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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라면 '우병우' 벌써 내보냈다

조선시대판 '김영란법' 제정한 세종... '최측근 비리'에 엄격했던 왕

등록|2016.10.26 10:30 수정|2016.10.26 10:30
음식물이 아직까지는 뇌물이 아니었을 때의 이야기다. 음식의 경우에는, 아무리 많이 선물해도 뇌물죄로 처벌 받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일종의 김영란법을 만들어 공직자 청렴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왕이 있었다. 바로,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이다.

그 과정에서 세종은 최측근의 비리에 상대적으로 엄정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 끝에 김영란법을 만들 수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비리 의혹이 제기된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오지 않도록 그런 법을 제정했던 것이다. 세종은 결코, 한편으론 우병우를 비호하면서 한편으론 김영란법을 시행하는 그런 모순된 군주가 아니었다.

세종판 김영란법의 시작

세종시대판 김영란법 제정의 발단이 된 공직자가 있었다. 제주목사 이흥문이었다. 제주섬 북부를 관할하는 관료였던 그는 음식물이 법적인 뇌물이 아니라는 점을 악용했다. 상급자들에 대한 음식 선물을 핑계로 뇌물 공여의 효과를 톡톡히 봤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제주산 육포를 선호했다. 육포는 고기를 썰어 양념에 절인 다음에 말린 것이었다. 그때는 포육이라고 불렸다. 음력으로 세종 29년 윤4월 14일자(양력 1447년 5월 28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흥문은 임금님께 진상한다는 명목으로 제주산 육포를 끌어 모았다.

그런 다음에 그는 이것을 임금이 아닌 조정 대신들에게 대규모로 선물했다. 영의정 황희와 우찬성(공동 부총리) 김종서 등을 포함한 주요 대신들에게 보낸 것이다. 나중에 크게 문제가 된 것을 보면, 성의 표시 수준이 아니라 거의 뇌물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웬만한 관료들은 육포 맛을 다 보았다니, 얼마나 많은 육포가 동원됐을지 짐작할 수 있다. 임금에게 가야 할 육포가, 정작 임금 혼자만 모르는 가운데, 광범위한 뇌물공여의 수단으로 활용됐던 것이다. 음식물 자체는 뇌물이 아니라는 점을 철저히 악용했던 것이다.

▲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 김종성


이 일은 그대로 묻힐 뻔했다. 대신들은 이흥문의 행위가 지나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들이 받아먹은 게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발설하지 않았다. 선물을 받지는 못하고 소문만 들은 관료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힘 있는 대신들의 눈치를 봤던 것이다. 질긴 육포처럼 뇌물공여의 효과도 이처럼 질겼다. 이랬기 때문에, 임금인 세종이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혼식 하나를 계기로 문제가 갑자기 불거지게 되었다. 당시, 세종을 모시던 내시 중 하나가 제주 여성과 혼인식을 올렸다. 이 여성은 이흥문을 안 좋게 보고 있었다. 결국 이 여성이 남편이 된 내시에게 이흥문 이야기를 했고, 내시가 세종에게 이 사실을 귀띔한 것이다. 

세종은 이흥문이 임금에 대한 진상을 핑계로 육포를 잔뜩 끌어 모은 것에 대해서도 분개했지만, 육포 선물을 받은 대신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도 화가 났다. 조정의 기둥인 황희와 김종서마저 받았으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상을 핑계로 뇌물을 모은 이흥문의 행위는 처벌할 수 있지만, 육포를 선물로 받은 대신들의 행위는 처벌하기는 힘들었다. 그들의 숫자가 한 둘이 아닌 데다가, 음식은 뇌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벌의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이흥문의 행위에 대해 구체적 증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내시의 사적인 보고만 받았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종은 의정부에 지시를 내려, 이흥문 사건을 논의하도록 했다. 이때는 관찰사나 사또의 비리에 대해서는, 구체적 증거가 없더라도 풍문만으로도 수사를 개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흥문 사건을 의정부에 회부하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건을 다루게 된 의정부의 공직자들도 그 육포를 먹은 사람들이었다. 황희와 김종서는 의정부 소속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 문제를 덮고자 했다. 위의 <세종실록>에 따르면, 그들은 "풍문만으로도 수사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관계 기관에서 보고한 것도 아니고 내시의 입에서 나온 말에 불과하니까 사건을 키우지 마시고 이흥문을 파직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라고 세종에게 건의했다.

이렇게 대신들은 '이흥문한테 형벌을 가하지 말고 파면하는 선에서 그치자'고 제안했다. 자신들이 받은 게 있기 때문에 이흥문을 비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종은 이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공직자들이 너도 나도 "나도 받았지", "저도 받았습니다"라며 고백하는 분위기였지만, 세종은 묵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흥문을 파직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세종을 격노하게 한 사실, "승정원도 받았다"

▲ 왕과 신하들.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런데 세종의 분노를 재차 촉발시킨 일이 발생했다. 비서실인 승정원 직원들마저 이흥문의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비서실장급인 도승지 황수신과 수석비서관급인 좌승지 이사철이 육포 대신에 말 장식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지근거리에 있는 비서실 직원들이 이흥문의 선물을 받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근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난 모양이다.

세종은 사건을 다시 점화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모시는 비서들이니까 그냥 모른 척 덮어주자고 결심한 게 아니라, 내 뜻을 수행하는 비서들의 일이니까 더욱 더 엄중하게 처리하자고 결심한 것이다.

세종은 "승지와 결탁해서 주고받는 것은 대단히 불가하다"면서 "법률 조문과 옛날 제도를 조사해 엄중한 방지책을 세우라"고 영의정에게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세종대왕판 김영란법이었다. '음식도 뇌물'이라는 공식이 이때 성립한 것이다. 이때부터는 금품뿐 아니라 음식도 뇌물로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비서실 측근들에 대한 세종의 엄정한 태도가 김영란법 제정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에 이런 것이 있었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 시대 정치풍토와 상반되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위의 <세종실록>에 인용된 이야기다.

"승정원은 대단히 큰 권력을 쥐고 있지만, 죄를 짓게 되면 쫓아내기가 쉽다."

우리 시대에는 대통령 비서가 일반 공직자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비호를 받는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우병우 민정수석 사건이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달랐던 것이다. 과거에도 비서실의 권력은 막강했지만, 왕들은 비서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더 엄격했다. 그래서 위와 같은 말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측근 비리에 대해 그렇게 엄격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정 대신들의 경우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승정원 측근들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왕명을 전달하는 승정원 직원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엄정한 잣대를 들이댔다.

그래서 대신들이 이흥문의 선물을 받은 행위에 대해서는 묵인하고 있다가, 도승지 및 좌승지가 동일한 행위를 한 것에 대해서는 발끈했던 것이다. 왕을 모시는 비서는 훨씬 더 청렴해야 하고 훨씬 더 엄격한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세종이 도승지와 좌승지를 국정감사에 출석시키라는 요구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아마 세종은 두 말 없이 그들을 내보냈을 것이다. 아니, 요구를 받기도 전에 그들을 파면하고 징계했을 것이다.

혹시라도 좌승지가 "도승지께서 출석하시니 저는 안 가도 되겠습니다"라고 회피한다면, 세종은 "네가 왕이냐? 너도 가라!"며 등을 떠다밀었을 것이다. 이 정도로 세종은 비서실 직원들의 청렴에 대해서는 높은 잣대를 들이대는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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