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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각하는 '임신 중절'은 없다

책 <있잖아 나 낙태했어>가 드러내는 이야기

등록|2016.10.20 14:51 수정|2016.10.20 14:51
사회에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고정화 된 이미지와 낙인이 존재한다. 특히나 사람들의 입장 차이가 첨예한 주제와 관련 있는 사람들인 경우 더욱 그렇다. 가령 동성애자의 경우 성적으로 매우 문란하며, 결국 에이즈에 걸려 세금을 축내는 존재라는 식의 낙인이 찍혀 있다. 성매매 여성의 경우 자신의 사치를 위해 편한 일을 선택한 방종하고 게으른 사람들이라는 꼬리표가 달려있다. 이 외에도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병역 거부자 등등 무수한 사례들이 있다.

최근 정부의 시행령 예고로 이슈로 떠오른 '임신 중절' 또한 마찬가지다. 임신 중절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행위 자체가 비윤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 임신 중절을 한 사람들은 애초에 비도덕적이었던 인물로 몰아 가곤 한다.

이들을 위한 서사는 이렇다. 원래 성적으로 문란해서 몸을 함부로 굴린 여성. 하지만 그로 인한 책임은 지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여성. 그래서 임신 중절을 손쉽게 선택해 버리는 비도덕적인 여성. 이렇게 임신 중절은 '비정상적' 개인이라서 가능한 '일탈적 행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편견과 통념이 만들어 낸 것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같은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임신 중절을 한 여성의 숫자가 한둘이 아닌데, 모든 사람들의 사연이 저렇게 단순한 서사로 수렴될까? 사실 이는 모든 종류의 스테레오 타입화가 드러내는 오류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에서 '임신 중절'이 금기시 되는 주제다. 즉 임신 중절을 한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꺼내놓지 않는다. 그 경험은 매우 철저하게 비가시화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임신 중단을 택한 여성들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어쨌든 임신 중절 당사자에 대한 편견은 허상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통념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 효과를 발휘한다.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떠한 가와는 상관없이, 당사자들은 비도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만큼 그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힘들어지고 자신의 경험이나 정체성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할 수가 없어진다. 그리하여 이는 당사자들의 사회적 위치가 취약해지는 결과를 몰고 온다. 스스로를 드러낼 수도 말 할 수도 없으며, 이미 지탄의 대상으로 꼬리표가 달린 사람이 무슨 힘을 발휘할 수가 있겠는가.

임신 중절 당사자의 목소리가 드러나야 하는 이유

▲ <있잖아 나 낙태했어> ⓒ 한국여성민우회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편견을 형성하고, 낙인을 찍은 후 근본적인 사회적 지위를 취약하게 만드는 방식. 이는 하나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가장 저열한 방식 중에 하나다. 당사자가 아무런 자기 변호도 할 수 없고, 임신 중절을 금지시키려는 주장이 '상식'과 '윤리'의 지위를 얻을수록 그 주장은 더욱 힘을 얻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이는 지금까지 이루어져 온 여러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통제 방식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참으로 비극적이게도, 혐오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자신들의 목소리가 먹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임신 중절 당사자들의 경험이 드러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이들이 통념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며, 임신 중단을 결정하는 과정 또한 편견과는 다름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당사자들에 대한 낙인과 꼬리표가 사라질 때,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정확하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오늘 소개할 책 <있잖아 나 낙태했어>가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13년에 한국여성민우회가 발간한 이 책은 임신 중절을 경험한 25명의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임신 중절'은 없다

한 해, 약 20만 명이 임신 중절을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많지 않은 숫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25명의 인터뷰이들은 다양한 연령, 직업, 사회적 위치 만큼이나 서로 다른 사연을 펼쳐 보인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 명의 임신 중절 당사자가 있다면 천 개의 사연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 중에서, 임신 중절을 둘러싼 편견과 겹쳐지는 이야기는 하나도 찾을 수 없다. 이들에게 임신 중절은 삶의 중요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 선택이 무책임이나 면피의 형식을 띠고 있지 않았다. 즉 편견처럼 임신 중절을 가벼운 선택지로 고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령 어떤 사람은 도저히 지금보다 더 많은 아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누군가는 아이를 낳고 양육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 혹은 몸이 감당할 수 없어서 임신 중절을 결정했다. 비혼모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임신을 중단한 사례도 있다.

어느 사연도 막상 들어보면 임신 중절이 손쉬운 선택이었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이야기를 듣고 당사자의 입장에 서보면 그 결정은 불가피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는 형법이 낙태죄를 규정하고 있어도, 임신 중절이 계속 이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히려 임신 중절 처벌은 수술 비용과 위험이 더 높아지는 결과만 만들어 냈다.

편견이 아닌 삶의 이야기

통념에 반대되는 것은 임신 중절을 결정한 이유 뿐만이 아니다. 인터뷰이들이 원치 않는 임신에 이르는 과정 역시도 사회적 편견과 배치되어 있다. 가령 누군가는 10대의 임신 중절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여고생들한테 물어봐요. 왜 남자 친구랑 그랬냐고. 그러면 남자 친구가 원해서 키스하다 보면 막 만지고 못하게 하면 계속 까칠하게 대놓고 욕하고 안 만나 주고 소문내고 이러니까 잤는데 콘돔하기 싫다고, 느낌 이상하다고 안 하려고 해서 낙태를 했다고 해요. 내가 먼저 콘돔하자고 하면 싸 보인다고 어디 여자가 뭐 그런 얘기 하냐고 그렇게 해서...'


이 인터뷰이가 말하는 것처럼 '멋모르게 쾌락에 의해서' 임신에 이르는 경우는 없다. 책이 인용한 논문이 언급하듯 '여성들이 '갑작스럽고, 강제적인 성관계'를 피임에 대한 고려도 없이 수용하게 만드는 구조'가 원치 않는 임신의 배경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책은 당사자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통해, 삶의 언어를 통해 임신 중절이란 무엇이고, 누가 하며, 어떻게 하게 되는지를 이야기 한다.

나는 누군가 임신 중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통념과 편견을 벗겨낸 이 책의 목소리들을 꼭 읽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마주하고, 그 삶을 들여다보고, 그 위치에 선 이후의 당신에게 질문하고 싶다.

당신은 여전히 임신 중절을 처벌해야 하냐고 생각하냐고. 당신이 생각하는 임신 중절이 그 곳에 있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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