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블랙리스트, '탄핵사유' 이대로 묻혀야 하나
[게릴라칼럼] 청문회로 '청와대 지시' 철저히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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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60년도 훨씬 전에 할리우드에 나돌던 영화계 '빨갱이' 블랙리스트의 이름은 '할리우드 10'이었다. 이를 기초로 그 핵심인물이라 찍힌 장본인 외에 주변 인물들을 청문회 증인으로 부르고, 그들의 밥줄을 끊고, 친구와 동료를 등지게 만들었다. 마녀사냥만큼 무서운 것이 결국 자기검열이요, 동료와의 반목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미국은 <트럼보> 이전에도 매카시즘의 광풍을 성찰하는 영화들을 여럿 제작하며 자성을 한 바 있다.
▲ 지난 4월 7일 개봉한 영화 <트럼보> ⓒ 그린나래미디어(주)
그리고 2016년 10월 대한민국엔 광범위한 '블랙리스트'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때아닌, 아니 "이 정권은 그러고도 남는다"는 반응 일색인 이른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파문 말이다. 지난 11일 <한겨레>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존재를 확인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회의록을 보도한 데 이어, 12일 <한국일보>가 한 예술계 인사가 찍어뒀다는 9473명의 명단이 담긴 블랙리스트 문건의 표지 사진을 공개한 것이다.
이 표지 사진엔 '합계 총 9473인, 세월호 시행령 폐기선언 문화예술인 594인, 문재인 후보지지 선언 6517인, 박원순 후보지지 선언 1608인'의 구분이 선명히 찍혀 있다. 이 문건은 A4 용지 100여 장이 넘는 방대한 양에 구체적 명단이 담겨 있다고 알려졌다. 참담하고 참혹하기 짝이 없다.
앞서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 회의록 자료(지난해 5월 29일)를 분석한 결과, 청와대와 문체부가 문예위 심사 및 심사위원 선정에 개입했고,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문화예술계는 물론, 정치권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당연히, 리스트에 등장하는 당사자들 역시 분노하고 있다.
"문화와 예술, 그리고 예술인들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 문재인 더민주 전 대표가 페이스북에 쓴 글 ⓒ 문재인 전 대표 페이스북
"정치검열을 위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밝혀졌습니다. 부끄럽고 미련한 짓입니다. 문화 예술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앞서 생각하게 해주고 때로는 우리가 잊고 있던 것을 깨우쳐 주기도 합니다. 또 우리 일상의 삶을 빛나고 소중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선 그 사회가 허락하는 최대한의 '표현의 자유,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예술에 대한 배려이고 그 나라의 예술적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문화와 예술, 그리고 예술인들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예술은 권력을 풍자하고 시대를 비판하는 것이 중요한 사명중 하나입니다.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는 이 정부의 예술적 무지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히고 관련자들을 문책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술인들에게 사죄하십시오."
12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적은 글이다. 그는 "문화와 예술, 그리고 예술인들을 건드리지 마십시오"라며 관련자 문책과 진실 규명, 예술인들에 대한 사죄를 요구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표현의 자유, 정치적 자유'를 요구한 셈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역시 13일 새벽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블랙리스트와 관련 격한 분노를 표출했다.
박 시장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라며 "이런 야만적 불법행위와 권력남용을 자행하는 현 정부와 대통령은 탄핵대상이 아닌가요?"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단순히 저를 지지한 문화예술인이 포함되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라는 박 시장은 "이런 정도의 사건이 서구에서 일어났다면 어떤 대통령도, 어떤 내각도 사임할 일이 아닙니까?"라고 적었다.
"권력의 막장 드라마이고 사유화의 극치입니다. 당장 국회는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리고 그 조사결과에 따라 탄핵이든, 사임요구든 그 무엇이든 합당한 조치를 요구하기 바랍니다. 총선민의가 무엇을 바라는지 아직 잊지 않았다면 야당은 야당다운 역할을 제대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메가톤급 권력비리와 권력남용이 수없이 있었는데도 다수당이 된 야당의 대응은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
이 기회에 국정원의 '박원순제압문건'도 따져 주세요. 어찌 정보기관이 멀쩡하게 천만 시민의 손으로 선출된 시장을 제압할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국민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더 이상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국민의 마음이 여당과 정부는 물론이고 야당으로부터도 온전히 떠나가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무려 9473명, 무능하고 안일한 청와대와 그 하수인들
분노와 허탈함. 리스트에 포함된 일선 영화계를 포함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반응을 종합하면 이렇다. 분노는 둘째치더라도, "포함되어서 다행이다"나 "나는 왜 빠졌지?"와 같은 자조 섞인 반응들 일색이다. 광범위하게 세월호 지지 단식을 벌였던 영화인들이나 문화예술인들의 분노는 특히 거셌다. 또한 <트럼프> 속 '할리우드 10'과 달리 무려 9473명이나 명단에 포함시킨 블랙리스트 작성자들의 무능함도 조롱거리의 일환이다.
블랙리스트에 대해선 결국 "밝혀질 것이 밝혀졌다"와 같은 반응이 주를 이룬다. 서병수 부산시장과 이 정권이 결국 <다이빙벨> 상영을 이유로 2년여의 논란과 잡음, 송사 끝에 파열을 낸 부산국제영화제는 조직 하나가 휘청거린 예다.
▲ 부산국제영화제(BIFF) 지키기 범 영화인 비대위는 지난 3월 2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부산국제영화제 지키기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부산시(시장 서병수)가 영화제의 자율성을 계속 부정한다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참가를 전면 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 권우성
박정희 전 대통령과 현 정권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 심사에서 탈락한 박근형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연극 <개구리>를 둘러싼 파열은 물론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서 정치적인 압박을 이유로 전시를 철회당한 <세월오월>의 홍성담 작가도 있었다. 이미 박근혜 정권 들어서 부당한 정치검열의 희생양이 된 문화예술인들이 상당수였던 것이다.
결국 이 광범위한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인사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작년 5월 1일 '세월호 참사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 서명한 (영화)문화인과 2014년 6월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문학인들이 첫 번째다. 그 다음은 지난 대선에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에 참여한 예술인과 2014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문화예술인들이다.
요약하자면, 세월호 관련 정부 비판적인 부류와 정치적인 반대파로 나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지극히 민감해 하는 세월호 문제를 언급하거나 정적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들은 '좌파'로 찍거나 '블랙리스트'를 일선에 내려 보내 밥줄을 끊겠다는 심보인 셈이다.
또 하나, <한국일보>의 보도에 등장하는 예술계인사는 "지난해 5월 흔히 말하는 '블랙리스트'가 청와대에서 내려왔고 우리 입장에서는 이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문체부 공무원들의 푸념을 들었다"고 밝혔다. 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주체로 청와대를 적시한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위풍당당한 청와대 측은 예상에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별 해명이 없다.
철저한 진상규명이냐, 무기력한 각자도생이냐
▲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정관주 제1차관이 1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미르·K스포츠재단의 설립을 취소할 의향이 없냐"는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 "재단 설립을 취소할 법적인 근거가 없다"고 답변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해명 보도자료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르재단과 케이스포츠재단, 차은택씨 관련 의혹 해명만으로도 벅차 보이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게다가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12일 이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문체부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짧게 언급했다고 한다. '청와대 지시'설이 수면 위로 올라왔는데도, 역시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는 셈이다.
블랙리스트의 존재도 어처구니없지만, 그 방대한 양에서 이 정부의 무능함과 안일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실 이명박 정권이던 지난 2010년 'KBS 블랙리스트' 논란이 일파만파 커졌을 때도, 이 정도 규모는 아니었지 않나. 무소불위의 오만하고 무식한 박근혜 정권이 배우 송강호와 김혜수를 비롯한 광범위한 문화예술인들을 '관리' 대상에 올렸다는 것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명백히, 정권 차원의 불법행위요, 헌법 위배다. 청와대 지시가 확인된다면, 박원순 시장 말마따나 한 마디로 '탄핵감'이다. 문제는 무늬뿐인 여소야대 정국과 이미 정권에 장악된 공영방송과 편향적인 종편 체제와 같은 언론 환경에서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한 청문회 개최나 가능하겠느냐 하는 점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2일 박경미 대변인이 오후 현안 브리핑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 예술의 자유에 대해 분명하게 답해주기 바란다"고 지적했다. 그게 전부였다. 제1야당이 이 정도 심각하고 중대한 사안에 대해 대통령에게 "분명하게 답해주기 바란다"는 식으로밖에 항의를 못 한다면, 문화예술인들 역시 각자도생만이 답인 것일까.
"민변에 여쭙니다. 이 사안, 박근혜 정권을 상대로 그동안의 물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배상청구소송이 가능한가요?"
어쩌면, 문성근 국민의 명령 상임위원이 12일 소셜미디어에 적은 이 물음이 정답일지 모른다. 레임덕도 아랑곳없는 불통의 박근혜 시대, 우린,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그렇게 분노를 삼키며 '각자도생'의 길을 걷는 중이다. 매카시즘이 언급되는 마녀사냥의 복판에도 어김없이. 다시 묻자. 이 '블랙리스트' 파문이 과연 이렇게 묻힐 사안인가. 2016년의 대한민국은 정녕 <트럼보>를 좌초시킨 20세기 중반의 미국보다 못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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