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들이 '공개 폭로' 택하는 이유
[주장] '#OOO_내_성폭력' 운동에 대한, 한 미술평론가의 비판에 대해
▲ 올해 SNS 움직임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OOO_내_성폭력' 운동이다. 몇몇 피해자의 폭로를 시작으로 들불처럼 퍼진 이 운동은 은폐되었던 각 분야의 성폭력들을 들춰냈다. ⓒ PIXABAY
올해 SNS에서 일었던 움직임들 중 주목할 만한 것들을 뽑으라고 한다면, 아마 '#OOO_내_성폭력' 운동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몇몇 피해자의 폭로를 시작으로 들불처럼 퍼진 이 운동은 은폐되었던 각 분야의 성폭력들을 들춰냈다. 그리고 일부 가해자들은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문을 올리거나 예정되어 있던 작업 활동을 멈추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이 제한적이나마 한국 사회에 중대한 메시지를 던졌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성폭력은 '개인적인 실수'나 '해프닝'이 아니게 되었다. 이 일은 가해자의 커리어를 중단시키면서 책임을 물어야 할 심각한 '범죄'나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더 이상 '그 바닥은 원래 그래'라는 식으로, 한 분야 안에서의 성적인 폭력이 당연하거나 사소한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지지했던 이 움직임을 모든 사람들이 달가워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이 현상을 다룬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미술평론가는,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공포 분위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인터뷰에 분노하자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방송으로 나간 것은 인터뷰의 전체 부분이 아니며, 자신이 비판코자 한 것은 '무차별 폭로로 무고한 사람이 가해자로 둔갑하는 현실과 가해자에게 소명의 기회도 없이 명단부터 공개하는 현실'이라는 해명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해명을 수긍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문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그 공포 분위기
우선 그가 말한 '공포 분위기'에 관한 것이다. 그는 '무차별한 폭로로 무고한 사람이 가해자'가 되는 것이 그 분위기의 핵심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나는 질문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가 그런 일들이 가능한 공간이었나?
가령 한동안 떠들썩 했던 유명 연예인의 성폭력 사건을 살펴보자. 사람들이 피해호소인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드러냈을 때, 그 말만 믿고 해당 연예인을 가해자라고 생각했었는가. 되려 피해자를 돈을 갈취할 목적으로 거짓된 폭로를 한, 소위 '꽃뱀'이라고 손쉽게 생각하지 않았는가. 혹은 그 사람이 사적인 복수심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고 넘겨 짚지 않았는가. 이외에도 내가 들었던 기상천외한 추측들은 무궁무진하게 많다.
즉 그 평론가가 말한 '공포 분위기'라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이미 너무나도 잘 알려져있듯, 피해자가 자신이 성폭력을 당했음을 주변에 알리거나 수사기관에 신고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믿음과 지지가 아니라 끝도 없는 의심을 마주하게 된다.
피해 사실을 너무 명료하게 말해도(피해자가 저렇게 명확하고 담담하게 자기 경험을 말 할리가 없다) 거꾸로 증언이 불명료하거나 번복이 되어도(그렇게 충격적인 일인데 제대로 기억을 못할 리가 없다) 의심을 받는다. 또한 '피해자라면 이런 모습을 보일 리가 없다'는 편견 아래에 피해 전후의 모든 행동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여기에 지쳐 재판 과정을 포기하면 돌아오는 것은 '꽃뱀'이라는 낙인과 무고죄로 고소되는 것 뿐이다.
그러는 사이, 특히나 이번 폭로의 주된 대상이 된 사람들처럼 사회적 자원과 명망을 갖춘 이들은 가해 사실을 부인하고 피해자를 압박한다. 그리고 그들의 발언이 더 큰 힘을 가진다는 것은 사실 인터뷰를 한 평론가도 너무나 잘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이 편집된 부분이라고 첨부한 인터뷰에서, 가해지목인의 해명서를 보았더니 성희롱이 아니라 불행한 연애의 파탄에 가까운 사연들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묻고싶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 해명서가 사실이리라 철썩같이 믿는가. 그는 소명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이미 그 조차도 그 해명문을 사실로 전제하고 있지 않는가.
폭로가 불가피해진 현실
▲ 만약 이어지는 성폭력 피해 폭로가 불만이었다면, 지적해야할 것은 그로인한 공포가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 PIXA BAY
이와 더불어 피해자들이 폭로의 방식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또 있다. 바로 폭로의 배경이 된 집단들의 환경과 범죄의 양상이다. 이번 운동을 통해 드러난 가해자들은 대부분 그 분야에서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피해자의 경력과 생계가 그들의 손에 달린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 피해가 발생한 집단은 폐쇄성과 위계가 자주 문제되었고, 때문에 피해자가 외부의 조력을 요청하거나 자유롭게 가해 행위를 비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말하자면 당사자가 자신의 경력이 끊기거나 자신의 집단 내 지위가 위태로워지는 위험을 감수할 때만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개적인 폭로는 사실 불가피한 선택에 가깝다.
만일 이어지는 폭로가 불만이었다면, 지적해야할 것은 그로인한 공포가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명글에서 이 사태가 '위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일탈'의 문제라고 치부해버렸다. 이 같이 성폭력이 가능하고 은폐되며, 결국 피해자는 홀로 삭이다 공개적인 호소에 나설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덮어버린 것이다.
나는 결국 그렇게해서 유지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싶다. 그가 말하는 공포의 종식이란 폭로의 중단을 의미하고, 결국 남는 것은 그 모든 폭력이 가능했던 집단 그대로가 아닌가. 나에게 그의 말들은 '문제는 해결하되 나의 기득권은 건드리지 말아줘'라는 말과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당신들은 더 두려워 할 필요가 있다
성폭력을 둘러싼 말들 중 '처신을 잘 하라'는 충고가 있다. 흥미롭게도 이 말은 잘못된 행동을 한 가해자가 아니라 항상 피해자를 향해 있었다. 다가올 위험에 공포를 느끼고 스스로를 점검하며 눈치보는 일은 항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것이었다.
강자는 항상 자기의 행동을 두려워하거나 조심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해시태그 운동은 그 구도에 충격을 가했다. 사람들은 피해자의 호소에 힘을 실어주고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몇몇 가해자들의 사과와 자숙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우리가 모였을 때, 가해자가 뻔뻔해질 수 있는 기득권을 넘어서고 균열을 낼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자신이 했던 행동을 돌아보고 두려워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해당 평론가가 말한 '업계에 퍼진 공포감'이란 이런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비정상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누군가가 사회 생활을 하며 타인에 대한 자신의 행동을 곱씹어 보고, 그들을 대할 때 조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나 자기 분야에서 상당한 힘과 명성을 지녔기에, 누군가의 경력이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 당연한 일을 해오지 않았다. 그것들을 모두 약자의 의무로 밀쳐놓았을 뿐이다. 나는 그가 스스로에게 낯선 '공포 분위기'를 수용하고 권력을 지닌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길 바란다. 당신들은 분명 지금보다 더 두려워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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