국회 의석의 43%를 차지하는 막강 야당으로 남게 된다. 분열된 야권의 지형을 잘 이용하면 장관 해임안 카드로 새 정부를 골탕 먹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야당 출신 대통령이 "전임 박근혜 대통령도 국회의 장관 해임안을 거부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최악의 경우 권력을 쥔 쪽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법이 멋대로 재단되는 독재 시대가 활짝 열릴 지도 모르겠다.

새누리당 내에는 "김재수 장관이 이대로 물러나면 너무 억울하다"라며 해임안 문제를 뭉개고 가려는 동정론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렇지만 본인의 명백한 잘잘못보다도 당대의 정치적 지형이나 순간적 실수만으로 제대로 소명도 못한 채 공직을 내려놓아야 했던 사람들이 어디 한두 명이었던가 말이다.

지금에 와서 시시비비를 다시 따지자면, 2003년 9월 26일 국회 임명동의안을 받지 못한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자도 '제2의 김두관'으로 찍힌 케이스였다. 윤 후보자는 "고3때 성적이 '미'도 없이 '양·가'뿐인 '양가 아저씨'야. 이런 분이 회계사 자격증을 땄는지 의심스럽다"는 야당 의원의 인신공격까지 감내하며 인사청문회를 거쳤지만 국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김재수 사퇴'에 정치력 안 보이는 여당 지도부

정치권이 일반적으로 해석한 부결 사유는 "노무현 대통령과 너무 친해보인다", 즉 '코드 인사'였다. 해임안 통과 뒤 '자연인'으로 돌아가기 전 김두관 장관으로부터 '쓰레기 집단'이라는 직설적인 야유를 받은 새누리당 의원들이 '또 하나의 친노'로 비쳤던 윤 후보자를 상대로 분풀이를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7일만에 단식중단 이정현 병원으로김재수 장관 해임안 처리에 반발해 정세균 국회의장 사퇴를 촉구하며 국회 대표실에서 단식농성을 하던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2일 오후 7일만에 단식을 중단하고 구급대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 연합뉴스


"지금의 야당이 그때 당했으니 이제는 새누리당 차례"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법치와 질서를 강조해온 새누리당이라면 법 해석에 대한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 기존의 통설을 뒤집고 헌법에 명시된 해임건의안을 새롭게 해석하는 게 새누리당의 '신노선'이라고 하더라도 김 장관을 일단 물러나게 한 뒤 개헌이든 헌법소원이든 다음 수순을 밟는 게 보수정당의 정체성에도 들어맞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너무 완고해서 자기 머리를 깎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김재수 장관이 스스로 물러날 수 있도록 정치력을 발휘하는 것이 여당 지도부와 청와대 참모들의 본분이다. 당장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범인(凡人)들과 달리 국가와 공동체의 먼 미래를 내다보겠다고 말해온 분들이 아닌가?

2003년 김두관 해임안 표결에 참여했던 윤여준 전 의원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대통령에게 장관 해임을 권유한 조항을 헌법에 담은 취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법적 구속력을 따져서 버티려는 게 우스운 것"이라고 꼬집었다.

여당 내에는 "정치는 법도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 "우병우 민정수석도 지켜냈는데 김재수 장관인들 못 하랴"는 인식이 팽배한 느낌이다. "어차피 통하지도 않을 얘기, 구태여 내가 할 필요 있냐"는 자포자기마저 보인다. 아무도 '깨진 유리창'의 문제를 지적하지 못하는 공동체의 궁극적 미래는 누구도 살지 못하는 '슬럼'일 수밖에 없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