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지 기자의 '자기검열' 10년, 속이 다 시원
[取중眞담] 경제부 기자의 박근혜 게이트 한달 취재기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에이, 최순실이 작정하고 출국했다면 기자들한테 쉽게 걸려들겠어요."
10월 중순 평소 알고 지내던 변호사와 만난 자리에서 나눴던 대화다. 최순실이라는 비선실세가 진짜 존재하느냐 아니냐부터, 있다면 한낱 강남의 평범한 아줌마가 국정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파워를 가졌겠느냐 등을 이야기하던 이날의 대화는 그야말로 '한담' 수준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시점, 최순실 사진 한 장으로 '게임 끝'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국민과 대통령 간 본격 전쟁이 진행 중이다.
경제부 기자, 광화문 촛불을 따르다
▲ 최순실 검찰 소환에 피켓 시위 벌이는 민중연합당미르·K스포츠 재단의 강제 모금과 청와대 문건 유출 등 국정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씨가 3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조사를 받기 위해 도착하자, 민중연합당 당원들이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한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 벗겨진 최순실 명품신발'국정농단 의혹'을 받는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씨가 3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다. 출석 도중 벗겨진 최씨의 신발이 출입문 인근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 연합뉴스
10년 넘게 경제지 편집기자 생활을 거쳐 2015년부터 2년여 취업 창업 등 일자리와 관련된 이슈를 다뤘다. 그러다 지난 5월 <오마이뉴스> 경제부 기자로 입사했다. 다소 무거운(?) 나이와 경력이었지만, 이직을 하면서 내심 '과거나 현재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취재력이 뛰어난 기자들에게 맡기고 나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기사를 쓰겠다'는 다짐도 있었다.
<오마이뉴스> 경제부 기자로 6개월, 조직에 몸담는 대신 자신의 일과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1인기업가'들의 삶과 일을 조명한 기획 '1인기업시대'를 연재했다. 개인적으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이후 우리 아이들이 살아나가야 할 미래 한국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부모로서, 기자로서 절망도 했다. 그러나 2년여 취재를 하면서 내린 결론은, 세계는 급변하고 있고 완전히 바뀐 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각자도생'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스스로의 취재 영역을 한정 짓고, '우리 아이들의 또다른 미래'를 기획하고 준비하던 때, '박근혜 게이트'가 터졌다. 느닷없이 예정에 없던 '현재'로 소환됐다.
<JTBC>의 '최순실 태블릿PC' 보도 이후 일주일 만에 해외 잠적이 예상됐던 최순실씨가 10월 30일 갑작스럽게 귀국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31일 오후 1시쯤 데스크로부터 최씨의 검찰 출석 현장 스케치 지시가 떨어졌다.
창업 관련 포럼이 열리던 판교에서 부랴부랴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향했다. 카메라와 취재진들의 자리경쟁이 치열한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은 이미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얼떨결에 온국민의 관심사인 현직 대통령의 비선실세의 검찰 출석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이다. 에쿠스 승용차, 꽁꽁 싸맨 뒷모습, 벗겨진 프라다 구두 한 켤레 그리고 시민이 던진 개똥까지.
이날 대학생들과 진보 시민단체는 '최순실 구속, 박근혜 하야'를 외치며 울분을 터트렸고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찍은 보수단체 시민들까지 한목소리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동안 수많은 스타트업과 소셜벤처를 취재하며 '세상을 바꾸고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해보겠다'는 그들의 동기와 열정에 감동했다. 그러나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지 않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한 발자국도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그 현장에서 깨달았다.
'자기주도 끝판왕' 200만 촛불 시민들
▲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박근혜 즉각 퇴진 5차 범국민행동'에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참여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그날 이후 광화문 현장을 붙박이로 마크하게 됐다. 역사가 거꾸로 가든 말든 내 한 몸 행복해지는 일에 만족하고 살아왔던 '과거'를 바로잡기 위한 당연한 복무라 생각했다.
2일 김병준 신임 국무총리 내정 소식에 따라 '원조친노 김병준, 벼랑끝 박근혜정부 구원투수로?', '대통령 연락 일주일 전쯤 받아' 등의 기사를 시작으로 4일 문화예술인들의 시국선언 현장을 스케치한 '박근혜 사과에 속지마, 지금 대한민국은 블랙코미디', 5일 2차 범국민행동 촛불집회 '엄마부대, 10대 폭행까지... 박근혜 지지집회 천태만상', 7일 서울대 교수 728명 시국선언 '박근혜만큼 헌정 무너뜨린 대통령 없었다' 등 현장을 따라다니며 기사를 썼다.
'우병우 팔짱컷' 사진 특종을 터트린 <조선일보> 고운호 사진기자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우병우 다가오자 수사관들 벌떡' 기사도 냈다(사진 한 장으로 세상을 흔들어놓은 26살의 고운호 기자는 이후 비정규직이라 할 수 있는 2년여간의 객원기자 딱지를 떼고 <조선일보> 정기자가 됐다).
특종을 못할 바에야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은 다한다는 각오였기에 12일부터 대대적으로 시작된 주말집회 취재 역시 빠질 수 없었다. 100만, 200만이라는 경이적인 수만큼 12일 3차 촛불집회와 26일 5차 촛불집회는 말 그대로 자발적 시민의 힘을 보여준 역사의 현장이었다.
'자발성'은 무서운 에너지다. 사비를 들여 지방에서 상경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깃발과 현수막을 만들고, 쉬고 싶은 주말 발길을 재촉해 광화문으로 걸어온 그들은 '자기주도의 끝판왕'들이었다.
12일 3차 촛불집회에 앞서 대학로에서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 5000여 명이 한 시국선언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비슷한 또래인 정유라가 누린 온갖 특혜가 버젓이 실력으로 둔갑하는 현실에 흙수저 대학생들의 분노 게이지는 유난히 높았다(관련기사 : 정유라 특혜, 분노한 대학생들 "너무 아프다"). '최순실 게이트'가 20대, 10대까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든 것이다.
"이재용을 구속하라" 자기검열 했던 10년 체증 해소
▲ ‘최순실-박근혜-삼성 게이트’로 번지고 있는 현 사태를 규탄하고 삼성의 사회적 범죄를 증언하는 시민법정이 26일 오후 2시10분부터 1시간여 동안 중구 삼성그룹 태평로사옥 앞에서 개최됐다. ⓒ 김은혜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의 '촛불은 촛불일 뿐 바람이 불면 다 꺼진다'는 발언으로 '촛불이 횃불'이 될 것이라 예상되던 26일 5차 집회 때는 날씨가 문제였다. 찬바람 불고 눈비가 흩날려 예정됐던 사전 행사들이 지연되기도 했다.
이날은 시청 인근 현장으로 갔다. 대한문에서는 중소상인들의 시국선언이, 태평로 삼성본관 앞에선 최순실-이재용게이트 시민법정이 열렸기 때문이다.
우의와 핫팩, 방수매트 등으로 무장한 시민들은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없었다. 동네상권 중소상인을 위한 경제민주화를 외면한 박근혜정부에 대한 배신감과 국민연금을 경영권 승계에 이용한 삼성 이재용 부회장을 향한 시민들의 분노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이재용을 구속하라, 재벌을 해체하라, 전경련을 해체하라."
이직 전 10년 넘게 경제지에서 일하며 재벌을 다루는 기사를 두고 필요 이상으로 '자기검열'에 괴로워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이날 시민들이 외치는 구호는 그야말로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통쾌했다(관련기사 : '박근혜-최순실게이트, 숨은 물주는 삼성').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진퇴문제를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는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하야는 없었다. 대통령의 전격적인 결단에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시민들은 허탈했다. 다가올 주말엔 촛불 말고 횃불을 들자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많은 전문가가 4차 산업혁명시대 가장 필요한 자질은 '문제 해결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창업의 길을 가는 기업가 정신이 있는 우리에겐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충분한 능력이 있다. 일단 '현재의 문제' 해결에 집중해보자. 그것만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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