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명은 주검 돌보면서 유족 위로하는 일"
17년 경력의 양성용 군산월명장례식장 장례지도사를 만나다
국교가 유교였던 조선은 3년 상제(삼년상)를 중요시했다. 삼년상은 사대부와 일반인 모두에게 적용됐다. 그러나 조정은 사대부 계층에만 강요하였고, 일반 백성에게는 100일 탈상을 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상례(장례) 역시 왕가(王家)에서는 3월~5월, 사대부는 9일, 백성은 삼일장이 보통이었다. 화장(火葬)을 금했으며 불교와 함께 샤머니즘 관습도 규제하였다.
상례는 사람이 죽어서 장사지낼 때 수반되는 모든 의례를 말한다. 이는 우리의 전통 관습이 잘 나타나는 통과의례로 죽음이 임박한 시기부터 운명한 후 시신을 처리하는 염습과 염의 의례, 죽은 자를 저승으로 떠나보내는 발인과 매장에 따르는 의례 등 상주들이 사회활동을 시작하는 매장 후부터 상복을 벗는 탈상까지 전 과정을 포함한다. -기자말
"내 사명은 주검 돌보면서 유족 위로하는 일"
17년 경력의 양성용 군산월명장례식장 장례지도사를 만나다
고인의 마지막 길 안내하고도 사회에서 냉대받아
군산 지역 상례도 유교 예법서 규정을 따랐다. 대표적인 지도서로 <사례편람>(四禮便覧)을 꼽는다. <사례편람>은 조선 후기 대학자 도암 이재(李縡·1680~1746)가 맹목적으로 행해지던 '주자가례'를 우리 실정에 맞게 손질해서 펴낸 예절서이다. 유교식 상례는 지역과 가문에 따라 조금씩 다를 뿐 광복 후에도 계속 행해지다가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새마을운동'과 '가정의례준칙'으로 간소화됐다.
장례식장이 없던 농경시대에는 염(殮)을 고인의 집에서 했다. 1980년대만 해도 '객사'를 두려워하던 시절이어서 부모가 돌아가시면 안방에 병풍을 치고 시신을 모셨다. 상복은 솜씨 좋은 마을 아낙들이 밤샘하면서 만들었고, 염은 자손과 친척이 지켜보는 가운데 2~3명의 경험자가 하였다. 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험한 일을 하고도 '염쟁이' 소리를 들으면서 차별과 냉대를 받았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돌보면서도 명함 하나 떳떳하게 내놓지 못했던 그들. 1970년대 이후 장례식장이 등장하고 대학에 장례 관련 학과가 신설되면서 장래 유망 직업으로 떠오른다. 2012년 시도지사가 발급하는 자격증(장례지도사) 제도가 시행되면서 위상이 높아졌다. 그러나 사회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직업에 대한 이미지는 예전 염쟁이, 염사, 장의사를 대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의 편견 속에서도 장례식장을 평생직장으로 여기고 17년을 꿋꿋하게 열심히 살아온 양성용(51) 장례지도사. 지난 19일 군산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와 만남은 두 번째, 첫 만남은 기자의 장모님 장례식을 치르던 2012년 초가을이었다. 염에서 매장까지 상례를 주도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하고 차분해서 대화의 자리를 갖고 싶었는데, 4년 만에 이뤄졌다. 아래는 양 지도사와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외환위기 때 장례지도사 길로 들어서
-염하는 일을 1999년부터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전 직업은?
"처음 직업은 트럭 기사였다. 군복무를 마치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해서 한푼 두푼 구두쇠처럼 돈을 모아 5톤 트럭을 장만했다. 잘 나갈 때는 덤프차도 구입해서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건설회사에서 수주도 따내는 등 사업에 재미를 붙였다. 그렇게 잘 나가던 1990년대 중반 어느 날 갑자기 일감이 줄기 시작했다. 이어 IMF(외환위기)가 몰려왔고 결국 빚잔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직업 놔두고 장례지도사 길을 택하게 된 배경은?
"외환위기 때 살던 집까지 날리고 전세살이를 시작했다. 재산을 모두 처분했지만, 빚이 완전히 청산된 것도 아니고 눈앞이 깜깜했다. 매월 꼬박꼬박 나가는 이자에 아이들 교육비, 최소한의 생활비 등 남의 집 머슴살이라도 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당장 일자리는 없고 그렇다고 거리로 나앉을 수도 없고 죽고만 싶었다.
1999년 어느 봄날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경기도 오산에 사는 선배에게 전화했더니 마침 사람을 구하고 있다면서 보자고 했다. 무슨 일을 하는 곳이냐고 묻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아내에게 일자리 알아보겠다는 말만 하고 곧바로 올라갔다. 물어물어 어렵게 찾아간 곳이 장례식장이었다. 충격을 받았지만, 뭐든 해야겠다고 결심한 터여서 두려울 게 없었다."
"아내는 지금도 장례식장 사무직원으로 알아"
-처음 시신을 관리하면서 무섭지 않았나?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시체를 봤지만 무덤덤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시신을 보관한 냉장고 옆에서 밤을 새우는 등 담력 키우기 훈련을 하면서 의지로 버티었다. 그리고 선배가 염할 때 옆에서 거들면서 하나씩 배워나갔다. 1~2년 지나자 사고사, 자연사, 변사, 사산아 등의 시신도 거리낌 없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막연하게나마 예(禮)와 효(孝)를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은 봉합해야 했고, 변사로 부패한 시신은 훼손되지 않도록 처리해야 했다. 가족도 없고, 형제도 없는 무연고 시체도 많았다. 경험이 쌓이면서 예와 효를 깨우치게 됐고 시체에 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노숙자나 가난으로 자살한 시신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염습 배운다고 했을 때 아내의 반대가 심했을 것 같은데?
"처음 장례식장에 들어갔을 때 아내가 알면 충격받을 것 같아 당분간 숨기기로 하고 사무직에 종사한다고 했다. 아내는 지금도 장례식장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혹시 장모님이 얘기해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객지생활 할 때 장모님이 아내와 함께 지냈고, 지금도 모시고 있다. 그래서 몇 년 전 장모님에게만 살짝 얘기했더니 '자네는 죽으면 천당에 갈 것'이라고 했다. (웃음)"
-장례지도사가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장례지도사란 유족의 요청에 따라 장례 절차를 주관하는 사람으로 장례 상담, 시신관리(시신 보관, 소렴, 대렴 등), 의례지도 및 빈소 설치, 발인, 매장 등을 종합적으로 관리한다. 요즘엔 보통 삼일장을 치르기 때문에 입관 절차도 사망 후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한다. 이렇듯 하는 일이 복잡 다양하다. 한마디로 장례의 모든 절차를 진행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사망하면 입관하기 전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인이 사망 직전 입고 있던 옷을 탈의하고 하얀 배냇저고리를 입힌 뒤 칠성판에 뉘어 모신다. 이 과정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유족이 볼 수 없는 그 전 단계가 더 힘들다. 특히 사고사를 당한 시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라서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유족이 봐서 가슴 아프지 않도록 변도 닦아내고, 얼굴에 메이크업도 하고 끈 하나도 정성껏 조심스럽게 수습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검을 돌보는 그 자체가 보람 있는 일
-자격증 제도(2012) 시행 후 장례지도사 대우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은 미비한 수준이다. 대인관계 등 사회활동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지?
"사람들 생각처럼 수입도 그리 높지 않고, 처우도 개선되지 않았다. 퇴직금은 물론 야간 수당도 없다. 대인 관계도 직업과 관련된 사람 아니면 되도록 만남을 피한다.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사람을 돌본다'는 자부심을 품고 종사하고 있다. 내 사명은 주검을 돌보면서 유족을 위로하는 일이다."
-일을 하면서 속상할 때도 있고 보람을 느꼈을 때도 있을 텐데?
"내가 필요하다는 곳이면 장례식장이든 사고현장이든 달려가 정성껏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 등 열과 성을 다한다. 장례를 마치고 수고했다며 손을 잡아주는 유족도 고맙지만, 주검을 돌보는 그 자체가 보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흉하게 훼손된 시신도 부모 같고, 할아버지·할머니 같고, 형제자매처럼 애틋하게 느껴진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장례지도사 모두 그런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취중에 시비를 걸거나 사사건건 트집 잡는 유족도 있다. 어이가 없지만 그럴 때는 '슬픔의 다른 표현이겠지' 하고 흘려듣는 게 상책이다. 실망하고 속상했던 장면은 부모 시신을 앞에 두고 유산 상속 문제로 형제들이 티격태격 싸우는 모습이다. 싸움 형태도 다양한데, '올케가 잘못 모셔서 아버지가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다'는 대목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많을 때는 하루에 시신을 열 구 이상 처리할 때도 있었다는 양성용 장례지도사. 그는 "쉰을 넘은 나이 영향도 있겠지만, 염을 하면서 삶을 배웠다. 길을 가다가 노인이 홀로 외롭게 앉아 있으면 한 번 더 쳐다봐진다. 얼마 전에는 자살한 여학생 시신이 딸처럼 느껴지면서 눈물이 나왔다. 그런 걸 보면 장례지도사란 직업이 팔자에 타고난 모양이다"라며 허허롭게 웃었다.
상례는 사람이 죽어서 장사지낼 때 수반되는 모든 의례를 말한다. 이는 우리의 전통 관습이 잘 나타나는 통과의례로 죽음이 임박한 시기부터 운명한 후 시신을 처리하는 염습과 염의 의례, 죽은 자를 저승으로 떠나보내는 발인과 매장에 따르는 의례 등 상주들이 사회활동을 시작하는 매장 후부터 상복을 벗는 탈상까지 전 과정을 포함한다. -기자말
"내 사명은 주검 돌보면서 유족 위로하는 일"
17년 경력의 양성용 군산월명장례식장 장례지도사를 만나다
▲ 굴건제복 차림의 상주가 문상객을 맞고 있다.(1950-60년대로 추정) ⓒ 문길수(제공)
고인의 마지막 길 안내하고도 사회에서 냉대받아
▲ 군산시 대야면 만자마을 상가 풍경(1980년대) ⓒ 조종안
군산 지역 상례도 유교 예법서 규정을 따랐다. 대표적인 지도서로 <사례편람>(四禮便覧)을 꼽는다. <사례편람>은 조선 후기 대학자 도암 이재(李縡·1680~1746)가 맹목적으로 행해지던 '주자가례'를 우리 실정에 맞게 손질해서 펴낸 예절서이다. 유교식 상례는 지역과 가문에 따라 조금씩 다를 뿐 광복 후에도 계속 행해지다가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새마을운동'과 '가정의례준칙'으로 간소화됐다.
장례식장이 없던 농경시대에는 염(殮)을 고인의 집에서 했다. 1980년대만 해도 '객사'를 두려워하던 시절이어서 부모가 돌아가시면 안방에 병풍을 치고 시신을 모셨다. 상복은 솜씨 좋은 마을 아낙들이 밤샘하면서 만들었고, 염은 자손과 친척이 지켜보는 가운데 2~3명의 경험자가 하였다. 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험한 일을 하고도 '염쟁이' 소리를 들으면서 차별과 냉대를 받았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돌보면서도 명함 하나 떳떳하게 내놓지 못했던 그들. 1970년대 이후 장례식장이 등장하고 대학에 장례 관련 학과가 신설되면서 장래 유망 직업으로 떠오른다. 2012년 시도지사가 발급하는 자격증(장례지도사) 제도가 시행되면서 위상이 높아졌다. 그러나 사회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직업에 대한 이미지는 예전 염쟁이, 염사, 장의사를 대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장례지도사 길을 선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양성용씨 ⓒ 조종안
사회의 편견 속에서도 장례식장을 평생직장으로 여기고 17년을 꿋꿋하게 열심히 살아온 양성용(51) 장례지도사. 지난 19일 군산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와 만남은 두 번째, 첫 만남은 기자의 장모님 장례식을 치르던 2012년 초가을이었다. 염에서 매장까지 상례를 주도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하고 차분해서 대화의 자리를 갖고 싶었는데, 4년 만에 이뤄졌다. 아래는 양 지도사와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외환위기 때 장례지도사 길로 들어서
-염하는 일을 1999년부터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전 직업은?
"처음 직업은 트럭 기사였다. 군복무를 마치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해서 한푼 두푼 구두쇠처럼 돈을 모아 5톤 트럭을 장만했다. 잘 나갈 때는 덤프차도 구입해서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건설회사에서 수주도 따내는 등 사업에 재미를 붙였다. 그렇게 잘 나가던 1990년대 중반 어느 날 갑자기 일감이 줄기 시작했다. 이어 IMF(외환위기)가 몰려왔고 결국 빚잔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직업 놔두고 장례지도사 길을 택하게 된 배경은?
"외환위기 때 살던 집까지 날리고 전세살이를 시작했다. 재산을 모두 처분했지만, 빚이 완전히 청산된 것도 아니고 눈앞이 깜깜했다. 매월 꼬박꼬박 나가는 이자에 아이들 교육비, 최소한의 생활비 등 남의 집 머슴살이라도 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당장 일자리는 없고 그렇다고 거리로 나앉을 수도 없고 죽고만 싶었다.
1999년 어느 봄날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경기도 오산에 사는 선배에게 전화했더니 마침 사람을 구하고 있다면서 보자고 했다. 무슨 일을 하는 곳이냐고 묻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아내에게 일자리 알아보겠다는 말만 하고 곧바로 올라갔다. 물어물어 어렵게 찾아간 곳이 장례식장이었다. 충격을 받았지만, 뭐든 해야겠다고 결심한 터여서 두려울 게 없었다."
"아내는 지금도 장례식장 사무직원으로 알아"
▲ 염에 임하는 양성용 장례지도사. 굳은 표정에서 진지함이 느껴진다. ⓒ 조종안
-처음 시신을 관리하면서 무섭지 않았나?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시체를 봤지만 무덤덤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시신을 보관한 냉장고 옆에서 밤을 새우는 등 담력 키우기 훈련을 하면서 의지로 버티었다. 그리고 선배가 염할 때 옆에서 거들면서 하나씩 배워나갔다. 1~2년 지나자 사고사, 자연사, 변사, 사산아 등의 시신도 거리낌 없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막연하게나마 예(禮)와 효(孝)를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은 봉합해야 했고, 변사로 부패한 시신은 훼손되지 않도록 처리해야 했다. 가족도 없고, 형제도 없는 무연고 시체도 많았다. 경험이 쌓이면서 예와 효를 깨우치게 됐고 시체에 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노숙자나 가난으로 자살한 시신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염습 배운다고 했을 때 아내의 반대가 심했을 것 같은데?
"처음 장례식장에 들어갔을 때 아내가 알면 충격받을 것 같아 당분간 숨기기로 하고 사무직에 종사한다고 했다. 아내는 지금도 장례식장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혹시 장모님이 얘기해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객지생활 할 때 장모님이 아내와 함께 지냈고, 지금도 모시고 있다. 그래서 몇 년 전 장모님에게만 살짝 얘기했더니 '자네는 죽으면 천당에 갈 것'이라고 했다. (웃음)"
-장례지도사가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장례지도사란 유족의 요청에 따라 장례 절차를 주관하는 사람으로 장례 상담, 시신관리(시신 보관, 소렴, 대렴 등), 의례지도 및 빈소 설치, 발인, 매장 등을 종합적으로 관리한다. 요즘엔 보통 삼일장을 치르기 때문에 입관 절차도 사망 후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한다. 이렇듯 하는 일이 복잡 다양하다. 한마디로 장례의 모든 절차를 진행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사망하면 입관하기 전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인이 사망 직전 입고 있던 옷을 탈의하고 하얀 배냇저고리를 입힌 뒤 칠성판에 뉘어 모신다. 이 과정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유족이 볼 수 없는 그 전 단계가 더 힘들다. 특히 사고사를 당한 시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라서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유족이 봐서 가슴 아프지 않도록 변도 닦아내고, 얼굴에 메이크업도 하고 끈 하나도 정성껏 조심스럽게 수습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검을 돌보는 그 자체가 보람 있는 일
▲ 양성용 장례지도사가 장지에서 매장을 돕고 있다(2012년 9월 촬영) ⓒ 조종안
-자격증 제도(2012) 시행 후 장례지도사 대우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은 미비한 수준이다. 대인관계 등 사회활동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지?
"사람들 생각처럼 수입도 그리 높지 않고, 처우도 개선되지 않았다. 퇴직금은 물론 야간 수당도 없다. 대인 관계도 직업과 관련된 사람 아니면 되도록 만남을 피한다.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사람을 돌본다'는 자부심을 품고 종사하고 있다. 내 사명은 주검을 돌보면서 유족을 위로하는 일이다."
-일을 하면서 속상할 때도 있고 보람을 느꼈을 때도 있을 텐데?
"내가 필요하다는 곳이면 장례식장이든 사고현장이든 달려가 정성껏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 등 열과 성을 다한다. 장례를 마치고 수고했다며 손을 잡아주는 유족도 고맙지만, 주검을 돌보는 그 자체가 보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흉하게 훼손된 시신도 부모 같고, 할아버지·할머니 같고, 형제자매처럼 애틋하게 느껴진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장례지도사 모두 그런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취중에 시비를 걸거나 사사건건 트집 잡는 유족도 있다. 어이가 없지만 그럴 때는 '슬픔의 다른 표현이겠지' 하고 흘려듣는 게 상책이다. 실망하고 속상했던 장면은 부모 시신을 앞에 두고 유산 상속 문제로 형제들이 티격태격 싸우는 모습이다. 싸움 형태도 다양한데, '올케가 잘못 모셔서 아버지가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다'는 대목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많을 때는 하루에 시신을 열 구 이상 처리할 때도 있었다는 양성용 장례지도사. 그는 "쉰을 넘은 나이 영향도 있겠지만, 염을 하면서 삶을 배웠다. 길을 가다가 노인이 홀로 외롭게 앉아 있으면 한 번 더 쳐다봐진다. 얼마 전에는 자살한 여학생 시신이 딸처럼 느껴지면서 눈물이 나왔다. 그런 걸 보면 장례지도사란 직업이 팔자에 타고난 모양이다"라며 허허롭게 웃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와 매거진군산 11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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