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오기 쉽게' 대문을 사다리처럼 만든 이유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 ⑬] 나주·장흥·보성·화순 마을 (1) 나주 도래마을 옛집굴뚝
▲ 홍기응 가옥 기단굴뚝안채 남쪽 기단에 있다. 이웃을 배려한 홍기응 가옥 대문을 보면 기단굴뚝에 대한 집 주인의 생각이 읽힌다. ⓒ 김정봉
이번에는 남도다. 널따란 들녘, 야트막한 골 따라 나주→장흥→보성→화순에 다녀왔다. 고을마다 고인돌이 널려있는 풍요로운 땅이다. 거기에 목맨 민중들이 고달픈 나날을 삭이며 이 고을, 저 고을에 돌장승, 민불(民佛)을 세워 자위(自慰)하였다. 한마디로 민중 생활문화가 짙게 밴 땅이다.
나주 도래마을, 장흥 방촌마을, 보성 강골마을, 화순 달아실마을은 이런 땅위에 들어선 집성마을이다. 마을이 들어선 사연이야 제각각이지만 이 땅에 터 잡은 성씨들은 민중들과 눈 맞추며 400~500여 년 동고동락하였다.
독보(獨步)의 설렘 속에 맨 처음 내달려 간 고을은 나주다. <택리지>에서 '금성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영산강이 흐르니 도시의 지세가 한양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나주사람들은 나주를 '작은 한양'으로 입 모아 얘기한다. '천년 목사고을 나주'라는 말에 그들의 자부심이 담겼다.
나주의 물은 영산강. 영산강은 드넓은 나주평야를 품었다. 전남 제일의 곡창으로 '나주의 풍년은 전남의 풍년이고 나주의 흉년은 전남의 흉년'이란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나주평야에 흉년이 들면 전국이 굶는다'는 말도 있다. 나주평야를 배경으로 식산 아래에 한 마을이 자리 잡았다. 도래마을이다. '식복(食福)'을 타고난 나주 고을에 먹을 게 풍부하다는 식산(食山) 아래에 들어섰으니 도래마을은 밥 굶을 일이 없어 보인다.
풍산홍씨 집성촌, 도래마을
▲ 도래마을 정경 식산 아래에 자리 잡은 도래마을은 마을 어귀부터 삼신산을 만든 연못과 중층대문 양벽정, 영호정이 있어 분위기가 그럴싸하다. ⓒ 김정봉
식산의 물길이 세 갈래로 내려와 내 '천(川)'자 모양을 이뤄 도천(道川)이라 불리다, 천(川)이 우리말로 내이므로 마을은 부르기 쉽게 도래라 불렸다 한다. 마을은 세 갈래 물길 따라 후곡, 동녘, 내촌으로 나뉘는데 마을 중심은 동녘이다.
마을역사를 기록한 <도천동지(道川洞誌)>에 따르면, 세조 때 한성우윤 최거가 탐진현감으로 가던 중 이곳 풍광이 좋아 내촌에 들어와 살았다 전한다. 그 후 중종 때 풍산홍씨 홍한의가 기묘사화의 화를 피해 이 마을에 은거하다 최윤형의 딸과 혼인해 재산을 물려받은 후 풍산홍씨 집성촌을 이뤘다고 한다.
마을 앞 연못이 근사하다. 삼신산(三神山)을 염두에 둔 듯, 연못 안에 세 개의 산을 만들어 놓았다. 연못을 배경으로 중층 대문의 양벽정(樣碧亭)이 근사하고 그 오른쪽 해묵은 나무 그늘아래 영호정(永護亭)이 아늑하다.
▲ 영호정백인걸이 남평현감으로 있을 때 학당으로 지었다. 마을 인재배출의 산실로 현재는 어른들의 쉼터. ⓒ 김정봉
▲ 홍기응 가옥마을의 중심 가옥으로 풍산홍씨 종가 역할을 한다. 원래 있던 종갓집은 이 가옥 뒤편에 있었으나 현재는 터만 전한다. ⓒ 김정봉
마을 깊숙이 홍기응 가옥(중요민속자료 151호)이, 그 아래에 도래마을 옛집(시민문화유산 2호)이 있다. 한옥펜션 '산에는 꽃이 피네' 옆집이 홍기창 가옥(전남민속자료 9호)이고 마을 남쪽, 초가대문 집이 홍기헌가옥(중요민속자료 165호)이다. 마을을 굽어보는 계은정(溪隱亭)이 산 중턱 계곡에 숨어 있다.
도래마을 굴뚝 이야기
도래마을 굴뚝은 남도의 굴뚝답게 낮거나 숨어 있다. 날씨가 온화하여 굴뚝을 높이 세우지 않더라도 굴뚝을 통해 찬바람이 방구들로 역행할 염려가 없고 따뜻한 날씨 탓에 해충이 많아 굴뚝을 낮게 만들었겠지만 이 마을에 터 잡은 입향조의 은둔적 생각이나 타인을 배려하는 집주인의 속뜻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타 할 것이다.
▲ 홍기응 가옥 대문채 굴뚝 화방벽면의 무늬와 굴뚝무늬가 같아 굴뚝은 숨은 듯이 보인다. ⓒ 김정봉
홍기응 가옥 대문채 굴뚝은 화방벽과 똑같은 미색, 줄무늬 굴뚝으로 숨은 듯 보인다. 안채 뒤, 장독대 앞에도 아주 낮은 굴뚝 한 기가 서있다. 홍기헌 가옥 안채 뒤에 있는 굴뚝과 모양과 크기가 같다. 굴뚝 벽면에 연기구멍을 만든 거나 암키와로 굴뚝 몸에 줄무늬를 내고 연가를 장식한 모양 또한 같다.
▲ 홍기응 가옥 안채 뒤 낮은 굴뚝 굴뚝 벽면에 연기구멍을 만들고 암키와로 굴뚝 몸에 줄무늬를 내고 연가를 장식하였다. ⓒ 김정봉
▲ 홍기헌 가옥 사랑채 굴뚝도래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홍기헌 가옥 사랑채 뒤 흙마루에 천연덕스럽게 자리 잡았다. ⓒ 김정봉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홍기헌 가옥 사랑채(1732년에 건축) 굴뚝은 보성 강골마을 열화정 굴뚝마냥 흙마루(토방) 위에 배연구만 도드라지게 나와 있던 것이 최근에 바뀌었다. 토실한 굴뚝 몸 위에 수키와 두 개를 포개 연기구멍을 낸 굴뚝이다. 내 눈에는 발길에 차일 정도로 존재감이 없어 보이는 예전 굴뚝이 더 좋게 보인다.
홍기응, 홍기창, 홍기헌 가옥 안채에는 기단굴뚝이 숨어 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지어졌어도(홍기응가옥 안채는 1892년, 홍기헌 가옥은 1929년경, 홍기창 가옥은 1918년) 똑같이 안채에 기단굴뚝을 갖고 있다. 마을 옛집 모두 기단굴뚝을 갖고 있는 것은 다른 마을에서는 보지 못하였다.
▲ 홍기응 가옥 안채 기단굴뚝 안채 기단을 따라 실난 꽃이 하얗게 피었다. 굴뚝 앞에도 실난이 핀 것으로 보아 기단에서 내뿜는 하얀 연기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 김정봉
▲ 홍기창 가옥 안채 기단굴뚝홍기창 가옥은 도래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이다. 굴뚝도 예쁘게 장식하여 꾸몄을법한데 기단굴뚝으로 만족하였다. ⓒ 김정봉
▲ 홍기헌 가옥 안채 기단굴뚝기단굴뚝 앞에 기와조각으로 막아놓았다. 기단굴뚝으로 들어오는 찬바람 무서워서 그런 거다. ⓒ 김정봉
마을은 풍산홍씨, 60%, 강화최씨, 20%로 구성된 집성촌으로 마을사람들은 샛문으로 이웃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자랐다고 들었다. 내 집, 네 집을 가리지 않고 서로 드나든 혈육이다 보니 집과 굴뚝에 대한 생각이 같아 세 집 모두 기단굴뚝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따뜻한 날씨 탓만은 아닌 것이다. 홍기응 가옥 대문에 집에 대한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 도래마을 샛문 마을사람들은 샛문을 통해 이웃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살았다고 들었다. 도래마을 옛집 샛문도 그 중 하나다. ⓒ 김정봉
대문에 나무를 덧대 사다리처럼 세 개의 단을 만들어 놓았다. 주인 말에 따르면, 배곯은 이웃이 덧댄 나무를 밟고 넘어와 문간에 놓여 있는 쌀을 가져다 허기를 달래라고 설치했다는 것이다. 집주인의 배려심이 담긴 구례 운조루 뒤주와 기단굴뚝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 홍기응 가옥 대문대문에 나무로 덧댄 모양이 별나다. 배곯은 이 누구나 대문을 넘어와 쌀을 쉽게 가져가도록 만든 장치라 들었다. ⓒ 김정봉
밥 굶은 이를 위해 '사다리 대문'을 만든 것처럼 밥불연기가 집 안에 머물게 하여 배곯은 이가 허기를 느끼지 않도록 기단굴뚝을 만든 것은 아닌지, 기단굴뚝에 집주인의 갸륵한 생각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이도 이제는 예전 말이다. 서로 왕래하는 샛문은 닫혀있고 세 가옥의 기단굴뚝 연기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홍기응 가옥 후손은 실난에 숨은 기단굴뚝을 보여주며 무안해 하였다. 굴뚝 바로 앞에 식물을 키우는 것은 더 이상 굴뚝에 연기를 내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주인과 나는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서로 멋쩍은 표정만 짓고 있었다. "아이 괜찮아요, 옛집을 관리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요?" 먼저 말을 건넸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보기에는 굴뚝 안쪽까지 어디 한 군데 무너진데 없이 말짱하였다. 홍기응 가옥처럼 실난을 심어 예쁘게 단장하거나 홍기헌 가옥과 홍기창 가옥처럼 암키와로 기단 굴뚝을 살짝 막아 놓는 일은 있어도 연기가 잘 빠지지 않는다고 아예 구멍을 막아버리는 일은 없었다.
굴뚝은 구들문화의 얼굴이다. 기단굴뚝이나 낮은 굴뚝은 따뜻한 날씨와 관계가 깊지만 얼굴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선조의 생각이나 이웃을 배려하는 숨은 뜻이 짙게 배어있는 굴뚝이다. 굴뚝구멍을 막아버리는 것은 선조의 생각이나 숨은 뜻을 뭉개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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