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밖으로 나와"... 현장에서 본 정우성의 일침
[<아수라> 단체관람 참가기] 관객이 단체로 대사 외치고 웃던 '안남 시민의 밤'
▲ 영화 <아수라> 티저 포스터 ⓒ 사나이픽처스
"영화 <아수라> 대사에 <오마이뉴스>가 나와. '조중동에 먼저 녹취파일 풀고 한겨레·오마이 통해 인터넷에 푼다' 같은 식으로."
그게 시작이었다. 9월 개봉 이후 상영되던 10월의 어느 날, 영화 <아수라>에 관해 들었던 것은. 회사 선배가 먼저 영화를 관람하고 같이 당직 서던 날 말해주었다. 약간의 호기심이 생겨났지만 극장에 가진 않았다. 그땐 미처 몰랐으니까. 내가 뼛속까지 '아수리언'(<아수라>의 팬층을 부르는 말)이 될 줄은...
<아수라>를 보고 나서 내 인생이 달라졌다
▲ 영화 <아수라> 팬이 제작한 '안남시청' 티셔츠. '안남시'는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 도시의 이름이다. ⓒ 김준수
지난 9월 28일에 개봉한 영화는 10월 SNS에서 입소문을 탔다. 관람하고 온 관객들이 묘한 체험을 했다며 글을 쓴 것이 공유된 상황이었다. "퀵폭력 노 헛소리", "<아수라>는 최고의 폭력영화다" 같은 내용이었다.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악한 인물인데도 다른 '뒷골목' 소재의 영화에 비해 미화되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았다. 또한 그 인물들이 폭력적인 장면에서 처참히 죽어가는 설정이 이상하게 끌린다는 식.
상영 시기를 놓치고, 뒤늦게 굿다운로더로 노트북에 내려받아 영화를 보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나는 어느덧 안남시(영화에 등장하는 도시의 이름)에 서 있었다. 어느샌가 알 수 없는 사이에 안남시민의 세계로 초대받은 듯했다.
취향에 맞는 영화를 관람하고 만족했던 적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아수라>가 '취향 저격'이라 본 것도 아니었는데 그만 꽂혀버렸다. 영화 파일을 받아놓은 터라 보고 또 보았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SNS에서 '안남시'의 이름을 닉네임에 걸고 활동하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아수라' 라이터와 '안남시청' 티셔츠 등 '굿즈'를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내게는 전례 없던 일이었다.
▲ '국립 안남대학교' 트위터 계정 ⓒ 트위터갈무리
어느 사이버 대학 광고 삽입곡에 나오는 문구, '안남 사이버대학에 다니고 내 인생이 달라졌다'가 머릿속에 맴돌 정도였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을 때까지, <아수라>를 떠올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안남'이었고 여기저기서 '한도경 형사'(정우성 분)와 '박성배 시장'(황정민 분)이 떠올랐다.
나비효과처럼, 어느날 우연히 본 영화가 내 인생을 뒤흔들고 말았다. 걷고 보니 하루하루가 아수리언의 길이었다. 회사에 출근해 일하면서는 '조중동보다 한겨레오마이, 아니 오마이한겨레에 먼저 제보가 오도록 열심히 하자'는 생각도 들었다. 퇴근한 이후에는 SNS에서 아수리언들과 안남시 패러디를 공유하며 웃었다. 소소하게나마 이런 것이 행복일까 싶었다.
'안남시민의 밤'에 다녀왔습니다
▲ 20일 <아수라> 단체관람 상영관 앞에 걸린 현수막. 극 중 대사와 등장 도시명을 패러디했다. ⓒ 김준수
▲ 20일 영화 <아수라> 단체관람 현장에서 증정된 기념품들. '아수라 영역' 시험지와 안남 시민등록증, 빵과 떡(등장인물이 먹는 음식이다), 김차인 검사(등장인물) 명함, 안남시 메트로폴리스 행사 수건과 '아수라 스티커' 등이 포함됐다. ⓒ 김준수
그리고 11월 20일, 영화 <아수라> 단체관람이 열렸다. SNS에서 영화 패러디를 이어가던 어느 관객이 대학로 극장에 문의해 대관을 신청했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영화에서 상황이 절정에 이르러 등장인물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펼쳐지는 날도 공교롭게도 11월 20일. 현실에서도 같은 날짜에 팬들이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오후 4시로 예정된 단체관람 행사는 오후 3시 전부터 문전성시였다. 실명이 아닌 SNS 닉네임으로 보던 사이라 서로 닉네임으로 소개를 이어가기도 했다. 영화 티켓과 함께 영화 <아수라> 관련 '굿즈'가 제공됐다. 극 중 박성배 시장이 열었던 '안남 메트로폴리스 사업발표회'가 글자로 적힌 수건도 들어있었다. <아수라> 스티커와 등장인물이 영화에서 먹던 떡, 빵도 포함됐다. 수능이 막 끝난 주말이었는데, '아수라영역' 시험 문제지도 현장에서 배포됐다. 그야말로 팬들이 서로 덕력과 팬심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11월 20일 영화 <아수라> 단체관람 현장에 참석한 김성수 감독과 '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 배우 정우성씨. ⓒ 김준수
상영 직전에는 김성수 감독과 배우 정우성씨, 영화사 '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도 참석했다. 이들은 단체관람을 위해 모인 관객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전했고, 정우성씨는 극 중 배역 '한도경 형사' 대사를 패러디해 외쳐 환호를 받았다. 현장에서 정우성씨는 "박근혜 앞으로 나와!"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는 영화에서 한도경 형사가 부패 정치인 박성배 시장을 향해 했던 말 "박성배 밖으로 나와!"라는 대사를 팬서비스 차원에서 패러디한 것이다.
<아수라>에 나오는 대사 "네네, 다 알아요. 문제 많죠"를 본따서 "요즘 시국도 문제 많죠"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화답하듯 관객들은 일제히 입을 모아 SNS상에서 공유하던 유행어를 외치기 시작했다.
"김성수는 영화의 신이다!"
"정우성은 연기의 신이다!"
"사나이픽처스 감사합니다!"
본격적으로 영화가 스크린에 오르면서 상영관 안 분위기는 마치 종교적 체험의 장으로 변한 것 같았다. 참석한 '아수리언' 대부분 스마트폰을 꺼내는 등 관람하며 지켜야 할 선을 넘어서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영화에서 '명장면'이라 할 만한 부분에서 함께 대사를 크게 합창하거나 성대모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등장인물이 죽는 장면에서는 다 같이 박수를 치기도 했다. 단순한 '관람'의 차원을 넘어 <아수라> 상영의 순간에 함께하며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공유하는 셈이었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 제작진 자막이 오르는 순간에도 관객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히려 자리에 앉아 열렬히 박수를 치면서 엔딩 삽입곡을 따라 흥얼거렸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이들은 "정우성은 연기의 신이다!", "아수라 만세!"를 외쳤다. 시사회나 감독·배우가 참여하는 행사에 몇 차례 가봤지만, 이건 전례 없는 경험이었다.
'거국적인' 차원으로 승화된 팬덤, 잊지 못할 겁니다
한편 20일 단체관람을 앞두고 19일 일부 '아수리언'들이 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1월 19일, 서울에서 열린 '박근혜 하야' 집회에서 '안남시민연대' 깃발을 들고나온 사람이 있었다.
▲ 19일 집회에 등장한 '안남시민연대' 깃발 ⓒ 트위터갈무리
▲ 영화 <아수라>에 나오는 대사를 패러디해 만든 하야 촉구 피켓 ⓒ 트위터갈무리
당시 '안남시민연대'와 '안남대학교 리볼버과', '안남 아수라즈' 등이 적힌 깃발이 집회 현장에 등장했다. 깃발을 든 사람 외에도 영화 <아수라> 속 대사 "박성배 밖으로 나와!"를 패러디한 "박근혜 밖으로 나와!!!" 피켓을 든 사람도 있었다. 영화 속 감성을 공유하는 팬덤의 모임이 오프라인 집회로 이어진 것이다.
▲ 집회에 등장한 '안남시민연대' 깃발에 관한 <중앙일보> 기사 댓글. "안남이 고담의 한국판이 아니라 고담시가 안남시의 미국판"이라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다. ⓒ 중앙일보
안남시민의 자존심은 기사 댓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안남시민연대' 깃발이 집회에 등장했다는 <중앙일보> 기사 포털 댓글란에는 "고담시의 한국판이요? 고담이 안남시의 미국판입니다!"라고 주장하는 글이 작성됐다. 기사 댓글은 대부분 영화 <아수라>의 대사를 패러디한 것으로, 48만 안남시민의 긍지와 자존심을 훼손하지 말아달라는 취지로 작성됐다.
집회부터 관련 상품 제작, 상영이 끝난 영화 단체관람까지. <아수라>를 통해 등장한 일련의 사건들은, 한 편의 영화를 향한 열정이 사람들을 어떻게 연결하고 어디로 향하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스크린 속 등장인물이 "무슨 동네요?"하고 묻자 객석에서 관객들이 단체로 "부자동네!"하고 답하는 영화는 앞으로도 당분간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평생 영화를 보면서 오늘처럼 벅차오르는 날도 없었다. 같은 공간 안에 같은 영화의 대사와 명장면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감동적인 순간이 또 있었던가. 다가오는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며 안남 시민등록증을 손에 들고 귀가했다. 아마 <아수라>를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순 없겠지. 단체관람은 어느덧 끝났지만 나는 앞으로도 안남시민으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안남시, 충성충성충성.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