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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은택과 불온한 예술인, 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주장] 정부의 예술인 검열 논란... 나만의 블랙리스트로 맞서겠다

등록|2016.10.15 16:28 수정|2016.10.15 16:28
대학 합격자 명단을 확인할 때보다 떨렸다. 키보드로 'Ctrl+F'(찾기)를 누른 뒤 내 이름 석 자를 두들겼다. 결과는 절망. 지난 12일 공개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9473명 중 내 이름은 없었다.

아주 새파랗고, 보잘것없는 초짜지만, 사회적 분류 방식에 따르면 난 '문화예술인'이다. 현재 논란의 중심에 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래 예술위)로부터 '예술인 활동 증명'도 받았다. 경력이 1년도 채 안 되는 초짜 연극인인 나는 이번 명단에 오르지 못해 참으로 속상할 따름이다.

지난 2012년 대선 때 나는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지난 4월 총선에선 더불어민주당 지역구 후보를 선택했고, 정당 투표에선 녹색당에 한 표를 던졌다. 대선 맞이 언론 탄압의 신호탄으로 검찰이 기소한 편집기자가 소속된 <오마이뉴스>에서 대학생 인턴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연극계에선 밀양 송전탑 강제 건설에 반대하는 작품에 참여했고, '혜화동 1번지'의 기획초청공연 <세월호> 관련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이 정도면 블랙리스트에 들어갈 자격이 생긴 걸까?

새카만 명단, 어디서 시작됐나

▲ 아주 새파랗고, 보잘것없는 초짜지만, 사회적 분류 방식에 따르면 난 '문화예술인'이다. 현재 논란의 중심에 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예술인 활동 증명'도 받았다. 나는 경력이 1년도 채 안 되는 연극인이다. 초짜 예술인인 나는 이번 명단에 오르지 못해 참으로 속상할 따름이다. ⓒ 임성현


사건의 발단은 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근형 연출의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예술 지원 사업에 선정되었지만 포기를 요청받은 사실이 작년 9월 보도됐다. 탈락 이유는 박 연출의 전작 <개구리> 때문이었다. <개구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빗대어 풍자한 내용을 문제 삼았다.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예술 검열'을 당한 셈이다.

이윤택 연출의 <꽃을 바치는 시간>은 희곡 심사에서 1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탈락했다. 윤한솔 연출의 <안산순례길>도 정치적 검열로 인한 탈락 의혹이 제기됐다. 일련의 사건들로 문화예술계에서는 소위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얼마 전 그 소문이 <한겨레>를 비롯한 언론 보도를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http://durl.me/deqkvn).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입증할 단서를 공개한 것이다. 도 의원이 공개한 예술위 회의록 중엔 "심의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자율적인 심의가 원만하지 않다"는 식의 '외압'과 '검열'로 의심되는 대목이 등장한다.

▲ <한국일보>가 보도한 문화계 블랙리스트 문건 사진. 시국 선언 참여자, 야권 지지자 등이 이름을 올린 것으로 추청된다. ⓒ 한국일보 갈무리


이후 <한국일보>가 '문화정책에 밝은 예술계인사'로부터 입수한 자료를 지난 12일 보도했다(http://durl.me/deqm5s). 여기엔 구체적인 블랙리스트의 내용이 명시됐다. <한국일보>가 공개한 문서 표지에 따르면, '세월호 정부 시행령폐기 촉구 선언'에 서명한 594명, '세월호 시국 선언'에 참여한 754명,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6517명,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1608명, 총 9473명이다. 명단엔 김혜수, 송강호, 박찬욱 등 유명인들도 포함됐으며, 블랙리스트 입증 자료를 공개한 도종환 의원의 이름도 있었다.


졸지에 검열의 '원인 제공자'가 되어버린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박원순 서울시장은 강하게 반발했다. 문 전 대표는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는 이 정부의 예술적 무지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며 비판했다. 다음 날 새벽엔 박 시장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라며 분노를 표시했다.(관련 기사 : 분노한 박원순 "현 정부와 대통령은 탄핵대상")

예술인들 "내 이름 있어서 다행", 조윤선 "그런 문서 없다"

도종환 "삭제된 회의록 누구 지시인가"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에 대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 참여한 모습. ⓒ 유성호


예술계의 반응은 어떨까? 구체적 리스트가 공개된 후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은 예술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현 시인은 지난 12일 자신의 트위터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중에 내 이름이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명단을 살펴보았다"라며 "참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예술인들은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암흑의 시대로 회귀한 것에 대한 분노, 반민주적 행태로 일관하는 현 정권에 대한 익숙함, '이미 예상한 일'이라는 식의 기묘한 차분함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설마' 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예측 가능한 것은 피하라.'

예술 작업의 원칙이다. 연극에서도 극작, 연출, 연기, 비평 등 모든 영역에 중요한 원리다. 대학에서 내게 연극을 가르쳐준 스승께선 "너무 뻔하지 않으냐"는 지적을 자주 하셨다. 졸업 후 현장에서 만난 배우와 연출가도 "똑같은 건 재미없다", "예측 불가능한 걸 시도하라"는 원칙을 되뇌었다.

그러나 요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나도 예측 가능하다. 설마 하면서 예상했던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무고한 농민을 물대포로 쏴 죽인 공권력은 예상했던 대로 사과조차 한마디 안 했다. 설마 예술을 검열하는 건 아니겠지 예측하면, 구체적 블랙리스트까지 만들면서 걸러내는 모습으로 보답하는 게 이 나라의 현실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블랙리스트 논란에서도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그런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받았다"고 일축했다. 이 또한 너무나 예측 가능했기에 웃음조차 안 나왔다. 나는 단지 저들이 손바닥으로 하늘만 가리길 바랄 뿐이다. 그 커다랗고 더러운 손바닥으로 힘없는 자들의 뺨을 후려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차은택이냐 블랙리스트냐, 그것이 문제로다

▲ 구체적 리스트가 공개된 후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은 예술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현 시인은 지난 12일 자신의 트위터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중에 내 이름이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명단을 살펴보았다"라며 "참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 안도현 시인 트위터


검열당하는 블랙리스트 인물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모색한 문화예술인도 있다. '미르 재단', 'K스포츠재단' 논란에서 비선 실세 최순실씨와 함께 거론된 차은택씨가 바로 그 예다. 그는 권력에 빌붙어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됐다. 지원금이 없어서 작품을 못 올리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예술혼을 겨우 붙들고 있는 사람들과는 상반된 길을 차은택씨가 개척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술가들의 지향점이 두 곳으로 나뉜다는 것을 확인했다. '차은택'이냐 '블랙리스트'냐. 권력을 향한 복종과 저항 사이에서의 선택은 예술계의 화두가 됐다.

어두컴컴한 이 시대, 나약한 초짜 예술인으로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며,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할까? 내가 계속 연극을 할 수는 있는 걸까?

이 글을 쓴 이상, 적어도 이 정권에선 예술 지원이나 어떠한 도움을 받긴 글렀다. 그렇다고 차은택씨처럼 권력에 빌붙는 건 쪽팔려서 못 할 노릇이다. 나는 차은택씨가 '참 나쁜 예술인'이고, 이 모든 생태계를 파괴한 최순실씨와 대통령이야말로 '참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차은택과 블랙리스트 사이에서 나는 후자를 택했다. 블랙리스트에 내 이름이 오르도록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또한, 나는 나만의 블랙리스트를 만들 것이다. 세월호의 진실을 가리려는 사람, 밀양에 고압 송전탑을 강제로 세우려는 사람, 강정마을 주민을 괴롭히는 사람, 노동자를 부당하게 해고한 사람, 백남기 농민을 물대포로 쏴 죽인 사람, '외인사'를 '병사'로 바꿔 공권력의 폭력을 감추려는 사람, 예술을 억압하고 검열하려 블랙리스트를 만들도록 지시한 사람, 이외에도 셀 수 없는 폭압적 행태에 동조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기록할 것이다.

이 모두를 나만의 블랙리스트에 꼼꼼히 적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무대 위에 세울 것이다. 어둠의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잊지 않겠다.

#그런데_최순실은 밥 잘 먹고 다니시는지 안부가 궁금하다. 당신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만들고 싶다. 그 연극 한 편이면 그대들의 검은 명단에 내 자랑스러운 이름을 당당히 새길 수 있을 터. 관심 있으면 연락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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