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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감독이 청춘에게... 노숙자 될 각오로 버틴 15년을 말하다

[청춘 아레나] 성과 없는 나의 재능,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이 말을 들었다

등록|2016.10.09 11:08 수정|2016.10.09 11:08
천만 관객을 넘게 모은 영화 <부산행>의 감독 연상호. 그가 이 시대 청춘들에게 자신의 지난 청춘을 이야기했다. 8일 오후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복합문화페스티벌 <청춘 아레나> 페스티벌에서 강연자로 선 연상호 감독은 '천만 감독'의 과거라고 하기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지질했던 자신의 지난날을 털어놨다.

12년 동안 단 한 번도 거둔 적 없는 성과

▲ 연상호 감독은 솔직담백한 입담으로 청춘들에게 다가갔다. ⓒ 마이크 임팩트


연출이나 시나리오를 배워본 적이 없다는 연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중학교 때 비 오는 날 체육관에서 노래자랑을 하게 됐는데 일본 애니메이션 노래를 일본어로 불렀을 정도로 애니메이션에 빠진 아이였다. 연 감독은 중학교에 다닐 때 공부를 너무 못해서 선생님이 어머니를 부를 정도였다. 공부를 못 해서 일찌감치 의사나 검사와 같은 직업인에 대한 꿈은 버렸다. 다만 "나도 근사한 사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늘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다. 공부는 이미 틀렸고, 애니메이션을 해서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겠단 생각에 미술학원에 다녔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진학 후 꿈이 깨졌다. 애니메이션으로 대학에 가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고 평범하게 공부하여 남들처럼 대학가는 길을 걷게 된 것. 재수를 하게 된 연 감독은 공부가 너무 싫어서 다시 애니메이션의 꿈을 갖게 됐다. 그때부터 단편 애니메이션을 혼자 만들었는데 7년 동안 단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다. 두드릴 수 있는 공모전 문은 다 두드렸지만 작은 영화제의 예선 통과조차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7년을 했는데 이 정도니 "내가 재능이 없다"고 연 감독은 스스로 판단했고 27살쯤 한 회사에 들어갔다. 유럽 애니메이션의 하청 업체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했는데 회사가 너무 부도덕했고 노동력 착취가 심해서 1년 반 만에 그만뒀다. 부모님은 매우 불안해했다.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작업은 혼자 하는 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든 일이다. 하지만 연 감독은 상황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혼자 작업해나갔다. 집에 박혀 너무 열심히 작업하니까 친구들이 와서 보고는 "너는 혼자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묻곤 했다. 그렇게 30대가 됐다.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지 12년이 지난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조그마한 공모전의 예선 통과도 하지 못하는 30대의 자신을 보니 한심한 나머지 연 감독은 '진짜 관둬야겠다'고 결심했다.

친구의 한 마디가 인생을 바꿨다

▲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돼지의 왕> ⓒ KT&G 상상마당


하지만 애니메이션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관두기로 굳게 결심하고, 연 감독은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애니메이션을 12년 했는데 아무 성과가 없었어. 이제 포기할래."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넌 재능이 있어. 한 번만 더 해봐. 아니 계속해. 계속하다가 그래도 안 되면 인생 망쳐서 노숙자로 살겠지. 그런데 말이야, 실패해서 노숙자로 살다가 죽어도, 사람이 죽는 건 다 똑같은 거 아니냐?"

연상호 감독은 친구의 이 말에 매우 큰 위로를 받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왜 지금까지 잘 되려고 했지? 그냥 살면 되잖아."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잡고 '마지막 작품'으로 여기며 만든 게 애니메이션 영화 <돼지의 왕>이었다. 이 작품으로 상상마당에서 1억 2천만 원 지원을 받는 좋은 기회를 얻었는데 그렇기에 '이게 안 되면 나는 끝'이라고 생각했다. 상상마당 측에서 투자금을 주면서 연 감독에게 "어디를 목표로 하겠느냐" 물었고 그때 연 감독은 "나는 칸 영화제가 목표"라고 호기롭게 답했다.

그런데 칸 영화제에 출품한 영화는 시원하게 낙선했다. 그래서 베니스 영화제 넣었다. 탈락이었다. 이어 로테르담 영화제에 출품했다. 또 탈락. 연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 전부 출품해보자는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막 넣었는데 모든 곳에서 '완벽히' 떨어졌다. 그래서 결국 한국으로 눈을 돌려 부산영화제에 <돼지의 왕>을 출품했는데 "저희는 이런 작품을 틀 수 없다"는 답변을 돌려받았다. 실망이 엄청났다.

외국인 기자, 연상호의 인생을 바꾸다

▲ 연상호 감독은 꿈을 위해 달려온 지난 날의 힘들었던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청춘들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남겼다. ⓒ 마이크 임팩트


그런데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돼지의 왕>을 좋게 본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설명하자면, 영화진흥위원회란 곳은 보통 모든 영화를 저장해 놓는데 해외에서 영화 관계자가 오면 그런 자료들을 보곤 한다. 마침 한 외국 기자가 우연히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연 감독의 <돼지의 왕>을 보고는 훌륭하다고 생각한 것. 연 감독은 이 외국 기자를 우연히 부천 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만났고 기자에게 여차여차 상황을 설명했더니 기자가 "왜 이 작품을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하려 했냐"며 "해외 영화제에 출품해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걸 우연히 옆에서 듣고 있던 부산국제영화제 관계자는 불현듯 귀가 솔깃해져서 "안 된다, 이 영화는 우리가 하겠다"며 부산영화제에 정식으로 출품했다. <돼지의 왕>은 이 영화제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덕분에 칸 영화제에도 가게 됐다. 연 감독이 맛본 '최초의 성취'였다. 이 성취까지 자그마치 15년이 걸린 셈이다. 

연 감독은 그 후 아시다시피 <부산행>이란 영화를 찍어 '대박'을 쳤다. 연 감독은 자신의 지난 청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페스티벌에 모인 청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그 외국 기자가 <돼지의 왕>을 안 봤다면 저는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노숙자로 살고 있겠지요." 그리고 이어 말하길 "여러분께 '안 되더라도 나처럼 15년은 노력하라'고 말하는 건 웃긴 이야기이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자기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가진 열정의 동력이 어디서 나오느냐에 따라 꿈을 지속해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고 말이었다. 열정을 지속성 있게 쏟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인생의 불안이나 실패 같은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지만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고, 나중에 감당 안 될 만큼 큰 성취를 이뤘을 때조차도 계속해나가던 것을 해나갈 힘이 생긴다고 덧붙였다. 이날 연 감독의 강연에 청춘들은 적극적으로 질문하며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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