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싶다, '수능 대박'친 이들 지금 뭐하고 있나
[아이들은 나의 스승 94]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논란... 사회 문제 눈 감고 공부만 하라고?
▲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17일 오전 인천시 연수구 인천여고 앞에서 연수여고 1·2학년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는 선배들을 응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어김없이 또 수능이 찾아왔다. 올해는 수능 한파가 없을 거라고 한다. 고3 교실에는 한 달 전부터 'D-day 카운트'가 시작됐고, 열흘쯤 전부터는 매점에서 파는 학용품도, 과자도, 급식소의 후식조차도 '수능 대박'의 염원을 담은 것들로 채워졌다. 수능을 끝으로 3년간의 힘겨운 고등학교 생활은 마감된다. 수능은 사실상의 졸업식이다.
수능을 하루 앞둔 아이들의 얼굴은 긴장한 빛이 역력하다. 수능이 끝난 다음 날부터는 늘 그래왔듯 고3 교실은 오전 수업만 이뤄질 테고, 아예 등교조차 하지 않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허탈감을 느끼는 아이들도 적잖을 거다. 수능이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이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까닭이다.
국가대표 축구선수처럼 수험생 또한 곧잘 '전사'로 비유된다.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는 오로지 '수능 전사'를 길러내는 일사불란한 훈련소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수능을 향해 앞만 보고 내달려왔다. 가정과 학교, 학원 등 온 사회가 혼연일체가 돼 아이들을 '수능 맞춤형 인간'으로 길러냈고, 그 기나긴 여정의 끝에 와 있다.
"나라가 이 모양인데..." 어느 수험생의 냉소
▲ 수능 시험장에 등장한 최순실 비판 문구'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17일 오전 전북 전주시 완산구 기전여자고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국정농단 사태 중심에 있는 비선실세 최순실씨를 비판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나라가 이 모양인데, 수능이 다 무슨 소용일까요?"
한 아이가 혼잣말처럼 내게 던진 '냉소'다. '수능이 대수냐'는 식의 이런 표현은, 20년 가까운 교직생활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학생부 종합전형의 확대로 비중이 크게 낮아졌다고는 하나, 수능은 아이들에겐 대학입시의 상징으로 여전히 굳건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수능을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마저 '삐딱하게' 만들어버렸다.
요즘 들어서는 수능을 치르는 아이들보다 오히려 어른들이 더 수능에 주눅이 들어있는 듯하다. 지난 12일 100만 촛불의 혁명이 시작됐는데도, 수능을 앞둔 고3 교실은 별천지인 양 평온하기 그지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들은 눈과 귀를 열고 교실 밖을 보려고 안달인데, 교사들은 두꺼운 가림막을 치고 관심을 수능 뒤로 미루라며 다그치고 있다.
아이들의 '나라 걱정'을 어른들이 입막음하는 꼴이다. '나라 걱정은 어른들이 할 테니, 너희들은 수능 준비만 열심히 하라'는 투다. 대한민국 고3에게는 수능 외에 어떠한 곁눈질도 허락되지 않는다. 속으로야 백 번 공감하고 있을 테지만, "이게 나라냐"는 아이들의 반문에 어른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수능 대박"만 되뇌며 동문서답하고 있다.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한 말인지는 알 길 없으나, '수능'과 '대박'은 마치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대박'이란, 모르긴 해도, 제비가 물고 온 박씨로 인해 부자가 됐다는 흥부전에서 따온 말일 것이다. 곧, 큰돈을 버는 것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일 테다.
번역이 필요한 박근혜 대통령의 여러 말들 중에도 '통일 대박'이라는 게 있었다. 최순실의 '첨삭지도'가 있었다는 의혹을 받는 이 표현도, 듣는 이에게 '통일이 돈을 가져다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두고 대통령의 언사로는 부적절하고 경박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고작 '돈'으로 비유하는 천박한 인식에 대한 질타였다.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이 백일하에 드러난 마당에, 지금 '통일 대박'이라는 말을 쓰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당시 물 만난 고기 마냥 호들갑 떨던 언론도 더 이상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대박'이라는 말에는 '천박하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며, 마구 끌어다 쓰는 걸 꺼리는 분위기도 있다. 딱 하나, '수능 대박'만 빼고.
'인생 한 방' 가르치는 것, 교육도 사랑도 아니다
▲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열흘 앞둔 지난 7일 서울 중구 이화여고에서 고3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 연합뉴스
돌이켜 보면, 교사와 학부모가 제자와 자녀 앞에서 '수능 대박'을 외치는 건 민망한 짓이다. 로또 한 방으로 인생 역전을 꿈꾸는 것과 맥락상 하등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 앞에서 버젓이 '인생은 한 방'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 천박한 바람을 두고 학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며, 교사의 제자를 위한 교육이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오로지 '수능 대박'을 위해 전국 각지의 절과 교회에 학부모들이 떼로 모여 치성을 드리고, 100일 기도회를 열며,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다니는 사회라면 이미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이를 애끓는 모성애로 미화하는 건 어이없는 짓이다. 아무리 간절한 바람일지라도 '내 자녀만을 위한' 기도는 이뤄질 리도 없지만, 이뤄져서도 안 되는 그저 이기적인 작태일 뿐이다.
그렇다고 공고한 학벌구조가 온존한 이상 수능에 목 매다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건 비겁하다. 미래세대 아이들에게 '인생은 한 방'이라는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어쨌건 자신들이 만든 퇴행적인 학벌구조를 깨뜨리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아이들을 그 무한경쟁의 굴레 속에 밀어 넣어서야 되겠는가. 기성세대에게는 결자해지의 의무가 있다.
요컨대, 수능에 큰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수능 날 하루 온 나라가 들썩이며 호들갑 떨어온 관행을 탈피해야 한다. 학창시절 치르게 되는 수많은 시험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러자면 우선 고작 시험 하나로 인생이 결정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수능 하나로 아이들의 삶의 질이 결정된다고 믿는다면, 그 낡은 생각에서 이제 깨어날 때도 됐다.
실제로 수능 만점이나 서울대 수석 합격보다 '실세 엄마'와 '대통령 이모'를 둔 금수저가 훨씬 더 힘이 세다는 걸 똑똑히 보고 있지 않나. 그것이 '정유라' 하나만의 특별한 사례는 아닐 것이다. 얼마 전 공고한 학벌 구조에 맞서 활발하게 싸워 온 시민단체인 '학벌 없는 사회'가 자진 해산을 결정했다. 이 또한 우리나라가 태어날 때부터 인생이 결정되는 신분제 사회로 퇴행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 아니겠는가.
정유라 대신 정유라를 만드는 '구조'에 저항해야
▲ 10일 오전 대전 중구 청란여고에 나붙은 고3학생의 대자보. ⓒ 장재완
'정유라'에 분개한다면 '정유라'를 부러워하기보다 '정유라'를 만든 불의한 사회 구조를 갈아엎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학교가 무슨 집단적 주술인 양 '수능 대박'을 외치기 전에,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깟 수능 하나로 아이들의 미래가 좌우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바꿔내야 한다. 이는 수능 점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해법이기도 하다.
"어쩌면 수능은 우리 청소년들을 사회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짧게는 고등학교 3년, 길게는 학창시절 12년 동안 시험공부 외엔 아무 생각 못하도록 만들잖아요. 옛날에는 독립운동도 하고, 민주화운동도 하고 그랬다는데."
교육이 깨어있는 시민을 기르는 일일진대, 냉소일지언정 "이 시국에 수능이 다 뭐냐"고 푸념하는 아이가 주먹 불끈 쥐고 '수능 대박'을 자신하는 아이보다 훨씬 학생다워 보였다. 수능시험장 주변과 학원가 곳곳엔 일찌감치 형형색색의 '수능 대박' 현수막이 내걸렸다.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렇게 '수능 대박'을 친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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