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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참다 터졌네"... 3.1운동 규모 넘어선 촛불

배경도 비슷... 일본 총독은 3·1운동으로 퇴진

등록|2016.11.28 19:03 수정|2016.11.28 19:03

▲ 촛불집회. 서울 광화문. ⓒ 김종성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인 조선 총독보다 더 미움을 사고 있다. 이 점은 3·1운동과 이번 촛불집회의 비교로도 쉽게 알 수 있다. 3·1운동으로 퇴진한 하세가와 요시미치 제2대 총독보다 훨씬 더 큰 국민의 저항을 받고 있는 게 박 대통령이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919년 3월과 4월에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110만 명 정도다. 한편,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50만 명 정도로 보기도 하고 200만 명 정도로 보기도 한다.

총독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숫자를 축소하려 했을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110만 명은 최대치가 아니라 최소치일 것이다. 그리고 총독부가 110만 명으로 봤다면, 그 이하인 50만 명이란 추정치는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최소 110만에서 최대 200만 명이 3·1운동에 참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인 인구가 1700만 명 정도였으니, 그중 7%에서 12% 정도가 참여한 셈이다. 

지난 26일 촛불집회에는 최대 190만이 참가했다. 3·1운동의 200만 명에는 약간 못 미치지만, 몇 가지 정황만으로도 이번 11·26이 3·1을 규모 면에서 앞섰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본의 불법통치에 온몸으로 저항한 3·1운동의 정신은 이후의 그 어떤 운동도 따라갈 수 없다. 다만 규모 면에서만 그렇다는 것이다.

3·1운동 때는 한반도 전체가 다 참여했다. 조선 팔도가 태극기를 들고 총궐기했다. 이에 비해 11·26에는 휴전선 이남만 참여했다. 따라서 11·26의 190만이 3·1의 200만을 규모 면에서 앞서는 것이다.

3·1운동 규모는 1919년 3월과 4월의 참가자 숫자를 합산한 결과다. 반면에, 이번 촛불집회 참가자 숫자는 26일 반나절 동안의 숫자다. 이런 면에서도 11·26이 3·1을 규모 면에서 앞선다.

3·1운동은 대중운동이 활성화되기 쉬운 봄철에 발생했다. 이에 비해 이번 촛불집회는 늦가을 혹은 초겨울에 진행되고 있다. 쌀쌀한 계절에 토요일마다, 그것도 밤중에 100만 명이나 2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정부에 저항하는 일은 우리 역사에 일찍이 없었다. 박근혜는 물론이고, 박근혜를 비호하는 이들한테는 이보다 더 불명예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박근혜와 그가 이끄는 정부는 조선총독부보다도 더 미움을 사는 집단이다. 

고종 독살설? 3·1운동의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 유관순 동상. 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11·26이 규모 면에서 3·1을 능가했다는 점과 더불어, 박근혜에게 불명예스러운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3·1운동의 발생 배경과 11·26의 발생 배경 사이에 유사한 부분들이 있다는 점이다.

3·1운동은 표면상으로는 고종 황제 독살설을 계기로 터졌다. 1919년 1월 21일에 숨을 거둔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됐을 것이라는 소문이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런데 고종은 국민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1910년 국권 침탈 당시, 일부 양반들을 제외하고 대다수 서민층은 대한제국 멸망에 대해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1894년에 정부가 일본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을 목격한 뒤로, 조선 백성들은 정부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병으로 열심히 참가했던 일반 백성들이 구한말에는 의병운동과 거리를 둔 데는 그런 원인이 작용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1910년에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3·1운동 당시의 우리 조상들이 오로지 고종의 죽음에 슬퍼해 거리로 뛰어나왔다고는 볼 수 없다. 물론 미우나 고우나 자신들의 군주였기 때문에 애도의 마음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오로지 고종을 추모할 목적만으로 일본 기마헌병의 총칼을 무릅쓰고 "대한독립 만세!"나 "일본 나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고는 볼 수 없다.

1910년 당시만 해도 일본 식민통치에 격렬히 저항하지 않았던 일반 백성들이 불과 9년 뒤에 "일본 나가라!"며 기마경찰들의 총칼 앞에 달려들게 된 데에는 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살아보니 살 곳이 아니구나' 식민통치 9년에 대해 우리 조상들이 냉정한 총평을 내린 것이다. 당시 시위대가 부른 <독립가>란 노래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 독립의 소리!
십년을 참고 참아 이제야 터졌네.
삼천리 금수강산, 이천만 민족
살았구나 살았구나! 이 한 소리에!"

"이럴 줄 알았다면 1910년에 목숨 걸고 식민통치를 막았을 것을" 그렇게 후회하는 백성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조상들이 식민통치의 본질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총독부는 1910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 하에 벌인 일이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사업이었다.

총독부는 글자도 모르는 농민들한테 '관청에 나와서 토지 등기를 하라'고 선전했다. 그런 등기 없이도 별 탈 없이 살아온 농민들 중에는 그 같은 절차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수백만이나 된다. 이런 식으로 토지를 강탈한 총독부는 우리 국토의 40%에 달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했다.

토지조사사업은 지주층에 대한 서민층의 예속을 한층 더 강화하는 결과도 초래했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토지소유권은 지주가 갖고 경작권은 소작농이 갖는 이중적 권리 구조가 존재했다. 그런데 일본은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하고 소작농의 경작권은 무시함으로써 서민의 경제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했다. 이로 인해 소작농들은 지주들에게 더욱더 굽실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19년 3월 2일, 10대 중후반의 남학생 시위대가 덕수궁 근처의 이화학당 담벼락에 붙어서 "동생들아! 누이들아! 다 나와라! 우리나라 찾자! 너희들, 학교에서 공부만 하지 마라! 나라 먼저 찾고 나중에 공부해라"라며 이화학당 학생들의 시위 참가를 애절하게 호소한 것은, 일본 밑에서는 단 하루도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어린 학생들도 느꼈기 때문이었다.  

여기다가 일본은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마비시키고 영혼을 고사시킬 목적으로 민간의 역사서적까지 죄다 압수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교육을 시행했다. 1910년부터 2년간 일본이 강제로 압수한 서적이 20만 권을 넘는다. 그중 상당수가 지금 일본 왕실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10년 이전에 역사를 공부하고 그 이후에 <조선상고사>를 집필한 신채호의 책에 나오는 참고문헌 상당수가 오늘날 발견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거기 있다.

이렇게 일본이 한국인의 생존권을 빼앗고 영혼을 빼앗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1919년 3월과 4월에 최대 200만 명의 한국인들이 태극기만 든 채 목숨을 걸고 거리로 뛰어나왔던 것이다. 고종 독살설은 한국인들의 분노에 불을 끼얹는 역할을 했을 뿐, 이것이 이 운동의 본질적 원인은 아니었다.

촛불집회와 3.1 운동의 배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 촛불집회. 광화문. ⓒ 김종성


마찬가지로 올 11월에 우리 국민들이 3·1운동보다 더한 규모로 뛰어나온 것은 단순히 최순실 게이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는 기폭제에 불과하다. 그동안 누적된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분노가 박근혜 정권의 3년 실정으로 인해 점점 더 가열되다가, 최순실 게이트와 충돌하면서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최순실 게이트 하나만으로도 박 대통령의 퇴진 사유는 충분히 충족된다. 하지만 단지 그것에 대한 분노만으로 토요일마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어나갔다고 보기에는, 올해 촛불집회의 규모나 성격이 너무나 심대하고 너무나 역사적이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소중한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간 것은, 이 나라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며 이대로 뒀다가는 우리의 생존권과 영혼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절박한 우려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명박 정권도 물론 그랬지만, 박근혜 정권은 서민들의 생존기반을 더욱더 옥죄었다. 그들은 국민한테서 좀더 많이 빼앗아, 재벌들한테 좀더 많이 갖다 주었다. 국민에게서는 세금을 최대한 거두고, 재벌한테서는 최소한으로 거두었다. 그리고 복지 재원은 최소한으로 쓰고, 재벌 지원에는 최대한으로 썼다.

게다가 2015년 9월 15일의 노사정 합의를 통해 '더 쉽고 더 값싼 해고'를 제도화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근혜 정권은 재벌 및 기업에 대한 노동자 서민의 예속을 강화시켜주고 있다. 일본이 소작농의 경작권을 부정함으로써 지주에 대한 농민의 예속을 강화시켜준 전철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박근혜가 재벌들의 이익을 옹호해주었기 때문에, 재벌들이 박근혜의 재단에 기금도 출연하고 정유라에게도 고급 말을 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지주층의 지지를 발판으로 불법통치 기반을 공고히 했듯이, 박근혜 역시 재벌의 지지를 지렛대로 불법통치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박근혜 정권은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마비시키고 영혼을 고사시킬 목적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까지 밀어붙였다. 이는 일본이 민간 역사서 20만 권을 압수한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일본도 그렇고 박근혜도 그렇고, 한국사를 왜곡하는 본질적 목적은 한국인들을 우매하게 만들어 무조건 충성하고 기쁘게 복종하는 신민(臣民)들을 양성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나라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고 있기 때문에, 어른들은 물론이고 10대 학생들도 나오고 있다. 이것은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라는 판단에, 10대 학생들도 "다 나와라! 우리나라 찾자! 학교에서 공부만 하지 말자! 나라 먼저 찾고 나중에 공부하자"며 외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 3년을 살아보니, 정말 살 곳이 아니구나' 이런 판단이 이번 촛불집회의 저변에 흐르는 정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3·1운동의 발생 배경과 촛불집회의 발생 배경은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 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3·1운동을 일으킨 것처럼, 박근혜 정권 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촛불을 들고 일어선 것이다. 이 점은 박근혜와 그 집단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불명예스럽고 치욕스러운 일일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한민족의 미움을 사서 9년 만에 1919년의 저항에 직면했다. 박근혜 정권은 불과 3년 만에 거국적인 미움을 사서, 규모 면에서 3·1운동을 능가하는 2016년의 저항을 자초했다. 이보다 더 불명예스러운 일이 있을까. 그런데도 박근혜는 대체 무슨 염치로 청와대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도 결국 퇴진했는데, 자신이 그보다 더 운수 좋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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