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민 다룬 <그알>, 박정희 체제에 내린 '사망선고'
[게릴라칼럼] 박근혜의 구속은 박정희 체제와의 '결별'
▲ 26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최태민편'의 한 장면. ⓒ SBS
이게 다 <그것이 알고 싶다> 때문이다. 아니, 박근혜 대통령 덕택이다. 개봉한 지 벌써 10년이나 흐른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다시 찾아보고, 과거 기사를 복기하게 만든 것은.
'190만 촛불'이 서울 광화문 광장과 전국을 수놓은 26일 오후 11시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악의 연대기, 최태민 일가는 무엇을 꿈꿨나?'(아래 <그알>) 편의 시작은 분명 명징하고, 화끈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 블랙유머로 그린 1970년대의 뒤틀린 풍경과 '박정희 암살'의 전후를, '검은 유령' 최태민을 중심으로 까발린 것이다.
"그는 이 한 발의 총탄으로 모든 것이 끝나길 바랐을 겁니다.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며 인권을 짓밟는 일도, 정권 강화를 위해 이뤄졌던 끔찍한 사법 살인도, 입과 눈과 귀를 닫고 살아야 했던 암흑의 시대도 그 순간 이후 사라지길 원했을 겁니다."
진행자 김상중의 첫 멘트 위로 '박정희를 쏘는 김재규의 총탄'이 가감 없이 전파를 탔다. 재연 화면 속, 발사된 권총의 총탄은 남자의 가슴에 명중됐다. 그리고 이어지는 뉴스릴. 소복을 입고 관 앞에서 고개를 숙인 '큰 영애' 시절 박근혜 대통령. 그 와중에,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 살해 이유 중 하나로 '최태민'을 언급했다. 당시 김재규를 취재했던 김경래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은 그의 증언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태민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박근혜에게 접근을 해서 온갖 못된 짓을 하고 있다. 박근혜가 이 사람의 유혹에 넘어가서 최태민 말이라고 하면 자기 아버지 말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고 존귀하게 생각하니 이런 비극이 어딨느냐."
<그알>의 이 시작 장면을 분석해보면, 김재규의 총탄으로도 끝내지 못한 것이 바로 그 최태민과 그의 일족, 그리고 박 대통령이 벌인 국정농단이라고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그 총탄으로 '그때 그 사람들'의 커넥션을 정치와 국정통치의 영역에서 끊어 버려야 하지 않았느냐는 반성(?)의 의미를 역으로 유추해 볼 수도 있다. "김재규가 경고했던 검은 유령의 부활, 그동안 최씨 일가에 대한 박 대통령의 믿음은 흔들림 없이 견고했습니다"는 김상중의 멘트가 이러한 의미망을 완성한다.
하지만 이미 국정농단 사태는 벌어졌고, 국민들의 분노는 나날이 수위를 높여 가고 있으며, 190만 촛불은 외신까지 앞다퉈 보도할 정도다. 그런데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알>이 '그때 그 사람들'로부터 출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역사를, 기억을 소환하는 이유 말이다. 분명 끊어낼 수 있었을지 모를 과거를 복기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 비극이 바로 그 과거, 다시 말해 '박정희의 시대'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검은 유령' 최태민을 낳은 그 1970년대 말이다.
유신이, 박정희가 낳은 희대의 사기꾼 최태민
▲ 26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최태민편'의 한 장면. ⓒ SBS
<그알>이 캐낸 최태민의 숨겨진 이력은 화려했다. 실로 지나치게. 이미 사이비 교주로 활동하며, 고 육영수 여사를 미끼로 '큰 영애' 시절 박 대통령에게 접근했다는 '팩트'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알>은 거기에 친일파로 출발한 최태민의 이력을 보탰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증언자들의 기억을 소환해 냈다.
박정히 대통령이 암살당했던 1979년,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보고서 내용도 공개했다. 최태민은 일제강점기 시절 황해도 경찰서에서 순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그는 공산당을 때려잡는 사찰계 형사였다. 해방 이후까지 경찰로 활동했던 최태민은 이후 친일 아마도 친일 이력을 지워내기 위해서 개명했다고 한다.
총 7개의 이름을 거쳐 갔던 최태민은 육영수 여사 생전에도 청와대에 선이 닿았다. <그알>은 육 여사가 "최면술 시범"을 위해 최태민을 섭외했다는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도 공개했다. 이후 유신을 위해 헌신하는 '목사'로 변신, "순수한 반공단체"라 자임하는 구국선교회를 이끌며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체제'를 강화하는 데 앞장 섰다.
<그알>은 그렇게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큰 영애' 시절 박근혜와 최태민의 사생활은 중요치 않다. 그들의 커넥션이 그 유신시절 당시에도 어떻게 국민들에게 해악을 끼쳤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그알>은 구국선교단이 어떤 전횡과 탈법·비합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는지, 최태민에게 놀아난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는 어떤 '공범'행위를 저질렀는지, 또 '박정희 서거' 이후 박근혜 대통령 일가의 돈줄들이었던 '육영재단'과 '영남대'에서 자행된 최태민 일가의 전횡과 횡령은 어떤 규모였는지를 낱낱이 정리했다.
결론적으로, 최태민 일가는 지금의 최순실만큼이나 부지런(?)했고, 마당발이었으며, 예나 지금이나 '아바타 박근혜'를 이용해 '검은 돈'을 착복해 나간 이들이었다. 그는 단순한 '사이비 교주'가 아니었다. 박정희-육영수 부부의 돈까지 포함, 국가 재산과 세금을 어마어마하게 착복한 '대도'이기도 했다. 아마도 13.9%(닐슨코리아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한 이 날 <그알>을 본 시청자들은 이 점에 공감하고 분개했으리라.
이 날 방송된 <그알>이 유의미했던 진짜 이유는 최태민과 그 일가의 범죄상을 정리한 데 있지 않다. 후반부, 그 최태민의 꼭두각시일지도 모를 '퍼스트 레이디' 출신 박근혜가 결국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의 권좌에 올랐다는 점을 적시한 데 있다. "유신의 심장을 쐈다"던 김재규로부터 '악의 연대기'편을 출발한데도 다 이유가 있던 셈이다.
박정희의 유령들, 이제 그만 결별할 때
▲ 26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최태민편'의 한 장면. ⓒ SBS
"그가 선택한 주인공은 박정희 정권의 후광을 지녀 흥행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배우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1998년 정계에 입문한 박근혜 의원은 그로부터 14년 후, 마침내 대통령이 됐습니다. 오랜 꿈을 이루며 킹메이커가 된 최태민은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성공한 사기꾼이 된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마지막 사기극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들이었습니다."
맞다. 한 달 내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야 하는 그 국민들이 가장 큰 피해자다. 그리고 그 피해의 연원은 바로 박정희와 유신체제로부터 잉태됐다. 최태민이 직접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오랫동안 준비해왔다고 확신하는 <그알>은 '킹메이커' 최태민이 기획한 박 대통령의 과거 '준비된 여성대통령' 이미지도 하나둘 깨부쉈다.
"박근혜 대통령에서의 권력욕이라는 것을 가장 짙게 표현하면 내가 자라던 집에 돌아가서 우리 아버지의 나라를 내가 주인으로서 지키는 거. 그리고 거기에서 내 집을 뺏겨서 쫓겨났을 때 그 이후에 아버지에 대해서 욕되게 한 것을 바로잡는 거."
황상민 전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국민들이 가진 이미지를 '혼군', 즉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으로 정의한 연구결과를 소개하며 이렇게 부연했다. 하지만 51%의 국민들은 그 아버지의 후광을 '국정운영의 경험'으로 동일시했고, 또 그중 일부는 양친을 잃은 불쌍한 '큰 영애'로 인식했다. 그러면서 <그알>은 이제는 그 '박정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우회적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지난 11월 14일 구미에서 열렸다는 '박정희 탄신제' 장면이 대표적이었다.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세력들의 활개 치고, 그에 부응해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관련 예산을 전 정부보다 3배나 늘렸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가 없었다면, 아마도 공원이나 동상 등 일부 지자체가 거대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 박정희 우상화 작업은 착착 진행됐을 것이다.
<그알>이 이 문제를 직시한 것은 그래서 다행이다. '최순실 예산'과 함께 정부의 '박정희 예산'과 지자체들의 관련 예산 역시 삭감 혹은 전면 폐기하는 게 옳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이 국정농단 사태의 연원을 '박정희의 그림자'에서 찾고 있다. '새마을 운동'의 부활을 꿈꿨던 박근혜 대통령이나 친일파로부터 출발해 '유신 체제'에 적극 부역했던 최태민은 그 정점에 선 인물들이고, 그 결과가 이번 국정농단 사태인 것이다.
돌아가지 말자. 광장의 구호도 변화를 맞았다. '박근혜 퇴진'이 '박근혜 구속'으로 바뀐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이후를 준비해 나가야 하는 국민들이 이번 국정농단 사태로 다시금 환기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박정희 체제'와의 완벽한 결별이다. 이미 다수의 국민들이 그 집단적 환각에서 깨나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국정교과서가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한일 '위안부' 협상이 얼마나 굴욕적인지를 다시금 곱씹는 국민들이 늘고 있지 않은가. 재벌의 돈을 갈취하며 사익을 추구한 대통령의 수법이 아버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온 국민이 알게 되지 않았나. 그렇게, '친일'과 '유신'에 기댄 박근혜 대통령의 구속과 퇴진을 이뤄내는 것은 '박정희 체제'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박정희의 그림자를 무덤으로 완전히 보내드릴 때도 되지 않았나. 지금이야말로 박정희의 유령들과 결별하기 딱 좋은 때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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