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투표, 내 친구는 박근혜를 찍었다
박근혜와 트럼프의 당선... 지지자 비난하며 대화 차단했던 나, 반성한다
▲ 제18대 대통령선거 투표일인 지난 2012년 12월 19일 오전 서울 은평구 불광동 북한산 현대홈아파트에 설치된 불광1동 제2투표소앞에 유권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 권우성
2012년 대선은 나의 첫 번째 대선이었다. 내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내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다는 것에 매우 설렜다. 4년간의 입시를 끝내고 맞이한 대학 새내기 생활은 그 설렘을 더했다. 12월 19일이 다가올수록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대선의 비중은 커져갔다.
특히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 여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고, 논쟁이 오갔다. SNS에서는 논쟁을 넘어서 설전이 오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박근혜는 선택지에 없었다. 친구들과 대화 속 박근혜는 논외였고, 이름이 언급되면 비웃음과 비난이 난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그 친구는 부쩍 말이 없었던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야권 단일화가 이루어졌고, 1988년 대선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때 난 확신에 차있었다. '이제 지지자들이 하나로 모일 일만 남았다', '설마 박근혜를 찍겠어?' 3차례의 대선 토론에서, 박근혜는 수준 미달의 모습을 보여줬다. 구체적인 정책적 비전 없이 아버지의 후광만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아버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숨을 앗아간 독재자였고, 그의 경제정책은 단기간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으나, 훗날 1998년 경제위기에 단초가 됐다.
나에게 박근혜는 대통령으로서 자격미달이었다. 자연히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비난, 조소 그리고 계도의 대상이 됐다. 그 친구는 아예 말이 없어졌고, 나는 확신을 키워갔다. 단일화 이후에는 지지율도 앞섰다. 하지만 2012년 12월 19일, 박근혜는 대통령이 됐다.
박근혜와 트럼프의 당선, 어떤 기시감
▲ 지난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 되고 있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여의도 당사에 마련된 선거종합상황실에서 축하꽃다발을 건네받은 뒤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나 방송 3사의 18대 대선 출구조사에 따르면, 20대가 33.7%나 박근혜를 뽑았다는 게 놀라웠다. 지역주의와 과거 경제발전의 향수와는 거리가 먼 20대가? 한동안 충격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 친구로부터 박근혜를 뽑은 이유를 들은 건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였다. 친구의 대답은 나를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뽑았어."
한 동기로부터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야당이 그냥 싫어."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난 그 말을 듣고 상당한 비난을 퍼부었던 것 같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건 지난 11월 8일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트럼프 당선에는 다양한 설명이 붙을 수 있으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어 보인다. 경제가 침체되며 미국 시민들은 삶이 무너지는 경험을 겪었다. 이를 트럼프는 소수인종,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탓으로 돌렸고, 분노할 대상을 찾지 못했던 몇몇 시민들은 트럼프 지지자가 됐다.
하지만 일부 지식인 층(언론인, 정치인, 일부 시민 등)은 '정치적 올바름'을 근거로 대화를 차단한 채 그들을 인종, 성차별주의자, 무식자 등으로 규정했고, 계도하려 들었다. 그 결과 트럼프 지지자들은 모습을 감췄다. 각종 언론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의 우세를 점쳤다. 이메일 사건이 다시 터지면서 불리한 국면을 맞이했지만, 선거 직전에는 다시 트럼프에 우세한 지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됐다. 사라진 줄 알았던 트럼프 지지자들은 다시 나타났다.
그토록 욕하던 꼰대, 나였다
▲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소식에 환호하는 지지자들. ⓒ 연합뉴스·EPA
20대는 꼰대를 싫어한다.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남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꼰대질은 참을 수 없다. 낮은 취업률,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노오력'하라며 모든 문제는 우리의 노력 부족이라고 말하는 그들을, 우리는 싫어한다. 꼰대를 거부하며, 싫어하기에 스스로가 꼰대가 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한다. 꼰대들에게 예의를 갖추라 주장한다.
나 또한 그러하다고 믿었다. 학교에서 선배가 되거나, 군대에서 선임이 되면서 항상 '꼰대가 되지 말자'를 되뇌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당선을 보며 깨달았다. 온몸으로 꼰대를 거부했던 내가 바로 꼰대였다는 것을. 꼰대는 꼭 나이가 많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들은 적이 있지만, 그게 내 이야기일 줄은 몰랐다.
물론 트럼프와 박근혜를 뽑은 행위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며, '정치적 올바름'과는 거리가 멀다. 트럼프는 위기에 빠진 시민들을 구해주지 못한다. 그가 추진할 정책들은 일명 줄푸세로, 규제를 풀고 신자유주의를 더 강화시킬 것이다. 자본가가 아닌 일반시민들의 삶은 더욱 황폐해질 것이다. 정말 경제가 바뀌길 바라며, 금융 기득권들에게 2008년 경제위기의 책임을 물게 하고 싶었으면 버니 샌더스를 찍었어야 했다.
또한 그가 당선을 위해 이용한 인종, 성차별주의는 미국 시민들을 분열시킬 것이며, 미국의 문화적인 힘을 약화시킬 것이다. 심지어 박근혜는 아예 색깔조차 없었다. 오로지 아버지 후광으로 표를 얻었다. 대선 과정에서 주창한 공약을 지키지 않으며, 공약을 이행하라는 시민들에게는 물대포를 쐈다. 박근혜 정권 이후 시민들의 삶은 더욱 암담해졌다. 가계부채는 천정부지로 올랐고, 70년대식 통제로 문화적 상상력도 소멸되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 분명히 트럼프와 박근혜를 뽑는 과정은 올바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언론, 정치인, 일부 시민들 그리고 나의 꼰대질이 트럼프, 박근혜 지지자들의 분노를 불러오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으리라.
꼰대질이 시작되면 옳고 그름의 문제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말하는 내용은 산화되고 오직 가르침을 당한 기억만 남게 된다. 분한 감정만 머무른다. 자연히 대화는 소멸된다. 그 사라진 대화는 트럼프, 박근혜의 당선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꼰대질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득의 기술이라며,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격언도 많이 봐왔고 공감도 했다. 현실은 트럼프와 박근혜 지지자들을 가르치려던 '우리'가 꼰대였다.
내 친구는 집회에 나갔다, 하지만
▲ 국민들의 분노, '박근혜는 퇴진하라!'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 이정민
10월 29일, JTBC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결정적인 증거를 보도한 이후, 매주 박근혜 하야 집회가 열리고 있다. 11월 12일, 광화문 일대에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집회에 참여했다. 각계각층, 남녀노소 할 것 없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집회였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5%며, 20대 지지율은 0%를 기록했다. 박근혜를 찍은 내 친구 또한 집회에 나갔다.
며칠 전에는 박근혜를 찍었던 동기와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얘기했다. 둘은 모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트럼프를 뽑은 사람도 머지않아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할 것이라 본다. 트럼프의 방식으로는 저학력 백인 남성이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럼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일까?
박근혜 하야를 외치면서도, 집회에 모인 100만 명(경찰 추산 26만 명)은 모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탄핵을 원하는 사람, 하야를 원하는 사람, 2선 후퇴를 주장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갈린다. 또한 지지하는 정당도 다 다르다. 누군가는 여전히 새누리당을 지지하며 누군가는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다. 현재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을 뿐이지 우리는 모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광화문에는 시민 100만 명이 모였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기존의 방침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며 보여줘야 한다. 어찌 됐든, 머지않아 우리는 혼란스러운 정국을 마무리 짓기 위해 또 한 번의 선거를 치러야 한다. 두 달 내의 일일지 1년 4개월 후의 일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는 반성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에서는 이름만 다른 트럼프, 박근혜가 또다시 당선될 것이다. 자신의 선택을 반성하고 있다는 내 친구들은 나와는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 분명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서도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나 그리고 '우리'가 똑같이 꼰대질하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결국은, 대화
▲ 무엇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대화한다고 바뀔 수 있을까?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대화해야 한다. 사실 바꿔야 한다는 것부터 오만일 수도 있다. ⓒ pixabay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꼰대질을 하지 말라는 격언 뒤에는 항상 다음과 같은 말이 뒤따른다.
'대화를 해라.'
'우리', 특히 나는 박근혜 지지자들과의 대화에서 항상 먼저 벽을 쳤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박근혜가 언급되면 비웃고, 비난을 퍼부었다. 꼭 박근혜 지지자들에 국한된 얘기도 아니다. 내가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분야에서, 다른 의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애초부터 거리를 뒀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가르치려고만 했다.
사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다. 2012년 당시, 나도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모든 일이 잘될 거라 믿었다. 막상 '왜 문제인이냐'라고 물으면 딱히 말을 못했을 것이다(내가 몰랐다는 말이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의견이 다른 상대와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자신의 문제를 영원히 모른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대화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감정적 소비는 견디기 힘들 수 있다. 특히 정치적 이야기는 더 하다. 견해가 다르면 자연히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대화한다고 바뀔 수 있을까?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대화해야 한다. 사실 바꿔야 한다는 것부터 오만일 수도 있다. 설득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취한다 해도, 무시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고, 가르치려 들지 말고,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대화의 과정에서 그들이 스스로 생각을 바꿀 수도 있고, 내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도 있다.
남들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대화가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다. 꾸준히 대화를 나눠야 한다. 다소 뜬구름 잡는 결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지 않고, 무시하고, 비난하며, 가르치려고만 든 결과, 그들은 분노했고, 트럼프와 박근혜는 당선됐다.
그래서 나는 내일 박근혜를 찍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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