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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에 회동 제안한 야권, 위험하다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 참고하겠다는 황 대행, 믿을 수 없는 이유

등록|2016.12.14 14:47 수정|2016.12.14 14:47
13일, 야 3당은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에게 회동을 제안했다.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대표들은 황교안 권한대행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만나 권한대행의 활동 범위를 논의하자는 제안을 내놓는 동시에, 권한대행이 국회와의 협의 없이 일상적 범위를 넘어서는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성 발언도 내놓았다.

이 같은 야 3당의 제안은 한편으로는 황교안 체제를 견제하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황교안 체제를 사실상 승인해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황교안 대행은 박근혜 정권 출범 직후인 2013년 3월부터 법무부 장관직을 수행했고, 2015년 6월부터 국무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래서 박근혜 정권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을 심판하라는 국민적 명령이 땅과 하늘을 진동시키는 상황에서, 그 정권의 핵심인 황교안 대행과 머리를 맞대고 그의 권한을 정해주고 힘을 실어주는 것은 그에게 면죄부를 발행해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그의 '주군'인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이익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황 대행과 머리를 맞대자는 제안이 야권에서 먼저 나왔다는 것은 그래서 황당하고 위험한 일이다. 

황교안 체제 탄생 배경, 1960년대와 유사

황 대행 측은 노무현 정부 시절의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을 참고하겠다고 말했다. 업무 절차상으로는 2004년 당시의 고 대행을 참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념이나 목표상으로 볼 때, 황 대행은 1960년 4·19 혁명 때의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을 훨씬 더 많이 참고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황교안 체제가 탄생한 배경이 2004년보다는 1960년과 훨씬 더 유사하기 때문이다.

청와대 앞에서까지 벌어진 대규모 시위나 집회, 10대 학생들까지 참여하는 전 국민적 저항의 결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 황교안 체제는 고건 체제보다는 허정 체제에 훨씬 더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2016년 상황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는 인물이라면, 아무래도 고건보다는 허정의 사례에 본능적으로 끌릴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따라서 야 3당이 황교안 체제를 성급히 인정한다면, 4·19 때의 역사적 과오가 이 땅에서 다시 재연될 수도 있다. 이승만 정권을 다 제압해놓고도 그 열매를 제대로 수확하지 못했던 4·19의 역사적 과오가 되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허정 과도정부 혹은 과도내각은 이승만 정권과 민주당 정권 사이의 중간 시점에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한 1960년 4월 26일부터 민주당 출신의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한 8월 12일 사이에 허정 과도정부가 약 100일간 국정을 운영했다. 이랬기 때문에 우리는 허정 체제가 정치 민주화에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착각을 할 수도 있다.

허정 체제의 결과로 민주당 정권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훨씬 더 많은 혜택을 입은 것은 민주당이 아니라 이승만과 자유당 사람들이었다. 겉으로는 민주화에 기여한 것 같으면서도 속으론 구체제에 이익을 줬다는 점에서 허정 체제는 매우 교활한 체제였다. 황교안 체제도 그런 교활한 체제의 복사판이 될 수 있다.

▲ 허정.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허정은 1896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이듬해에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가 무역상이라 생활이 넉넉했던 그는 서당-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전문학교를 거쳐 중국과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허정이 고등보통 즉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이때는 일제강점기였다.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YMCA 학당에도 나가 영어 등의 과외수업을 받았다. 이때 그를 가르친 교사 중 하나가 훗날 대통령이 되었다. 바로 이승만이다.

허정은 스물다섯 살인 1920년부터 미국 생활을 했다. 3·1운동 이듬해부터였던 것이다. 미국 생활 중에 그는 워싱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왔다. 구미위원부를 이끈 사람은 이승만이다. 여기서 옛 스승을 만나 동지 겸 상관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허정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에 이승만 대통령 하에서 교통부장관·사회부장관·국무총리서리·서울시장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이런 사람이 이승만 하야 뒤에 외무장관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 과도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외무장관이 대통령을 대행한 이유는, 바로 윗자리인 부통령직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학교 때부터 이승만과 함께한 그 오랜 추억만 보더라도, 허정 권한대행이 이승만 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권한대행 허정의 목표는 크게 세 가지였다. 가장 중요한 첫째 목표는 이승만과 자유당 정치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4·19혁명의 촛불 속에서 이승만과 자유당 정치인들이 불타버리지 않도록 하는 게 그의 첫째 목표였다. 이들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 최소화되도록 유도하는 게 그의 최대 목표였던 것이다. 

첫째 목표를 성사시키자면, 둘째 목표의 성취가 꼭 필요했다. 둘째 목표는 정·부통령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국민적 요구를 물리치고 헌법 개정을 우선적으로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4·19 혁명은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 때문에 촉발됐다. 따라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으니, 3·15 부정선거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부터 실시하는 게 순리였다. 이 때문에 재선거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 다음에 개헌을 하자는 게 국민들의 요구였다. 정당한 선거로 선출된 새로운 정권의 주도 하에 새로운 헌법을 만들자는 게 당시의 정의였던 것이다. 이를 2016년 버전으로 바꾸면, 박근혜 정권을 심판하고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킨 뒤에 새로운 정부의 주도로 개헌을 추진하자는 논리가 당시에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재선거를 실시하게 되면, 4·19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자유당이 완전히 소멸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죄인으로 전락한 자유당이 참신한 대통령 후보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승만을 다시 출마시킬 수도 없었다. 괜찮은 후보를 새로 영입한다 해도 국민들이 표를 줄 리는 만무했다.

참패가 확실한 선거전에 뛰어들었다가 정말로 참패를 당하면, 엄청난 후폭풍이 불어 닥칠 게 뻔했다. 4·19의 촛불로 이미 화상을 입은 자유당이 재선거에서마저 패배한다면, 선거의 승자가 자유당을 확실히 징벌할 게 뻔했다.

정국을 개헌모드로 전환시켜야 하는 임무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자면, 정국을 개헌 모드로 바꿔야 했다. 자유당이 여전히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국회가 개헌을 주도해야만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게 자유당의 판단이었다. 허정 대행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정국을 하루빨리 개헌 모드로 전환시켜 이승만과 자유당을 살리는 게 그의 미션이었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의 판단은 달랐다. 조속한 재선거로 민심을 달래고 한국 정치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유럽 경제회복과 아시아·아프리카 비동맹운동의 활성화로 미국의 영향력이 퇴조하던 1950년대 후반에, 미국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출범시켜 동아시아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함으로써 세계적 차원의 패권 회복을 위한 기반을 다지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를 앞세워 1960년에 미일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한국과 일본의 동맹 체결을 추진했다. 이런 일을 처리하자면 한국 정치가 하루빨리 안정돼야 했다. 그러자면 한국민들의 요구대로 재선거를 빨리 실시하는 게 유리하다고 미국 국무부는 판단했다.  

하지만, 미 국무부의 판단은 주한미국대사관의 판단이 바뀜에 따라 함께 바뀌고 말았다. 미국대사관의 판단이 바뀐 것은 자유당 사람들의 로비 때문이었다. 자유당 정치인들은 '한국 정치를 하루빨리 안정시키려면, 조속한 개헌을 통해 이승만 체제를 청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개헌을 한 다음에 새로운 선거를 치르는 게 순리가 아니겠느냐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주한미국대사관이 1960년 5월 7일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그렇게 미국대사를 설득하는 사람의 대열에 허정 권한대행도 있었다. 이날 그는 월터 매카나기 미국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지금의 국회가 개헌을 주도한 다음에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칙을 따지자면 재선거를 실시한 뒤에 개헌을 하는 게 맞지만, 그렇게 하면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의 열기를 틈타 선거 국면에 뛰어들 수 있다'는 게 허정의 주장이었다. 미국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레드 콤플렉스를 활용해서 미국대사를 압박한 것이다.

허정과 자유당의 이 같은 로비의 결과로,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를 설득하고 국무부는 새로운 방침을 내놓게 된다. 한국에서 선거보다는 개헌이 먼저 추진되도록 한국을 움직이자는 쪽으로 미국의 정책이 바뀐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허정의 둘째 목표가 성취된다. 

허정의 셋째 목표는, 개헌을 하되 그것이 내각제 개헌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의 독재와 부패를 막을 수 있는 정부체제를 내놓는다면 국민들의 '촛불'이 저절로 사그라질 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이렇게 하면, 이전부터 내각제 개헌을 통해 이승만을 제압하고자 했던 민주당의 요구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또 내각제 개헌을 하면, 자유당이 새로운 상황에 슬그머니 편승할 수도 있었다. 이승만이 몰락한 상황에서 새로운 대통령후보를 내놓기 곤란한 자유당의 입장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해야만 그나마 미래를 기약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허정 한 사람만의 판단은 아니었다. 4·19 촛불의 열기 속에서 목숨과 지위와 재산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던 1960년판 새누리당의 판단이기도 했다.

허정은 세 가지 목표를 모두 이뤘다. 권한대행이란 지위를 이용해 정국을 개헌 모드로 바꾸고 기존의 국회가 개헌 정국을 주도하도록 함으로써 4·19판 촛불의 열기를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또 내각제 개헌을 성사시킴으로써 대통령 독재의 가능성을 막은 것처럼 보여주는 동시에, 민주당도 만족시키고 자유당이 부활할 가능성도 남겨놓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허정은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 최소화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승만이 감옥이 아닌 하와이로 망명할 수 있도록 돕는 데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 이승만 동상.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4.19의 열매 자른 게 허정 과도정부의 진짜 '공적'

허정 과도정부는 외형상으론 이승만 정권과 민주당 정권 사이의 과도기에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역할을 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위와 같이 구체제에 대한 심판이 최소화되도록 만든 게 그들의 진짜 업적이었다. 4·19의 열매를 과도로 쑥 자르는 게 허정 과도정부의 진짜 공적이었던 것이다. 

허정 권한대행 당시, 비서실장을 지낸 장일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1997년 6월호 <한국논단>에 기고한 '허정 과도정부의 성공 요인'이란 글에는, 허정 대행의 마지막 연설문을 작성할 때의 일화가 나온다.

연설문 기안을 담당한 장일강은 '대과(大過) 없이 과도정부 100일을 마쳤다'는 식의 자평을 연설문 속에 집어넣었다. 연설문을 검토하던 허정은 '대과 없이'라는 문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붉은 색으로 밑줄을 치며 "Very good!"이라고 말했다. 이승만과 자유당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큰 과오 없는 과도정부였던 것이다.

4·19 혁명이 민주당 정권의 무능 때문에 결국 실패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물론 그렇기도 했지만, 민주당 정권이 무능해지고 4·19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허정 과도정부의 '장난질'도 상당히 큰 작용을 했다.

4·19 직후의 급박한 혁명적 상황 속에서, 이승만의 제자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 혁명을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했다. 그런 장난질 때문에 4·19가 실패하고, 박정희가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나 훨씬 더 큰 '장난질'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허정은 교활한 인물인 동시에 역사의 죄인이다.

황교안과 박근혜의 관계는 허정과 이승만의 관계만큼은 못해도, 그래도 상당히 친밀한 편이다. 그런 황교안에게 지금 이 상황에서 국정을 맡기는 것은 4·19의 전철을 자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황교안이 교활한 허정의 뒤를 밟지 말라는 보장이 있을까.

그런데도 야 3당은 황교안 대행과의 대화 채널을 만들고 그를 사실상 인정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1960년의 실패를 재연시킬 수 있는 위험한 모험이다. 이것은 국민을 우롱하고 촛불을 짓밟는 행위이자 역사의 진보를 훼손시키는 범죄행위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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