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한 어린이, 따뜻한 어린이, 똘똘한 어린이"
이는 제주 오라동(제주시 정실3길 57)에 있는 선덕어린이집의 원훈이다. 원훈 말고도 이곳에는 '바라는 상(교육철학)'이 반듯하게 적혀 걸려 있는데 "선덕어린이집에서 바라는 어린이상은 설립자이신 고수선 애국지사의 유지를 받들어 앞날의 우리민족의 기둥이 되도록 자라는 어린이 곧 한민족의 기본정신인 홍익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어머니는 내 자식 남의 자식 구분 없이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폈습니다. 저 역시 평생 아이들과 더불겠다는 생각으로 어린이집을 맡아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어릴 때 교육이 아주 중요하지요."
선덕어린이집을 찾아간 기자에게 정원에서 딴 잘 익은 무화과 열매를 먹어보라고 권하며 김률근 원장(76살)은 그렇게 말했다. 김률근 원장의 어머니인 여성독립운동가 고수선(高守善, 1898-1989) 애국지사는 일제강점기에 온몸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으며 한편으로는 경성의전을 졸업하여 한국인 여의사 1호가 된 수재였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선덕어린이집을 세워 평생을 어린이 교육에 헌신했다.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 9월 29일 기자는 고수선 지사의 아드님인 김률근 원장을 만나러 선덕어린이집을 찾았다. 원장실로 가기 위해 재잘재잘 아이들이 수업중인 교실 복도를 지나 다다른 곳은 작은 방이었다. 원장실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작은 책상 하나가 달랑 놓인 곳에서 수수한 차림의 김률근 원장은 기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대담 중에도 아이들이 원장실을 할아버지 방을 대하듯 드나들었다. 원장과 유치원생이 아니라 정겨운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 같아보였다.
고수선 지사는 1898년 남제주군 가파리에서 아버지 고석조(고영조)와 어머니 오영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딸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 고수선 지사의 서울 유학을 도왔으며 도쿄 유학을 위해 삯바느질로 뒷바라지했다.
여자에 대한 교육이 엄격히 제한되던 시절이었지만 어린 수선은 집에서 10리(4km)나 떨어진 야학에 다닐 정도로 학구열이 높았으며 대정공립보통학교와 신성여학교를 졸업하고 드디어 경성 유학길에 오른다. 이 무렵 제주에서 서울로 유학한 여성은 고수선, 강평국, 최정숙 단 세 명으로 최정숙 지사 역시 여성독립운동가로 평생을 헌신한 분이다.
경성으로 올라온 고수선 지사는 1915년부터 1918년 사이에 학교에서 일본교사 배척운동을 펼쳤으며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때 박희도의 지시를 받아 학생을 동원ㆍ인솔하여 탑골공원으로 가서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어 유철향 집 지하실에서 신경우 등 동지 학생들과 모여 조국에 대한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붉은댕기를 수천 개 만들어 경성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통하여 각 학교에 배포했으며, 신경우ㆍ김숙정과 항일 벽보를 붙이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1919년 3월 중순에는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같은 해 11월 무렵 귀국, 370원을 모금, 박정식 편에 송금하여 상해로 보내는 등 군자금 모집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내 요주의 인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자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장두철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요시오카[吉岡]의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에 있을 때에도 1921년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동지 이덕요ㆍ이낙도ㆍ이의향 등과 독립운동을 모의하였으며 이로 인해 왜경에 잡혀 가혹한 고문 끝에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 직후에도 고수선 애국지사는 독립운동에 관여하다 잡혀 고문 후유증으로 손가락이 불구가 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생전에 고수선 지사는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놓고 손을 비틀었던 고문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고 했다. 이후 고수선 지사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해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 뒤 역시 의사인 김태민 선생과 결혼해 조천을 비롯한 한림, 서귀포, 고산 등지에서 의술을 펼쳤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중반 강경으로 잠시 생활 터전을 옮겼다가 1ㆍ4 후퇴 때 다시 귀향한 뒤 의사생활을 접고 본격적인 사회복지활동을 펼친다. 전쟁고아들을 거두고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소 제주모자원을 설립한 이래 1951년엔 송죽보육원을 설립했다. 그 뒤 고수선 지사는 1969년 어린이집의 시초인 선덕어린이집을 설립ㆍ운영하면서 어린이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말년에는 제주도 노인회를 설립해 노인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는 등 고수선 지사는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와 여성 그리고 노인들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 힘썼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운동과 불우한 이웃과 사회를 위한 헌신의 삶은 1978년 용신(容信) 봉사상, 1980년 제1회 만덕(萬德) 봉사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국가로부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는 제주 오라동(제주시 정실3길 57)에 있는 선덕어린이집의 원훈이다. 원훈 말고도 이곳에는 '바라는 상(교육철학)'이 반듯하게 적혀 걸려 있는데 "선덕어린이집에서 바라는 어린이상은 설립자이신 고수선 애국지사의 유지를 받들어 앞날의 우리민족의 기둥이 되도록 자라는 어린이 곧 한민족의 기본정신인 홍익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어머니는 내 자식 남의 자식 구분 없이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폈습니다. 저 역시 평생 아이들과 더불겠다는 생각으로 어린이집을 맡아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어릴 때 교육이 아주 중요하지요."
▲ 김률근 어머니의 뜻을 이어 선덕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률근 원장 ⓒ 이윤옥
선덕어린이집을 찾아간 기자에게 정원에서 딴 잘 익은 무화과 열매를 먹어보라고 권하며 김률근 원장(76살)은 그렇게 말했다. 김률근 원장의 어머니인 여성독립운동가 고수선(高守善, 1898-1989) 애국지사는 일제강점기에 온몸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으며 한편으로는 경성의전을 졸업하여 한국인 여의사 1호가 된 수재였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선덕어린이집을 세워 평생을 어린이 교육에 헌신했다.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 9월 29일 기자는 고수선 지사의 아드님인 김률근 원장을 만나러 선덕어린이집을 찾았다. 원장실로 가기 위해 재잘재잘 아이들이 수업중인 교실 복도를 지나 다다른 곳은 작은 방이었다. 원장실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작은 책상 하나가 달랑 놓인 곳에서 수수한 차림의 김률근 원장은 기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대담 중에도 아이들이 원장실을 할아버지 방을 대하듯 드나들었다. 원장과 유치원생이 아니라 정겨운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 같아보였다.
고수선 지사는 1898년 남제주군 가파리에서 아버지 고석조(고영조)와 어머니 오영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딸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 고수선 지사의 서울 유학을 도왔으며 도쿄 유학을 위해 삯바느질로 뒷바라지했다.
여자에 대한 교육이 엄격히 제한되던 시절이었지만 어린 수선은 집에서 10리(4km)나 떨어진 야학에 다닐 정도로 학구열이 높았으며 대정공립보통학교와 신성여학교를 졸업하고 드디어 경성 유학길에 오른다. 이 무렵 제주에서 서울로 유학한 여성은 고수선, 강평국, 최정숙 단 세 명으로 최정숙 지사 역시 여성독립운동가로 평생을 헌신한 분이다.
▲ 고수선 고수선 애국지사 72살 때 모습(1970) ⓒ 김률근
경성으로 올라온 고수선 지사는 1915년부터 1918년 사이에 학교에서 일본교사 배척운동을 펼쳤으며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때 박희도의 지시를 받아 학생을 동원ㆍ인솔하여 탑골공원으로 가서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어 유철향 집 지하실에서 신경우 등 동지 학생들과 모여 조국에 대한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붉은댕기를 수천 개 만들어 경성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통하여 각 학교에 배포했으며, 신경우ㆍ김숙정과 항일 벽보를 붙이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1919년 3월 중순에는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같은 해 11월 무렵 귀국, 370원을 모금, 박정식 편에 송금하여 상해로 보내는 등 군자금 모집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내 요주의 인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자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장두철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요시오카[吉岡]의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에 있을 때에도 1921년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동지 이덕요ㆍ이낙도ㆍ이의향 등과 독립운동을 모의하였으며 이로 인해 왜경에 잡혀 가혹한 고문 끝에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 직후에도 고수선 애국지사는 독립운동에 관여하다 잡혀 고문 후유증으로 손가락이 불구가 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생전에 고수선 지사는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놓고 손을 비틀었던 고문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고 했다. 이후 고수선 지사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해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 뒤 역시 의사인 김태민 선생과 결혼해 조천을 비롯한 한림, 서귀포, 고산 등지에서 의술을 펼쳤다.
▲ 고수선2 고수선 지사에게 청소년들은 모두 자신의 아들딸이었다. ⓒ 김률근
그러나 태평양전쟁 중반 강경으로 잠시 생활 터전을 옮겼다가 1ㆍ4 후퇴 때 다시 귀향한 뒤 의사생활을 접고 본격적인 사회복지활동을 펼친다. 전쟁고아들을 거두고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소 제주모자원을 설립한 이래 1951년엔 송죽보육원을 설립했다. 그 뒤 고수선 지사는 1969년 어린이집의 시초인 선덕어린이집을 설립ㆍ운영하면서 어린이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말년에는 제주도 노인회를 설립해 노인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는 등 고수선 지사는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와 여성 그리고 노인들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 힘썼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운동과 불우한 이웃과 사회를 위한 헌신의 삶은 1978년 용신(容信) 봉사상, 1980년 제1회 만덕(萬德) 봉사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국가로부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덧붙이는 글
신한국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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