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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커밍아웃'이 가져다 준 새로운 시작

[커밍아웃 스토리 ④]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나쁜 아빠였다

등록|2016.12.02 09:40 수정|2016.12.02 09:40
성소수자 부모모임이 '커밍아웃 스토리'를 연재합니다. 성소수자 자녀의 커밍아웃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들의 이야기도 함께 전합니다. 부모들이 성소수자인 자녀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일종의 커밍아웃이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편집자말]
내 아들은 동성애자다. 나는 이성애자다. 나는 동성애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 내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 아들은 이성애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를 이해한다. 나 보다 더 넒은 마음을 가진 아들에게 감사하며 이글을 연다.

난 나쁜 아빠였다

▲ 하루 두 번의 뽀뽀가 『수면중』인 아들에게 내가 하는 『아빠짓』의 대부분이었다. ⓒ pixabay


내가 '너무' 바쁘고 힘들 때 태어난 아들. 내 아들은 예뻤다. 자기 자식이 안 예쁜 아빠가 어디 있겠느냐만, 그래도 내 아들은 예뻤다. 30대 초반의 바쁜 나날 속에서 내가 아들을 대하는 시간은 하루에 1시간 이내였다. 휴일도 2시간을 넘기진 않았다.

대부분 자는 모습을 봤다. 자고 있는 아들에게 뽀뽀하고 출근하고, 퇴근해서 자고 있는 아들에게 뽀뽀했다. 하루 두 번의 뽀뽀가 '수면중'인 아들에게 내가 하는 '아빠짓'의 대부분이었다.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돈 벌기 바쁘다는 핑계로 모든 걸 스스로 용서했다.

둘째 딸이 태어나기 전까지 내 아들은 내 변명이었다. 회사에서 느끼는 수치와 모멸감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아들은 건강하게 잘 자랐다. 투니버스 채널로 '도라에몽'을 즐겨봤다. 초등학교에 갔다. 체육을 싫어했다. 등산을 데리고 다녔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위해 '가주는' 수준이었다.

집에서 혼자 놀거나 아니면 네 살 밑의 동생을 울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크는 건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내가 아들을 혼낸 기억의 대부분은 동생의 울음 때문이었다. 그렇게 크는 건데. 혼낸 기억 때문에 아직도 괴롭다. 미안해 아들.

아들은 새로운 걸 좋아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어느 날. "아빠, 세상에 곤충 다음으로 개체수가 많은 건 조개구요. 조개의 98%는 먹을 수 있대요"라는 놀라운 얘기를 했다. 아니? 이 말의 진위 여부를 떠나 퍼센트를 알고 있다니.

'정글에서 살아남기' 같은 책을 즐겨 읽고 나에게 얘기해 주었다. 어려운 단어를 기억해서 내게 얘기해 주는 아들이 예쁘고 신기했다. 행복했다. 어떤 때는 바둑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바둑학원에 보냈다. 조금 다니다 그만 두었다.

그렇게 많은 학원(교습소)에 다녔다. 미술, 피아노, 만들기 등등. 태권도를 '1년이나' 다녔다. 친구 따라 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마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마술학원에 보냈다. 이번엔 오래 다녔다. 개인교습도 받았다. 그러더니 모든 가족 앞에서 마술 공연을 했다.

학교 학예회에도 출연했다. 인기였다. 이건 귀여운 수준이 아니었다. 대단했다. 그때는 내 아들이 커서 마술사가 될 거라 생각했다. 아무튼 그때 내 아들은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가며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공부를 못했다. 안 했다. 멍하니 있었다. 학교에 흥미가 없었다. 내게 얘기도 안 했다.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냥 사춘기인 줄 알았다. 그때 내 아들은 자신에 대해 알기 시작하고 있었단다.

나는 전혀 몰랐다. 정말 그냥 사춘기인 줄 알았다. 멍한 아들을 더 심하게 혼냈다. 난 나쁜 아빠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중에 알았다. 게이인 자신을 발견하고 얼마나 혼란했는지. 너무 미안하다. 그 시기를 버텨준 아들에게 감사한다.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기술을 배우겠다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겨우 설득해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대학엔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자고, 기술학원에서 공부하고, 밤새 기술학원 숙제하고 게임하고, 학교에 가서 자는 생활을 반복했다.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아들의 책상에 앉아 눈물을 숨겼다. 가기 싫다는 학교에 보내지 말걸.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였다. 그렇게 밝고 남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던 아들이 절대로 주목받기 싫어하고 있었는데...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정규직'으로 취업을 했다. 그리고 독립을 했다. 혼자 사는 게 자신의 '오래된 로망'이라며. 자취방을 잡아주고 이사를 하고 온 날, 집이 텅 비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나 '퇴직금'이 발생하는 시점에 퇴직했다. 군대에 가겠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 꽉 찼다.

어둠이 걷히고

▲ 어둠이 걷히고 있음을 느꼈다. ⓒ Pixabay


두 달 뒤, 여름, 더운 날, 편지를 주고 나갔다. 자신의 인생계획을 정리했다며, 자기가 나가면 읽어보라고. 그 편지로 커밍아웃했다.

처음엔 멍했다. 아니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불과 다섯 달 전인데... 아내는 울었다. 아들이 남기고 간 책과 유인물을 읽었다.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동성애 아들과 독실한 크리스천 엄마에 관한 영화를 다운받아놨으니 보란다. 보았다.

아들이 자살하는 내용이었다. 현재 눈앞에 없는 아들이 걱정됐다. 그동안 힘들었겠다고,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카톡을 보냈다. '크크 네~~' 하는 답이 왔다. 그날 아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커밍아웃 다음날, 아내는 출장을 떠났다. 딸에게는 얘기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거리며 힘들게 버티고 있었다. 아들이 들어왔다. 내일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부모들의 모임이 있단다. 못 가겠다고 했다. 당장 어떻게... 두려웠다. 내 아들과 내 가족의 미래가.

지금 다른 부모들을 만날 때가 아니었다. 밤새 뒤척였다. 어떻게 용기를 냈는지 모르겠지만, 다음날 부모모임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렇게 아들의 커밍아웃을 받은 지 사흘째 되던 날, 부모모임에 참석했다.

부모모임은 낯설었다. 부모만 오는 모임이 아니었다. 부모는 몇 명이었고, 대부분 애들이었다. 부모님들도 나를 빼고 모두 어머니였다. 맨 처음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멀쩡한 애들이 게이, 레즈비언, 바이였다. 처음엔 양성애가 뭔지도 몰랐다.

트랜스젠더 어머니들도 있었다. 트랜스젠더는 모두 남자에서 여자가 되는 건지 알았는데, FTM(Female To Male)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내 소개를 하는데 목이 메여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세 시간 동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무슨 얘긴지 잘 모르는 대화가 오갔다. 어떤 때는 다들 웃기도 했다. 나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자꾸 슬프기만 했다. 그저 멍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내 아들 같은 애기들이 많았고, 모두 밝았다. 처음으로 안심하는 순간이었다.

아들의 커밍아웃을 받고 맨 처음 든 생각은 내 아들의 미래였다. 성소수자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앞으로 차별을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야 하나. 그런데 부모모임에서 만난 아이들의 모습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우선 어둡지 않았다. 모두 예의바르고 착했다.

상냥하고 배려했고 공감했다. 내 아들에 대한 걱정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부모모임을 마치고 뒤풀이에 갔다. 어머니들과 함께 앉았다. 술이 계속 들어갔다. 질문을 시작했다. 너무 따뜻하게 알려주셨다. 어떻게 커밍아웃을 받은 지 사흘 만에 이렇게 모임에 나왔냐며 격려해주셨다.

모두들 몇 년씩 인정하지 않았고, 어떤 분은 자녀와 함께 죽자고 했단다. 나보고 장한 아빠라고 칭찬(?) 하셨다. 뭔지 모르겠는데 으쓱했다. 내가 앉은 테이블의 저 멀리 아들이 다른 친구들과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밝게 웃으며 떠드는 아들의 모습은 10년만이었다. 눈물이 올라왔지만 참았다. 내 아들의 어둠이 걷히고 있음을 느꼈다.

또 다른 시작

▲ 우리에겐 또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 Pixabay


그렇게 참여한 부모모임이 다섯 번. 이젠 처음 오는 부모님들께 나름 조언도 한다. 특히 매번 한분 정도 새로 오시는 아버님 전담이다. 그리고 보다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 처음 커밍아웃을 받았을 때의 충격도 엷어져 간다.

지난 가을, 아들의 '게이 합창단 지보이스'의 공연을 관람했다. 자꾸 눈물이 올라왔다. 초등학교 때 학예회에서 마술 공연을 하던 아들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숨어있던' 아들이 다시 '나서기' 시작했다.

커밍아웃을 하며 다시 온전히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맵시도 내기 시작하고 헤어스타일도 바뀌어 가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에 감사한다. 

요즘 아들과 대화가 많아졌다. 난 동성애에 관해 질문하고 아들이 답해준다. 그런데 동성애 말고도 다양한 얘기를 함께 한다. 함께 광화문 촛불집회에 다녀온 얘기, 페미니즘, 노동문제... 아들이 변했다. 이제 너무 밝아졌고 오히려 게이로서의 책임감을 느낀다고 한다.

LGBT의 세계에서 게이는 '그래도' 다수라고 한다. '소수', '다수'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소외의 문제다. 소수와 다수의 세계에서, 소수자는 다수자를 이해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 하지만 다수자는 소수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소수자가 다수자가 되면 그들 역시 다른 소수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기독교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시대 기독교를 '믿으면' 죽었다. 그러다가 기독교는 '국교'가 되었고, 이제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죽는 이들이 생겼다. 그리고 기독교는 지배자가 되어가며, 그들 이외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뒤떨어져 천년을 지냈다.

아들은 이제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난 아들을 믿는다. 그리고 궁금하다. 아들에겐 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물론 헤어짐은 서운하지만. 나는 이제 부모로서의 커밍아웃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내 주변 누구에게도 커밍아웃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들에게 위안 받는다.

내 아들은 6년을 준비했다.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 글은 그런 커밍아웃의 워밍업이다. 성소수자 문제의 경우, 어떤 부모도 아이 본인만큼 힘들지는 않다. 그 힘든 과정 속에서 용기를 내어 준 아들에게 감사하며 이 글을 닫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커밍아웃 스토리 네 번째 편입니다.
지미 님은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게이 아들을 둔 아버지입니다.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에도 중복 게재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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