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사실상 직무정지, 이제야 국정 제대로 돌아간다
[게릴라칼럼] 무자격 대통령의 하야가 곧 '국정 정상화'다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10월 마지막 날인 31일에 대통령은 아무 일정을 잡지 않았고, 11월 1일에는 달랑 '주한대사 신임장 제정식'에 참석한 게 전부였다. 신임장 제정식이란 한국에서 일하게 된 외국 대사들을 맞는 의전 행사다. 다시 2일과 3일 이틀을 아무 일정 없이 보냈고, 금요일 4일에는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2차 대국민 사과를 했다.
지난주 첫날인 7일에는 (논란이 된) 종교계 원로와 만났고, 8일에는 국회 방문, 9일에 다시 종교계 원로 간담회와 미 대선 관련 상임위 보고를 받았다. 11월 둘째 주 5일 가운데 3일을 최순실 스캔들 해명과 여론 달래기로 보낸 것이다. 10일에는 도널드 트럼프와 10여 분 통화한 뒤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 행사에 참석했으며, 다시 11일에는 아무런 일정을 잡지 않았다.
요약하면, 지난 보름 동안 주말을 뺀 10일 중 4일을 아무 공식 일정 없이 지냈고, 다시 4일을 대국민 사과와 해명 등에 소비한 셈이다. 11월 절반이 지나는 동안 2~3일 정도를 주한 대사와 외국 대통령 의전 행사를 치른 것이 전부다. '내치'는 손을 놓은 채 '외치'를 의무방어 형태로 처리하는 식으로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대통령이 일을 안 한다고 불평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박 대통령이 위기에 몰려 '내치'를 포기한 순간부터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대통령과 여당, 보수언론은 더는 '국정공백'을 걱정하지 마시라.
언론, 법원, 검찰까지... 모두 제 역할을 하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0월 25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최순실 의혹'에 관해 대국민 사과를 한 뒤 돌아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주위를 돌아보라. 이제 비로소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 언론이 언론의 역할을 하고 있고, 교육자가 교육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 법원이 법원의 역할을 하고 있고, 경찰도 경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심지어 검찰마저 변하는 시늉을 보인다.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가. 권력을 감시하는 '감시견'과 국민의 목소리를 정부에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 아닌가. 보라, 한국의 거의 모든 언론이 권력에 쓴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신기하게도 보수신문과 종편방송마저 자신들이 끔찍이 모시고 보살피던 바로 그 실세의 치부를 파헤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들이 대체 언제부터 시위를 대문짝 만하게 보도하며 '촛불 민의'나 '국민의 명령' 같은 표제를 달았던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그들은 결국 속내를 드러냈지만, 이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하기로 하자).
한국교총은 어떤가. 이들은 국정교과서에 찬성해 온 대표적인 보수 교원단체다. 그동안 '국론통합 기대'라며 국정교과서를 공식적으로 지지해 온 이들이 최근에 입장을 바꿨다. "국정 교과서에서 친일, 독재미화, 건국절 제정 등 교육현장 여론과 배치되는 내용이 담길 경우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교육현장 여론'을 말하는 게 우습긴 하다. 역사교사들 92%가 일관되게 국정 역사 교과서에 반대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태도 변화만 해도 반가운 것이, 보수 교육자들의 태도가 약간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법원은 시위대가 청와대 부근까지 행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들은 경찰의 금지 통고에 대해 "집회를 조건 없이 허용하는 게 민주주의 국가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여기에 청와대 근처까지 행진을 허용해야 하는 이유로 "대통령에게 국민의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이번 집회의 특수한 목적"을 언급했다. 당연한 결정에 왜 이리 마음이 뿌듯한가.
경찰은 과거의 폭력성을 적잖이 누그러뜨린 모습이었다. 진작부터 그래야 했다. '폭력 시위'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 집회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경찰이 몰랐을 리 없으나, '정권 심기 수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니, 검찰까지 검찰 모양새 연출
▲ 형사 고발한 참여연대 "몸통 박근혜 대통령 수사하라"참여연대 하태훈 공동대표를 비롯한 회원들이 지난 11월 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부속비서관,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 안봉근 전 국정홍보비서관, 청와대 관계자 등, 재벌대기업 총수 7인을 고발하고 검찰의 성역없는 수사를 촉구하는 모습. ⓒ 유성호
세상이 변하다 보니, 검찰까지 검찰의 역할을 하는 모양새를 연출하고 있다. 대통령의 소환조사 가능성을 말하더니, '통일은 대박이다'가 최순실 작품이라고 잠정 결론 내렸다고 SBS가 보도했다. 사실 최순실 작품이 아닌 것을 밝히는 게 더 빠르다는 생각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르 재단'과 '케이스포츠 재단' 설립과 운영에서 대통령이 해 온 역할을 밝히는 것이다. 이미 <한겨레> 등을 통해 대통령이 직접 총수들을 만나 구체적인 액수까지 밝히며 돈을 요구했다는 증언까지 나온 상태다.
검찰은 청와대의 비선실세에 의혹이 드러낼 때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 온 혐의를 받고 있다. 이번 수사는 검찰이 추악한 정권 비리의 공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마지막 기회다.
참으로 오랜만에 '감시견'과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해낸 보수언론은 다만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야권을 향해서는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면서 '내치 총리-외치 대통령'과 '개헌'을 요구하고 있다. 강천석 <조선일보> 논설고문은 지난 12일자 칼럼에서 개헌에 반대하고 '하야'를 요구하는 야권을 향해 "정권이 거저 통째로 굴러온 호기"로 삼는다고 비난하며 "대통령이 외교·국방 영역을 맡고 국회가 선택한 국무총리가 내정 전반을 책임지는 역할 분담 체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동아일보>도 대통령 하야 대신 탄핵 절차를 밟으라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13일자 사설에서 "박 대통령이 퇴진하면 현행 헌법에 따라 60일 이내에 후임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며 "우리 정치권이 그런 혼란을 감당할 능력이 있느냐"고 묻는다. 덧붙여 "무엇보다 정치권이 민심에 편승해, 아니 앞장서 하야를 외치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라고 지적한다.
보수언론의 이런 태도는 아마도 아직 보수정치판을 새로 짜지도 않은 상태에서 상황이 급박히 전개되자, 권력 창출 과정이 자신들 통제권 밖으로 벗어날까봐 두려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에게 시간을 벌어주면서 자신들도 '킹 메이킹' 작업을 위한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보수언론의 훈수가 아니어도, 지금까지 대통령 태도를 보면 자신이 2선으로 물러나고 총리에게 내치를 맡기겠다고 발표할 공산이 크다. 실제로 청와대는 지난 주말 100만 촛불이 모인 뒤 "대통령으로서 책임 다하고 국정 정상화를 위해 고심" 중이라는 대통령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책임총리제'는 여론 무마를 위한 상징적 제스처일 뿐이고, 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밀실정치를 계속하도록 내버려두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조선>과 <동아>는 '사회 혼란'으로 위협하지만 나라가 무자격자 대통령에게 휘둘리는 것 만큼 더 큰 혼란은 없다. 우리 사회는 그런 혼란을 감당할 여유가 없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그동안 행해 온 '외치'는 재앙 그 자체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무책임한 '널뛰기'를 하다가 덥석 사드를 받아들였고, 미국에 등 떠밀려 굴욕적인 위안부 협상까지 떠안았다. 여기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가서명까지 함으로써 일본의 재무장 계획에 힘을 보태는 한편, 자위대의 한국 주둔을 위한 법적 장치까지 마련해 주었다.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된 한반도에서 제 나라 군대의 전시작전권을 '무기한' 미국에 넘긴 게 누구인가. 바로 박 대통령이다. 이제 그 작전권은 아무런 검증도 되지 않은 도널드 트럼프 손에 자동으로 넘어갔다. 보수언론은 이런 무책임한 지도자에게 외교와 안보를 계속 맡기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내치의 정상화'가 대통령이 손을 뗀 데서 시작 되었듯, '외치의 정상화' 역시 그가 손을 떼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박근혜 퇴진하라!지난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하야'를 촉구하고 있다. ⓒ 이정민
지난 몇 주간 우리가 경험한 '비정상화의 정상화'는 시민이 주인이 될 때 어떤 신나는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 준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은 체제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시민들은 체제 변화에 걸맞은 사회적 변화를 누리지 못했다. 그동안 유예되었던 민주사회의 모습을 이제 비로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냥 찾아온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세월호 유가족의 끊임없는 외침과 요구가 있었고, 백남기 선생의 희생이 있었으며, 이들과 연대한 시민들의 분노와 행동이 있었고, 용기있는 소수 언론인이 있었다.
이제 겨우 썩은 고목의 밑동이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보수언론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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