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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선포의 차가운 시절, 두 선생이 큰 사고를 치다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2부 교단일기 (8)

등록|2016.12.01 14:49 수정|2016.12.02 10:17
꽃보다 아름다운 신입생들

▲ 오산중 재직 시절 본관 앞에서(1973. 4.) ⓒ 박도

나는 33년 교단생활 가운데 중1 학급담임은 1972년 오산중학교 부임 첫해에만 했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신입생들은 대부분 그때까지도 젖내가 물씬한 개구쟁이들로 그렇게 예쁘고 귀여울 수가 없었다.

교단에서 학급담임으로 만난 첫 정 탓인지 나는 그 녀석들의 이름과 얼굴들이 44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삼삼하다.

그들을 담임했던 그해 나는 군에서 전역한 지 미처 1년도 지나지 않아 전방소총소대장 기질이 몸에 물씬 배어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들의 나에 대한 태도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내 말 한 마디는 반 분위기를 쥐락펴락했다.

그 무렵은 학급당 학생 정원 70명으로 대식구였다. 70명 학생의 가정환경은 천차만별이었다. 당시 오산중학교는 평준화로 육군본부와 미8군 가까운 곳이기에 대체로 군인가족이나 미8군 군속가족 등이 많았고, 학생들의 거주 지역은 대부분 해방촌 아이들이나 이태원, 한남동, 보광동 등이었다.

그해 나는 극성스럽게 학급신문을 만들었다. 2호까지 발행했는데, 동료교사들의 견제가 심했다. 게다가 다른 반 학생들의 부러움도 많이 샀다. 그해 나는 네 학급의 국어를 가르치면서 유독 우리 학급만 신문 발행하는 것은 튀는 일 같아 중단했다.

그해 4월이 되자 신입생 환영 학급대항 축구시합이 있었다. 반 학생들의 우승을 향한 집념은 매우 강했다. 방과 후면 저희들끼리 운동장으로 몰려가 공을 차면서 팀워크를 다졌다. 나는 퇴근길에 그들 연습장을 들러 격려해 주곤 했다.

내가 그들의 축구시합을 유심히 지켜보니까 체육수업에 예선전을 치르는 관계로 전후반 20분씩 40분 경기로, 그 시간에 골이 나지 않거나 1-1, 또는 2-2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는 승부차기로 승자를 결정했는데, 승부차기는 아무리 볼을 잘 차는 학생이라도 성질이 급한 학생은 실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때마다 성격이 침착한 학생 순으로 볼 차는 순서를 정해줬다. 그밖에도 내가 지시한 작전은 맞아 떨어져 5월 15일 스승의 날 기념식 후 행사로 열린 결승전에서 마침내 우리 학급이 1학년 12개 반 중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선수들은 나에게 달려와 생후 처음으로 헹가래질을 당해 보았다.

그런 가운데 우리 학급은 전남 신안군 암태 초란분교와 자매결연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낙도 어린이들에게 학용품을 보내는 등 우의를 나누기도 했다.

▲ 원로 오산 졸업생들의 회고담을 듣다(1972. 5. 왼쪽 부터 기자, 나동성 오산중고 교장, 조진석 재단이사장, 뒷모습 두 분 오산 옛 졸업생) ⓒ 박도


<다섯메> 편집지도 교사

어느 하루 교장실로 내려오라는 전달을 받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뜻밖에도 조진석 재단이사장님이 반겨 맞았다. 그분은 평북 정주 오산출신으로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전문의였다. 월남하기 전에는 평양에서 죽 개업했는데, 해방 후에는 김일성 주석의 맹장수술을 당신이 직접 집도했을 만큼 명의였다. 그 뒤 월남해 그 무렵에는 을지로 2가에서 조진석 외과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 <다섯메> 교지 11호 표지, 졸업생 이중섭의 은박지 원화를 표지화로 썼다. ⓒ 박도

조 이사장님이 나를 부른 용건은 당신이 외솔회 발행 '나라사랑'지 남강 이승훈 선생 특집호에 원고청탁을 받았는데, 나에게 그 원고 대필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오산 재학시절 남강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재학시절의 추억을 들려주신 다음 남강 전기 한 권을 건네줬다.

나는 당신이 들려준 말씀과 남강 전기를 보며 일주일 후 소정의 원고지 30매 분량을 탈고한 뒤 전하자 조 이사장님은 일부러 학교로 오셔서 그에 대한 답례로 당신의 글씨 한 점을 주시며 매우 만족하셨다.

그런 탓인지 부임 첫 해부터 오산중고등학교에서 발간하는 <다섯메>라는 더블로이드판 학교신문과 교지 편집지도 교사를 맡았다.

<다섯메>신문은 봄가을 2회를 발행했고, 교지는 연 1회로 졸업 무렵에 발간했다. 나는 그 일을 이태 맡으면서 오산출신 유명 인사들을 거의 다 만나 뵙거나 아니면 원고청탁 일로 그 어른들의 글을 받아볼 수가 있었다.

종교인 한경직, 언론인 홍종인, 군인 김홍일 장군, 그리고 고당 조만식 선생의 장남장녀, 화가 이중섭 애제자 김창복 선생과 그분이 소장한 이중섭의 은박지 원본 그림 등과 그 어른 외에도 숱한 오산 옛 졸업생들을 만나 그분들의 생생한 증언들을 듣고 기록에 남겼다. 오산 졸업생은 아니었지만 철학자 안병욱 교수, 유달영 교수. 남강 선생 얘기를 소설로 쓴 이봉구 선생 등도 뵐 수 있었다.

▲ 함석 헌 선생의 글 '한 마음 말없이 서로 비치는 가운데' ⓒ 박도


함석헌 선생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함석헌 선생이셨다. 나는 그 어른에게 교지에 실을 원고를 청탁 후 약속한 날에 원효로 자택으로 찾아뵙자 미처 쓰지 못했다고 해, 그해(1972년) 연말에 다시 찾아뵙자 겸연쩍은 얼굴로 원고를 주시면서 주저하셨다.

사연인즉, 그 무렵은 10월 유신 선포로 그야말로 동토(凍土)의 겨울이었다. 당신이 손수 발간했던 <씨알의 소리>가 강제 폐간을 당한 바, 그 잡지 권두언을 주시면서 게재 여부는 학교에서 판단하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그 원고를 받아 온 뒤 고등학교 편집지도교사인 허남헌 선생과 상의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이 경찰서에 불려갈 각오로 교장·교감선생님에게 상의치 말고 우리 선에서 전결 처리하자고 정리한 뒤 교지에 게재키로 했다. 당시 계엄령 아래서 대단한 용기였다. 허남헌 선생은 연세대 국문과 출신으로 춘천 태생인데, 참 훌륭한 인격자로 정의감도 대단하셨다.

▲ <다섯메> 편집실. 1972년 12월로 앞열 왼쪽부터 박정헌(고2), 허남헌 선생님, 박도, 김무길(고1). 뒷열 왼쪽 이윤복(중2), 황윤석(중1) 등이다. ⓒ 박도


그해 10월 3일 개교기념일을 앞두고 <다섯메>신문을 발행할 때였다. 그분은 학교에서 주는 편집비를 나에게 전담 관리케 했다. 어느 하루 인쇄소로 가는 길에 삼각지를 지나는데 마침 국군의 날 시가행진으로 길이 몹시 붐볐고 버스 안도 만원이었다. 인쇄소에 도착하고 보니 안주머니가 면도칼로 너덜너덜 찢겨져 있었고, 편집비 보관 봉투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낭패한 얼굴로 그 얘기를 하자 허 선생님은 각자 주머니 털어 교통비와 밥값을 쓰자고 했던 바,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 내가 잘못한 일로 매우 부끄럽다. 그 돈을 소매치기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실수로 아무 말 없이 내 돈을 편집비로 내놔야 옳았다.

<다섯메> 교지가 나온 다음에야 함석헌 선생 원고 건을 나동성 교장 선생님에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그때 나에게 보고했더라도 그 원고는 교지에 실었을 거라고, 만일 두 분 선생님이 경찰에 불려갔다면 내가 대신 갔을 거라고, 참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도 당국에서는 중·고등학교 교지까지는 검열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비어 있는 자리

그해는 학기 내내 학급 담임에,신문 및 교지 편집지도 교사, 국어 교과 지도교사 등으로 참 바쁘게 보냈다. 여주 신성중학교도 사립이었지만, 오산중학교 역시 사립학교였다. 재정이 빈약한 대한민국의 대부분 사립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오산중학교에서도 매일 아침 직원조회 시간 끄트머리에는 교감선생님이 모눈종이에 그린 학급별 등록금 납부 현황 막대그래프를 쳐들고 학생들의 납부금 등록을 채근했다. 너나없이 어렵던 시절이라 그렇게 채근하지 않으면 재정이 빈약한 사립학교는 운영이 어려우니까 어쩔 수 없는 방책이었겠지만 대부분 학급 담임선생님들은 그 점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중학교부터 대학교 졸업 때까지 모두 사립학교를 다녔는데 등록금 때문에 몹시 힘들었다. 특히 구미중학교(졸업 후 곧 공립으로 전환) 때는 서무과 직원이 아침조회시간 등록금 미납자를 운동장 한 곳으로 불러낸 다음 그대로 집으로 쫓아 보내는 일도 여러 차례 겪었다. 

그해 학년 말까지 70명의 반 학생들은 한 학생 낙오자 없이 잘 이끌고 갔지만 학년말 진급사정회 날 세 학생의 자리가 온종일 비어 있었다. 그들 세 학생은 등록금 미납으로 등교정지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밤을 새우다시피 가슴 아파하면서 '우울한 날'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 글을 그때 정기 구독했던 <독서신문>에 보냈다. 열흘 후 독서신문에 '비어 있는 자리'라는 제목으로 내 글이 나갔다.

"군복무를 마치고 곧장 교직에 몸담은 지 1년여, 지난 3월 눈동자가 유난히도 초롱초롱한 중학교 신입생들을 학급담임으로 맡았다. 입학 무렵에는 아직 젖내가 가시지 않은 개구쟁이들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의젓한 중학생으로 성장함을 볼 때마다 교육의 보람을 느끼곤 했다. 오늘은 지난 학년도를 마무리하는 진급사정회 날이다. 학년 말까지 한 명의 낙오자 없이 70면 전원을 이끌고 왔는데, 아침 조회시간에 교실로 가니 빈자리가 세 곳 생겼다.

'등록금을 내지 않았으므로 학교에 오지 말라'는 말은 차마 전하지 못하고 '등교정지'를 당하고도 그동안 계속 출석을 시켰지만 어제는 어쩔 수 없었다. '내일은 학년 말 진급사정회 날이니 내일까지는 꼭 납부해야 한다'는 말을 얼더듬으면서 전했더니, 그들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눈물을 글썽이며 귀가했다.

이렇게 한꺼번에 세 자리가 빈 날은 처음이고, 어제 눈물을 글썽이며 풀이 죽어 돌아가던 녀석들의 얼굴이 떠올라 온종일 마음이 시큰했다. '가난이 죄'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나 자신 몸소 체험하기도 했지만 채 피지도 못한 그들에게 그 말을 어떻게 일러줄까? 나도 학창시절 등록금 독촉으로 무척 시달렸는데, 그때 등록금을 독촉하던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왜 그토록 매정스럽고 무섭게 보였던가!

어제까지 개근했던 세 녀석은 오늘은 등교도 못한 채 어쩌면 세상을, 부모님을, 담임선생을 원망하고 있을 게다. 오늘따라 '선생님'이라는 존칭이 거추장스럽고, 교단에 선 게 후회스러워 어디 가서 한바탕 통곡이라도 하고 싶다.

영호, 화영, 현수 - 너희들이 등교하는 날, 내 우울한 마음은 활짝 개이리라."
- <독서신문> 1973. 3. 5.

재미 유학생이 보내준 장학금

이 글이 나간 뒤 한 달 남짓한 동안에 50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 수녀님, 스님, 유학생, 대학 때 여자친구…. 그 가운데 미국 버클리대학의 유학생 최성찬씨는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박도 선생님

이 편지를 받고 놀라실 겁니다. 오늘 한국에서 보내준 <독서신문> 3월 5일자 '교사의 발언'란에 실린 선생의 글을 읽고 교사로서 순수한 교육정신과, 또 비참하게 잘려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학생들의 정경에 감동하고 가슴 아팠습니다. 우선 빠른 결론부터  내려서 그 학생들을 어쨌든 구해 주는 방법을 강구하고자, 구체적인 방법과 가능성을 희망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 버클리대학 유학생 최성찬 씨가 보낸 편지 ⓒ 박도


그 얼마 후 최성찬 씨는 버클리 한인교회 주일 예배 때 내 글을 낭독한 뒤 광고하여 모았다고 하면서 100달러를 교장선생님 앞으로 보내주었다(내가 돕지 못한 걸 유학생에게 신세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거절하였기에).

그 돈으로 두 학생의 한 기분 장학금을 줄 수 있었다(그 무렵은 달러가 강세였기에 가능했다). 그때 독서신문 편집자가 뽑은 '비어 있는 자리'라는 글 제목은 나의 첫 작품집 제목이 됐다. 한 출판사 편집진이 그 책을 펴낼 때 60여 꼭지의 글 가운데 유독 그 제목을 뽑았다. 1980년대 말 그 책은 꽤 많이 팔렸다.
덧붙이는 글 박도 지음 실록소설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이 시중 서점에서 절찬리 판매되고 있습니다(눈빛출판사 / 1만3000원). 일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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