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가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고구마
[그림과 일상] 좋은 이웃과의 추억 갈무리
▲ 그림-노랗게 잘 익은 호박고구마 한 접시 ⓒ 권순지
"언니 이번에 고구마 좀 사려고 하는데, 살 수 있죠?"
"이번엔 더 팔고 싶어도 없대요. 우리가 받아온 거 많으니까 그냥 같이 나눠먹을래요?"
결혼하면서 살게 된 동네의 아파트에서 처음으로 가까워진 이웃이 있다. 벌써 결혼한 지 햇수로 6년이니 매년 고구마를 나눠 먹는 사이가 된 이웃과도 알고 지낸 지 6년 차가 된 셈이다.
시댁에서 밤농사, 고구마 농사를 짓는다며 매년 가을이 되면 질 좋고 맛 좋은 밤과 달큰한 호박고구마를 아낌없이 나눠주는 이웃이다. 올해는 꼭 일찌감치 주문해 값을 지불하고 먹으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또다시 실패했다. 고구마 농사가 잘 안 돼 수확량이 많이 줄었고, 그래서 이미 전부 판매가 됐다는 게다.
시댁에서 아들, 손자, 며느리 먹으라고 보내주신 한 박스가 있는데, 그걸 나눠먹자고 제안했다.
"저야 물론 고맙죠… 그런데 매번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서요."
"무슨, 아니에요. 같이 나눠먹을 수 있으면 좋은 거죠. 우리도 많아서 다 못 먹어요."
이웃의 시댁에서 수확하신 밤과 호박고구마는 먹어본 그 어떤 고구마 보다도 맛이 좋다.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이들 건강간식으로 으뜸이다.
커피 한 잔 하러 놀러갔다가 결국 올해도 고구마 한 꾸러미, 밤 한 봉지를 양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 간식으로 바로 삶아낸 고구마의 껍질을 벗겨 노오란 속살이 드러나는 걸 보고 있노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고구마만 보면 언니가 떠오르겠구나.'
가슴에 콕 박힐 고맙고 따뜻한 기억이 한 가지 더 늘었다. 마음과 머리가 동시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추는 느낌마저 들었다.
동네언니
아이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른이 되어서도 '동네언니'라는 존재는 가슴을 든든하게 해주는 것 같다.
나의 동네언니는 내가 첫 아이 키우며 연년생 둘째를 임신했을 당시에 감동스러운 손님으로 우리 집에 나타나곤 했었다. 요리 솜씨가 좋은 언니는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나눠 먹자며 초인종을 눌렀다. 내가 좋아하는 잡채를 많이 했다며 커다란 유리반찬통 가득 담아 가져다 주는 일. 아이 소풍가는 날 김밥이라도 싸게 되면, 입덧에 육아에 힘든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내게 먹으라고 가져오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감동스럽고 고마운 선물을 받을 적마다 나 역시 함께 베풀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 기억은 부끄럽게도 비교적 미미하다.
낯선 도시의 생소한 동네에서 처음 아이를 낳아 키우기 시작한 때에 내게 먼저 현관문을 활짝 열어줬던 언니에게서 날아온 문자메시지.
"애기 업고 우리 집에 놀러 와요. 와서 점심도 같이 먹어요."
문자 메시지 한 통, 인연은 그렇게 무르익었다
낯가림 많고 누군가와 처음 어울리는 게 어색하기만 했던 내게 언니가 건넸던 그때 그 말은, 날선 바늘에 찔릴 것처럼 떨고 있는 손가락 머리에 따뜻하게 골무를 씌워주는 듯했다. 정말이지 아이라는 존재와 처음 함께 맞은 봄볕만큼이나 따사로웠다.
오늘은 함께 가을 나들이에 나선 두 가족 무리 사이에서 "나 어린이집에서 장보기 놀이하러 마트 갔을 때 이모 만났었는데"라면서 수줍은 녀석이 내게 말을 붙이는 일도 있었다. 언니의 다섯 살 배기 아들이다. 동네 마트에서 우연히 만났을 당시 수선을 떨며 반가워하던 나와 달리, 날 알아보지 못한다는 듯 시큰둥했던 아이.
사실은 날 알아봤지만 수줍은 성격인 터라 내색하지 못했다는 아이의 숨겨뒀던 반가움은 시간이 좀 지났어도 날 기쁘게 했다. 내 아들을 만난 것 마냥 좋았던 순간의 감정은, 이웃과의 사이에서 쌓아 올린 좋은 기억의 탑이 견고하다는 방증이었다.
그런 고맙고 정든 이웃이 올 겨울이면 남편의 직장 문제로 이사를 간다. 어쩜 이사를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던 1년 전부터 시작된 아쉬움, 서운함 등의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은, 이제 한 계절 앞둔 가을이 되니 더 선명해진다. 추운 계절, 새로운 곳으로 옮겨 웅크렸다 새봄을 맞이할 언니와 그 가족의 생기를 염원한다. 따끈하게 찐 노랗게 잘 익은 고구마를 볼 때마다 생각날 이가, 아직 떠나지 않은 지금 벌써부터 그립다.
덧붙이는 글
개인블로그 http://blog.naver.com/rnjstnswl3 중복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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