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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일본소설 <어쨌든 집으로 돌아갑니다>가 전하는 마음의 온기

등록|2016.11.29 10:44 수정|2016.11.29 10:44
처음에는 별 기대가 없었습니다. '분량이 짧고, 표지 디자인이 트렌디한 일본 단편 소설집'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지요. 여느 일본 소설처럼 술술 잘 읽히긴 하겠지만, 현실의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기보다는 얄팍한 휴머니즘이나 유머로 봉합하거나, 주인공의 내면을 파고들며 정신 승리에 그치고 말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 <어쨌든 집으로 돌아갑니다>는 이러한 제 편견을 보란 듯이 깨 주었습니다. 단편 소설 세 편만 실린 200페이지 짜리 책이 불어 넣어 준 마음의 온기는, 두꺼운 책 여러 권을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오래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쓴 쓰무라 기쿠코는 국내에도 출간된 <라임포토스의 배>라는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입니다. 2005년 데뷔 이래 계속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글을 써 왔고 2012년이 되어서야 전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직장인의 일상과 심리를 다룬 소설과 에세이를 꾸준히 쓰고 있습니다.

맨 첫 머리에 실린 <직장의 매너>는 주인공이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동료들과 겪었던 일들을 다룬 4편의 꽁트를 묶은 작품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마주쳤을 법한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섬세한 심리 묘사와 흥미진진한 구성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낸 것이 특징입니다.

일상의 매너를 논하는 작품이라고 하니 작가를 대신하는 캐릭터가 나서서 직접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나 않을까 했는데, 이 소설은 단단하게 구성된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스스로 무엇이 '매너'인지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쪽입니다.

▲ <어쨌든 집으로 돌아갑니다>의 표지. ⓒ 한겨레출판

두 번째는 <바릴로체의 후안 카를로스 몰리나>입니다. 제목만으로는 도통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기도 힘든 이 작품은, <직장의 매너> 속 화자 도리카이가 우연히 알게 된 아르헨티나 바릴로체 출신의 피겨 선수 후안 카를로스 몰리나를 '덕질'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스타 플레이어도 아닌 평범한 선수의 기사를 챙겨 읽고 대회 중계를 보며 응원하는 일이, 어떻게 단조로운 직장 생활에 흥미로운 변주를 더할 수 있는지 잘 보여 줍니다.

내용은 특별한 것이 없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인공 도리카이와 함께 후안 카를로스 몰리나를 응원하면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탄탄한 구성과 필력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이런 소재로 이만큼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좀 놀랐습니다. 은퇴 후 코치가 된 후안 카를로스 몰리나의 평범한 선택이 주는 훈훈함은 보너스입니다.

표제작인 마지막 작품 <어쨌든 집으로 돌아갑니다>는 중편 분량으로, 폭우로 대중 교통 수단이 끊겨 버린 퇴근길을 우산과 비옷에 의지하여 걸어가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의 화자는 두 명으로, 개인주의적인 여성 직장인 하라와 어린 아들을 둔 이혼남 계장 사카키가 그들입니다.

서로 다른 회사에 다니며 출퇴근길에서나 가끔 얼굴을 보는 사이일 뿐인 이들은, 각각 뜻밖의 동행인과 함께 폭우와 바람을 뚫고 퇴근길에 오르게 되고, 예기치 않은 곳에서 다시 마주치게 됩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업무나 관심사에만 집중하느라 주변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이들이,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온기를 잠깐이나마 나누게 되는 장면들은 진한 감동을 줍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들의 극적인 변화를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담담한 톤을 유지하며 여운을 남기기 때문에 더욱 임팩트 있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 소설이나 영화의 한계를 '극 중에서 제기된 문제를 고립된 개인의 차원에서만 바라보고 해결하려는 경향'이라고 지적합니다. 다른 이들과 연대할 방법을 찾는다거나 사회 체제에서 비롯된 문제는 아닌지 따져 보려 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결단과 각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거죠.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흐름에서 한 발 떨어져 있습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시선은 자신의 고민을 향할 때도 있지만, 거기에만 머물지는 않습니다. <직장의 매너>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한 소묘이고, <바릴로체의 후안 카를로스 몰리나>는 자기와는 별 상관없는 타국의 운동 선수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이야기이며, <어쨌든 집으로 돌아갑니다>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기꺼이 남을 도울 생각까지 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 준 작품입니다.

그렇기에 일본 소설에 대한 선입견 여부와는 상관없이, 재미있게 읽을 만한 이야기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낯설지 않은 소재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 의식이 처음엔 평범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한 구석에 남아 따뜻함을 꽤 오랫동안 전해줄 테니까요.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어쨌든 집으로 돌아갑니다>, 쓰무라 기쿠코 지음, 김선영 옮김 / 한겨례출판 펴냄(2016.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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