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개월의 새'들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도구해수욕장 파도소리를 들으며 황석영을 다시 읽다
▲ 경북 포항에 위치한 도구해수욕장. 황석영의 소설 <몰개월의 새>는 이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 홍성식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소설가 최인훈(80)은 한국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 중 하나인 <광장>의 서문을 통해 이렇게 일갈했다. 여기서 쓰인 '광장'과 '밀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틀 속에 끼워 넣으려는 평자들이 있었고, 또 다른 이들은 개인적 고뇌와 집단적 성취욕구로 이 두 단어에 접근하고자 했다.
최인훈보다는 몇 해 뒤에 태어난 소설가 황석영(73)은 최인훈과는 다른 각도에서 이념과 전쟁, 개인과 집단에 접근했던 리얼리스트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며 그는 '한국 사실주의문학의 총아'로 성장한다. 자타공인이었고, 재론의 여지도 없다. '자본주의의 그늘'과 '베트남전쟁이 야기한 비극' '몰락일로를 걷는 공동체의 비애'를 황석영만큼 탁월하게 소설 속에 형상화시킨 동시대의 다른 작가가 있었던가?
최인훈이 밀실과 광장을 키워드로 독자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을 찍었다면, 많은 이들이 황석영의 수작(秀作)으로 지목하는 단편 <몰개월의 새>는 '골목안 창가(娼家)'와 '국경 너머로 확장하는 전장(戰場)'을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읽는 이들을 서늘하고 형상 또렷한 슬픈 자각에 이르게 했다.
모모한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황석영이 술회한 바 <몰개월의 새>는 지금으로부터 꼭 40년 전인 1976년 <세계의문학>에 발표됐던 작품이다. 황석영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몰개월은 해병 제1상륙사단이 주둔해 있던 경북 포항 외곽의 작은 동네였다. 내 기억에는 사단의 북문과 서문 사이 어디쯤에 있던 쓸쓸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얼마 전에 지나다 보니 그곳은 포항제철이 들어서 있는 데다 너무 변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정글전 특수교육대며 몰개월의 술집 등은 당시에 모두 실존했던 곳들이었고, 여기 나오는 추장(소설 속 주인공의 동료병사)이라는 친구도 실제 인물이다. 그는 전북이 고향이었는데 1968년 12월인가 꽝응아이성 '바탕간 작전'에서 야간 매복을 나갔다가 부비트랩에 걸려 폭사했다. 분대원들이 사지가 찢긴 그의 시신을 군용 우의에 싸가지고 중대 방어진지로 돌아온 것을 목격했었다.
갈매기집도 그때 몰개월에 있던 술집의 하나였고, 미자인지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비슷한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병사들이 떠나던 새벽에 그녀들이 나와서 손을 흔들던 장면도 모두 있었던 일들이었다."
1960년대 파월장병들을 훈련시켜 머나먼 이국의 전쟁터로 떠나보내던 공간인 '몰개월'은 경북 포항시 남구 청림동과 동해면 도구해수욕장 사이 어디쯤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쉰살을 넘긴 포항 본토박이들은 이곳이 '우물재'라는 이름으로 변했다고도 한다.
▲ 겨울, 쓸쓸한 풍광의 도구해수욕장. 멀리 포스코(구 포항제철)가 보인다. ⓒ 이용선 제공
케케묵은 고릿적 소설로 오해될 수도 있는 황석영의 <몰개월의 새>를 다시 펴드는 것은 웃음은 물론 눈물까지 함께 했던 그(주인공 '나')와 그녀(빠꿈이란 별명의 작부 '미자')의 공동체인 '골목'이 어떤 과정을 통해 와해됐으며, 무엇을 통해 복원될 수 있는지를 살피는 행위인 동시에, 대비되는 두 공간(몰개월 창가와 폭탄 터지는 베트남 정글)이 이름을 달리해 현재도 엄존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에 다름없다.
소설의 서두는 베트남 파병을 목전에 둔 주인공 한 상병(나)이 유년과 청춘을 보낸 서울의 '골목'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년 반 만에 서울을 찾아가 다시 확인했던 것은 나의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파충류의 허물과도 같은 것이고, 나는 그 허물을 주워서 다시 뒤집어쓰고 돌아온 건 아닌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싸돌아다니던 골목에는 아직도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나도 언제나 끼이고 싶어하던. 머리 좋은 치들의 비밀결사는 여전히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성공한 신사들 같았다. 모친의 식료품 가게는 문을 닫았다. 그 어두운 가게의 천장 위에 내 '잠수함'은 뚜껑을 닫고 선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뚜껑을 젖히고 머리를 내밀자 나는 다시 심해에 잠기는 것 같았다. 내 다락방의 벽에는 떠나오던 날의 낙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밤새껏 승냥이는 울부짖는다-라고. 지붕 건너편에서 솜틀집의 활차 돌아가는 소리가 여전히 들렸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발소 집 형제는 유행가를 합창하고, 야채장수 부부는 또 한바탕 두들기고 울었다.
'골목'에서 성장한 소년이 청년이 되고 그 청년이 또 다른 '골목'인 몰개월에 이르러 이제는 '골목 바깥'으로 내팽개쳐질 운명이 됐다. 온전한 형상이라 믿고 살았던 공동체가 붕괴하는 모습을 힘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 20대 젊은이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다. 그러나, 그럴수록 '골목'에 대한 집착과 같은 아픔을 앓는 골목 안 인간들에 대한 연민은 무한대로 증폭한다. 한 상병에게 그 집착과 연민은 가진 돈 전부를 몰개월의 직업여성 빠꿈이(미자)에게 털어주는 형태로 나타난다.
추장이 말했다.
"뭐하니... 몰개월 나가자."
"잠이나 자야겠어."
"헛... 야, 너 미쳤구나. 다섯시에 출동이야. 지금 벌써 한시 가까이 되었다. 마지막인데 잠이 오냐?"
"졸려."
"돈 아까워서 그러니? 이제부턴 휴지나 다름없는데 뭐할래..."
"몸이 불편해."
"인마, 술 먹으면 다 나을 병이야. 갈매기집 빠꿈이가 오매불망 기다린다."
"조용히 누워 있을라구 그래. 갔다 와. 그리고, 이거 갖다줘라. 탁 털은 거야."
"외상값이냐?"
"휴지나 마찬가지잖아."
"빠꿈이 수지 맞았는 걸."
주인공 나(한 상병)는 어디에서 미자를 처음 만났을까? '골목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강제한 전쟁에 '골목 안' 사람들이 끌려가 죽는 아이러니가 반복되던 1960년대와 1970년대. 당시 경북 포항 외곽 바닷가마을엔 '무너지는 골목공동체'를 은유하는 공간이 존재했다. 바로 '몰개월'이다. 황석영은 그곳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는 철조망을 무사히 통과했다. 개구리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논두렁을 지나면 한길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불빛 보이니?"
"응. 몰개월이다."
몰개월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특교대가 생겨나자 서너 채의 초가가 있던 외진 곳에 하나둘씩 주막이 들어섰는데, 거의가 슬레이트 지붕에 흙벽돌이나 블록으로 지은 바라크들이었다. 비슷한 꼴의 나지막한 집 이십여 채가 울퉁불퉁한 자갈길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 원래의 몰개월 마을은 2킬로쯤 더 가야 있었으나, 이곳을 모두 몰개월이라 불렀는데 바다가 바로 그 뒤편에서 철썩이고 있었다.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를 작부들이 집마다 두세 명씩 기거했다.
지금도 포항시 청림동과 동해면은 좁은 골목이 야트막한 건물들을 거느리고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불을 밝힌 골목 안 집들에선 40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간의 삶이 간당간당 이어진다. 외형은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보일 수 있지만, 간난신고(艱難辛苦)로 이어지는 가난한 자들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렇다면 1960년대 빈한한 가정의 딸로 태어나 온갖 고생을 겪다가 결국엔 삶의 마지막 진창으로 머리채 잡혀 끌려온 몰개월의 '작부'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축복받지 못한 출생과 거친 삶의 이력 탓에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잃었던 것일까? 천만에다. 몰개월의 창가 중 한 곳에 기생했던 포주(抱主)가 입을 열어 '골목 안' 그녀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쓸개 빠진 년들이 모두들 애인 하나씩 골라서는 편지질을 하는데, 어떤 애들은 열 사람 스무 사람에게 쓴다우. 한 달에 한명씩 골라잡아두 열 달이면 열명이 꽉 찬다구. 미자년이나 옆집 애란이나 가끔 술 처먹구 지랄을 하는데, 아마 상대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는 모양이지. 제대하구 가면서 몰개월에 찾아와 들여다보는 놈들은 한 번도 못 봤는데두."
1960년대 베트남으로 보낼 군인들을 훈련시키던 장소 인근에는 현재 '몰개월 비행기공원'(포항시 남구 청림동)이 들어서있다. 줄을 지어 늘어선 비행기를 보며 떠올리는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필자의 경우엔 베트남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 양을 측정할 수도 없는 네이팜탄과 고엽제(枯葉劑)를 쏟아 붓던 미국 공군 폭격기가 가장 먼저 그려진다.
▲ 포항시 남구 청림동 해군 부대 앞에 조성된 몰개월 비행기공원. ⓒ 이용선 제공
전쟁은 의도하지 않은 수천수만의 개별적 죽음을 부른다. 총알과 폭탄에는 눈이 달리지 않았기에 여자와 아이들도 피해가지 않는다. 바로 그 전쟁이란 괴물이 발광(發狂)하는 베트남의 정글로 떠나야할, 이제 겨우 소년의 티를 벗은 갓 스물한두 살의 군인들.
'골목 안'에서 함께 살아온 청년들을 향한 몰개월 여자들의 연민은 바로 위와 같은 방식으로 드러났다. 끝 간 데 없는 폭음과 발버둥을 동반한 눈물. 그러나, 그런 격정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래와 같은 순정 또한 존재했다. <몰개월의 새> 중 가장 낭만적인 서술이다.
"물 좀 마시면서 드셔요."
하면서 물을 따르고 미자는 저도 김밥 한 덩이를 집어먹었다.
"밥에 뜸이 좀 덜 들었죠? 꼭꼭 씹으면 괜찮아요."
나는 찍소리도 없이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물을 마시고 나서 쑥스러워진 내가 물었다.
"장사는... 안하구..."
"낮에두 하나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 언제... 찾아가지."
"이따가 담치기해서 나오세요. 밤참 해놓을게요."
시인 김정환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으로서의 삶, 그 막장에 도착한' 몰개월의 여자들이라고 왜 순정이 없었겠는가. 무너지는 농촌공동체의 마지막 시대를 살았던 그녀들 또한 듬직한 남편 곁에서 아침저녁으로 상에 올릴 반찬 걱정을 하고, 자신이 낳은 아이의 학급 등수 걱정을 하며 살고 싶었을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이치다.
붕괴한 '골목'이 만들어낸 서글픈 군상들. <몰개월의 새>가 빛나는 지점은 바로 그 '서글픈 군상'들에게도 꿈이 있음을 눅눅하고 어두운 문장으로 밝힌다는 것이다.
'연애 비슷한 만남'이 지속되던 어느 날, 미자는 한 상병을 자신의 방으로 부른다. 이날 동그란 눈이 예쁜 '빠꿈이' 미자는 닳고 닳은 홍등가(紅燈街) 작부가 아닌 부끄러운 새신부로 한 상병을 맞는다. 이런 문장이다.
우리는 같이 술청 뒤꼍에 있는 관(棺)만한 방으로 스며들었다. 신문지로 바른 벽이 군데군데 떨어져서 흙덩이가 드러나 있었고, 천장 바로 아래 널빤지로 선반을 가로질러놓았는데 그 위에는 빠꿈이의 찌그러진 밤색 트렁크가 얹혀 있었다. 미자가 내 군화를 얹었다. 벽에는 붉은색 잠옷이 걸려 있었다. 미자는 푸우, 하고 웃었다. 어깨를 위로 쑥 올리면서 빠꿈이는 웃었다. 목침 위에 더께로 앉은 촛농 사이에 몽당초가 밝혀져 있었다.
"초가 다 타면 자요."
하지만, 개인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역사란 없다. 그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1932~1959)나 체 게바라(Che Guevara·1928~1967) 정도가 아니라면. 또한, 곁에 두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곁에 둘 수 있는 연인이란 지극히 드물고도 드문 법이다. <몰개월의 새>가 쓰인 시대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도구해수욕장으로 불리는 바닷가 근처 빨래터. 속옷을 치대던 미자는 '골목 바깥' 사람들의 결정으로 인해 '골목'을 떠나 이국의 전장으로 가게 될 한 상병에게 '내가 얼마나 당신을 아끼는지' 거칠게 고백한다. 여기서 "한 번 자줄게"라는 말은 "당신을 내 목숨 이상으로 사랑해요"로 들린다. 맞다. 신경림 시인의 진술처럼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집에 갔었다며요?"
"응... 우리 내일 모레 떠난다."
"밥 먹었어요?"
하다가 미자는 얼른 속옷 나부랭이들을 대야에 챙겨넣었다.
"한 상병, 서울에... 좋은 사람 있어요?"
"있었는데 시집갔더라야."
"저런... 그럼 허탕쳤겠네."
(중략)
"왜 웃어?"
"가엾어서."
"안됐지 뭐..."
"뭐가...."
"사는 게 그냥, 다... 내일 밤에 나와요 꼭. 한 번 자줄게"
▲ <몰개월의 새>의 공간적 배경이 된 곳으로 추정되는 마을. 지금은 한적한 시골의 소읍 풍경이다. ⓒ 이용선 제공
마침내 몰개월을 떠날 날이 왔다. 가속화하는 '골목'의 붕괴를 안타까이 바라보며 물설고 낯선 인도차이나반도로 떠나야 하는 젊은 군인들. 기괴한 죽음의 향기를 몸에 묻히고 떠나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건 '골몰 바깥'의 사람들이 아닌 가난한 몸을 아프게 부대끼던 '골목 안' 여자들이었다. 해서, 이 장면에선 눈물 냄새가 난다. 영화라면 클라이맥스다.
안개가 부연 몰개월 입구에서 나는 여자들이 길 좌우에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모두들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꽃이며 손수건이며를 흔들고 있었다. 수송대열은 천천히 나아갔다. 여자들은 거의가 한복 차림이었다. 병사들도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뛰어서 쫓아오는 여자들도 있었다.
나는 트럭 뒷전에 가서 상반신을 내밀고 소리질렀다. 미자가 면회 왔을 적의 모습대로 치마를 펄럭이며 쫓아왔다. 뭐라고 떠드는 것 같았으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얀 것이 차 속으로 날아와 떨어졌다. 내가 그것을 주워들었을 적에는 미자는 벌써 뒤차에 가려져서 보이질 않았다. 여자들이 무엇인가를 차 속으로 계속해서 던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무수하게 날아왔다. 몰개월 가로(街路)는 금방 지나갔다. 군가 소리는 여전했다.
남중국해 한복판을 항해하는 군함에서 "당신, 기어코 쓰러지지 말고 살아 돌아와요"라 적힌 '하얀 것'을 펼쳐본 주인공 나(한 상병)의 심경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보면 아득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 없다. '골목'에서 살았던 미자는 '골목'을 떠나 '전쟁의 광기'에 섞여들 한 상병에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오뚝이를 선물했다. 쓰러지면 쓰러짐의 탄성으로 일어나고, 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황석영의 1976년작 <몰개월의 새>는 이미 반세기 가까운 옛적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 세월동안 '골목 안'의 우리는 '골목 바깥'으로 나왔는가? 이 엄혹한 질문에 누가 있어 "그렇다"고 함부로 대답할 수 있을까.
젊어서, 그 젊음으로 인해 더 아팠던 군인과 여자들이 살았던 동네 몰개월. 오늘은 도구해수욕장에서 날아온 새 한 마리가 몰개월 인근 동해면과 청림동 하늘을 우울하게 날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새'는 자유와 탈속(脫俗)의 은유다.
'골목'으로 상징되는 이미 멀어져간 공동체의 꿈.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했던 웃음과 눈물의 날들. 황석영은 소설의 마지막을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끝낸다. 40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읽어도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절창이다. 그렇다. "인생에서 유치한 일이란 하나도 없다".
작전에 나가서야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중략)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었던 일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THE U&I>에 실린 원고를 일부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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