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수정 : 23일 오후 6시]
원주형, 이게 웬일입니까? 형의 이름을 이렇게 '추도'의 형식으로 부르게 되다니요?
두 달 여 전 형이 암과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도 건강이 안 좋아 출입이 여의치 않기도 했지만 아무 근거도 없는 낙관으로 곧 나아서 일어나겠거니 생각하고 문병도 못 했더니 그 벌로 이렇게 뼈아픈 부음을 듣고, 이렇게 원통한 추도를 하게 되는군요.
형, 원주 형, 미안합니다. 형의 부음이 이렇게 아플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저는 우리의 인연이 그저 머나먼 36년 전 1980년 겨울의 그 '무림사건'에서 끝난 것인 줄 알았습니다. 각자 수형생활을 끝내고 나와 1년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씩 만나기도 하고, 혹은 못 만나고 흘러가기도 하며 그렇게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나 들으면서 보낸 세월은 그저 후일담, 돌아서면 공연히 쓸쓸해지는 그런 나날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뒤집어 흔들어보겠다고 나섰던 그 젊은 날들은 이제 시나브로 다 가버리고 우리는 그저 각자 자기 몫의 생을 감당하느라 허덕이며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저는 우리가 바라던 세상이 갈수록 점점 더 멀어져 가는데도 그렇게 옛이야기나 하며 살아가는 것이 못마땅했고, 그래서 옛 벗들이 다 미워졌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형의 부음을 접하는 순간, 저는 갑자기 터져나오는 울음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제 속 어디에 이토록 뜨거운 울음이 숨어있던 걸까요? 그 울음은 눈물샘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가슴 속에서 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울음은 제 뼛골 속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36년 전의 사무치던 기억은 그동안 잊혀 없어지고 흔적만 남은 것이 아니라 깊은 뼛골 속에 온전히 살아 남아 있었고, 저의 삶이란 것은 그저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봉인한 얇은 껍데기 한 장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형, 원주 형, 어떻게 그날들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남영동 대공분실 취조실에서 이제는 더 이상 지킬 여력이 없어 마침내 형의 이름을 밝히고 이 사람이 바로 나의 배후라고 털어놓았을 때, 이근안이 그러더군요. 그래? 이원주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야? 저는 속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래 이원주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다. 나의 선배, 나의 배후, 내 삶을 여기까지 이끌고 온 사상과 실천의 안내자가 이원주다!"라고. 가장 치욕스럽게 그 이름을 내다 파는 순간인데도 그 순간 저는 그 이름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유신 말기에서 10.26을 거쳐 5.18 광주민중항쟁과 그 직후의 뜨거웠던 시대에 나중에는 '무림'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당대에는 그저 '언더'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했던 비합법 학생운동 조직 속에서 늘 함께했던 형은 저에겐 거의 절대의 권위를 갖던 존재였습니다. 작은 키, 조그만 체구지만 무엇이든 아랑곳없다는 듯 날카롭고 자신만만했던 눈매를 지녔던, 어떤 난제 앞에서도 한 번도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당시엔 마치 강철로 깎아 만든 사람으로 보였던 그 사람이 이원주 형이었습니다.
모든 결정이 옳지도 않았을 것이며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았을,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여전히 분분한 포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당시의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지만 저는 원주형과 함께하던 그 시절이 내 평생의 최고의 훈장과도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설사 그 시절이 사실은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에 사로잡혀 모든 걸 희생했던 상처뿐인 시절이었다는 판정을 받는다 할지라도 저는 그 시절 우리의 유한한 몸과 마음에 인류의 전역사가 함께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때의 그 허황한 꿈의 크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어떤 성취나 진보에도 쉽사리 만족하거나 정체하지 않고 늘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해방을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살과 뼈는 그때 다 만들어졌습니다.
원주형, 제가 남영동에서 형의 이름을 발설한 순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때 형은 군복무중이던 몸으로 기무사에 끌려갔고, 징역 중에서도 가장 가혹하다는 군징역을 살아야 했지요. 미안합니다, 형. 하지만 나약한 저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 형에게까지 미안하다 할 겨를이 없었지만 어찌 미안함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생전에 결국 그 한 마디를 못하고 말았군요. 미안합니다.
복역을 마치고 세상에 나오니 형은 의외로 중학교 국어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형이 인천에서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했고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과 인천기독교 민중교육연구소 등에서 활동하다가 나중엔 민중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소식을 더러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이던가요? 가장 최근의 만남에서 이번엔 형은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따서 작은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들은 소식이 지난 9월의 투병 소식이었고, 다시 그 다음 소식이 오늘의 부음이었습니다.
형과 제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사생결단으로 싸우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4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의 자식과 참으로 기가 막히는 싸움을 다시 벌이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싶기도 하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 싶기도 합니다. 세상이 어설프게 변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10년 전을 생각하면 지금이 차라리 낫습니다.
이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세상의 판을 다시 짜자고 하면 솔깃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때의 꿈을 다시 꿀 수 있다면, 그때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그때의 좋은 기억만 살려낼 수 있다면, 그리하여 비록 낼 모레 환갑 나이라 할지라도 아파트 관리소장과 대학교수가 만나 진짜 혁명을 다시 도모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형은 이제 없군요. 미안하다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 오랜 시간 묵은 상처를 다시 헤집어 한번 시원하게 붙들고 울 시간도 주지 않고 그렇게 표표히 사라져 가는군요. 그 시절 우리가 꾸었던 대담무쌍했던 그 꿈의 봉인을 해제하여 다시 이야기할 나의 영원한 배후, 이원주 형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믿기지를 않습니다.
회자정리 같은 말 따위 막상 닥치니 어떤 위로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므로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생각하면 이 세상에 속절없이 오고간 것 같은 사람들 사이의 질긴 인연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온 것이겠지요. 형이 미처 못 하고 가는 말, 못 하고 가는 일, 어떻게든 이어서 말하고 이어서 행하겠습니다.
아니 제가 혼자 할 일이 아니지요, 아마도 주말마다 광화문에 모이는 저 백만의 사람들이 할 것입니다. 그 백만의 눈길이 바라보는 곳, 그 백만의 발길이 향하는 곳에 형이 먼저 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들과 함께, 그들이 꾸는 새로운 꿈에 우리의 옛 꿈을 슬며시 얹어 함께 가다보면 어느 구비에서 형의 파안대소를 만나겠지요.
형, 그때까지 부디 평안하소서.
2016년 11월 23일
김 명 인
문학평론가·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원주형, 이게 웬일입니까? 형의 이름을 이렇게 '추도'의 형식으로 부르게 되다니요?
두 달 여 전 형이 암과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도 건강이 안 좋아 출입이 여의치 않기도 했지만 아무 근거도 없는 낙관으로 곧 나아서 일어나겠거니 생각하고 문병도 못 했더니 그 벌로 이렇게 뼈아픈 부음을 듣고, 이렇게 원통한 추도를 하게 되는군요.
형, 원주 형, 미안합니다. 형의 부음이 이렇게 아플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저는 우리의 인연이 그저 머나먼 36년 전 1980년 겨울의 그 '무림사건'에서 끝난 것인 줄 알았습니다. 각자 수형생활을 끝내고 나와 1년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씩 만나기도 하고, 혹은 못 만나고 흘러가기도 하며 그렇게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나 들으면서 보낸 세월은 그저 후일담, 돌아서면 공연히 쓸쓸해지는 그런 나날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뒤집어 흔들어보겠다고 나섰던 그 젊은 날들은 이제 시나브로 다 가버리고 우리는 그저 각자 자기 몫의 생을 감당하느라 허덕이며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저는 우리가 바라던 세상이 갈수록 점점 더 멀어져 가는데도 그렇게 옛이야기나 하며 살아가는 것이 못마땅했고, 그래서 옛 벗들이 다 미워졌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형의 부음을 접하는 순간, 저는 갑자기 터져나오는 울음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제 속 어디에 이토록 뜨거운 울음이 숨어있던 걸까요? 그 울음은 눈물샘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가슴 속에서 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울음은 제 뼛골 속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36년 전의 사무치던 기억은 그동안 잊혀 없어지고 흔적만 남은 것이 아니라 깊은 뼛골 속에 온전히 살아 남아 있었고, 저의 삶이란 것은 그저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봉인한 얇은 껍데기 한 장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형, 원주 형, 어떻게 그날들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남영동 대공분실 취조실에서 이제는 더 이상 지킬 여력이 없어 마침내 형의 이름을 밝히고 이 사람이 바로 나의 배후라고 털어놓았을 때, 이근안이 그러더군요. 그래? 이원주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야? 저는 속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래 이원주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다. 나의 선배, 나의 배후, 내 삶을 여기까지 이끌고 온 사상과 실천의 안내자가 이원주다!"라고. 가장 치욕스럽게 그 이름을 내다 파는 순간인데도 그 순간 저는 그 이름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유신 말기에서 10.26을 거쳐 5.18 광주민중항쟁과 그 직후의 뜨거웠던 시대에 나중에는 '무림'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당대에는 그저 '언더'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했던 비합법 학생운동 조직 속에서 늘 함께했던 형은 저에겐 거의 절대의 권위를 갖던 존재였습니다. 작은 키, 조그만 체구지만 무엇이든 아랑곳없다는 듯 날카롭고 자신만만했던 눈매를 지녔던, 어떤 난제 앞에서도 한 번도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당시엔 마치 강철로 깎아 만든 사람으로 보였던 그 사람이 이원주 형이었습니다.
모든 결정이 옳지도 않았을 것이며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았을,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여전히 분분한 포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당시의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지만 저는 원주형과 함께하던 그 시절이 내 평생의 최고의 훈장과도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설사 그 시절이 사실은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에 사로잡혀 모든 걸 희생했던 상처뿐인 시절이었다는 판정을 받는다 할지라도 저는 그 시절 우리의 유한한 몸과 마음에 인류의 전역사가 함께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때의 그 허황한 꿈의 크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어떤 성취나 진보에도 쉽사리 만족하거나 정체하지 않고 늘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해방을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살과 뼈는 그때 다 만들어졌습니다.
원주형, 제가 남영동에서 형의 이름을 발설한 순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때 형은 군복무중이던 몸으로 기무사에 끌려갔고, 징역 중에서도 가장 가혹하다는 군징역을 살아야 했지요. 미안합니다, 형. 하지만 나약한 저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 형에게까지 미안하다 할 겨를이 없었지만 어찌 미안함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생전에 결국 그 한 마디를 못하고 말았군요. 미안합니다.
복역을 마치고 세상에 나오니 형은 의외로 중학교 국어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형이 인천에서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했고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과 인천기독교 민중교육연구소 등에서 활동하다가 나중엔 민중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소식을 더러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이던가요? 가장 최근의 만남에서 이번엔 형은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따서 작은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들은 소식이 지난 9월의 투병 소식이었고, 다시 그 다음 소식이 오늘의 부음이었습니다.
형과 제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사생결단으로 싸우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4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의 자식과 참으로 기가 막히는 싸움을 다시 벌이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싶기도 하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 싶기도 합니다. 세상이 어설프게 변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10년 전을 생각하면 지금이 차라리 낫습니다.
▲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4차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이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세상의 판을 다시 짜자고 하면 솔깃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때의 꿈을 다시 꿀 수 있다면, 그때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그때의 좋은 기억만 살려낼 수 있다면, 그리하여 비록 낼 모레 환갑 나이라 할지라도 아파트 관리소장과 대학교수가 만나 진짜 혁명을 다시 도모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형은 이제 없군요. 미안하다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 오랜 시간 묵은 상처를 다시 헤집어 한번 시원하게 붙들고 울 시간도 주지 않고 그렇게 표표히 사라져 가는군요. 그 시절 우리가 꾸었던 대담무쌍했던 그 꿈의 봉인을 해제하여 다시 이야기할 나의 영원한 배후, 이원주 형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믿기지를 않습니다.
회자정리 같은 말 따위 막상 닥치니 어떤 위로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므로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생각하면 이 세상에 속절없이 오고간 것 같은 사람들 사이의 질긴 인연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온 것이겠지요. 형이 미처 못 하고 가는 말, 못 하고 가는 일, 어떻게든 이어서 말하고 이어서 행하겠습니다.
아니 제가 혼자 할 일이 아니지요, 아마도 주말마다 광화문에 모이는 저 백만의 사람들이 할 것입니다. 그 백만의 눈길이 바라보는 곳, 그 백만의 발길이 향하는 곳에 형이 먼저 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들과 함께, 그들이 꾸는 새로운 꿈에 우리의 옛 꿈을 슬며시 얹어 함께 가다보면 어느 구비에서 형의 파안대소를 만나겠지요.
형, 그때까지 부디 평안하소서.
2016년 11월 23일
김 명 인
문학평론가·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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