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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앞바다, 스무 해 묵은 빨간 구명조끼

[시골에서 시읽기] 이종호 <무당거미>

등록|2017.01.09 10:38 수정|2017.01.09 10:38
전남 진도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이종호 님은 이녁이 시골 공무원으로 일하며 부대끼는 삶을 틈틈이 시로 갈무리해 놓습니다. 이를테면 "뻘놈들아! / 제발 바다 막지 마란께 / 한 치 앞도 못 보믄 쓰것나(간척지)"처럼 굵고 짧게 외치듯이 시를 씁니다. '뻘놈'이라는 말로 익살처럼 제발 '뻘 좀 그대로 두라'는 목소리를 냅니다.

군수도 면장도 아닌 공무원으로서 목소리를 낸다 한들 너무 작은 개미 한 마리 외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도 공무원 이종호 님은 시 한 줄을 씩씩하게 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녁이 나고 자란 그 마을을 사랑하거든요. "다 떠나는 곳"인 시골이 아니라 "다 모이는 곳"인 시골이 되어 이녁 고향마을에 새롭게 아기 목소리랑 젊은이 노랫소리가 넘실거리기를 바라요.

▲ 겉그림 ⓒ 북산

마을회관 앞 마당 정자에
백설을 이고 빙 둘레 모여 앉아있는 
아짐들을 보면 마음이 착잡하다 

삼십오 년 전, 
장딴지에 달라붙은 거머리 떼어내며 
손모 몇 날 며칠 심기던 
팔팔한 까만 청춘들은 어디 갔을까? (다 가는 곳)

시집 <무당거미>(북산,2016)에는 나즈막한 이야기가 흐릅니다. 먼저 이종호 님이 어릴 적 시골집에서 겪은 이야기가 흘러요. 시골마을에서 무럭무럭 자라면서 사랑스러운 짝꿍을 만나는 이야기가 뒤따르고, 시골 공무원으로 일하며 아이를 낳아 오붓하게 돌보는 이야기가 곁따릅니다. 그리고 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슬픈 떼죽음을 가깝거나 먼 자리에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던 힘없는 한 사람으로서 가슴을 치는 이야기가 잇따라요.

마파람 부는가 거실 대못에 멀거니 
서있는 달력 다섯 장이 철렁철렁 
새벽 잠을 깨운다 

예전엔 헌 달력을 안 버리고 모태 놔뒀다가 
연도 날리고 새책 가오로 입혔다 (가오리연)

한 달 서른 날 숫자가 적힌 달력 종이는 제법 두껍습니다. 이 달력 종이는 진도 시골마을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알뜰히 책을 싸던 종이가 되었어요. 이종호 님은 달력 종이로 책을 싸고 연을 날리기도 했대요. 그리고 딱지를 접어서 딱지치기를 하기도 했겠지요. 종이비행기를 접기도 하고, 개구리를 접기도 했을 테고요.

소가 벌집을 밟았나보다 
말벌 우르르 내게 달라든다 
얼른 내삐도 못하고 눈두덩이 부어오른다 
소 내팽개치고 울며불며 집으로 달렸다 

할마니는 "어째 그라냐, 내 갱아지" 하며 
뒤안으로 데꼬가 넓적한 장뚜껑 여신다. 
몇 해 전 골박 터지고 볼랐던 그 메주 된장이다 (책임완수)

표준말로는 '할머니'일 테지만, 진도사람 이종호 님한테는 '할마니'입니다. '아주머니'가 아닌 '아짐'이고, '모으다'가 아닌 '모태다'요, '내빼다'가 아닌 '내삐다'예요.

전라말을 가만히 곱씹습니다. 진도말을 찬찬히 되씹습니다. 말마디에 서린 오랜 발자국을 돌아보고, 말결마다 흐르는 오랜 이야기를 헤아립니다. 참말로 진도내기 시골사람은 오늘날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이 전라말이나 진도말을 물려받을 아이들은 앞으로 얼마나 될까요.

다음 날 4월 16일 
아침해도 변함없이 산마루 위로 방긋 웃으며 나왔다 
나도 여느 날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출근해 컴퓨터를 켜고 일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동료 여직원이 불러댄다 
핸드폰을 막 닫고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쳐다본다 
혹시 작은애가 진도중 2학년 아니세요? 
오늘 제주로 수학여행 갔죠 
지금 읍내 목욕탕에서는 아줌마들이 목욕하다 말고 
학교로 전화 걸고 난리 났대요 (녹슨 냉장고·2)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바닷물에 잠기던 날, 진도중학교 아이들도 진도에서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갔다고 합니다. 그날 바닷물에 가라앉은 배는 진도 아이들이 아닌 안산 아이들을 태웠습니다. 그러나 진도사람은 진도 앞바다에서 가라앉은 배가 어떤 배인지 알 수 없었을 테지요. 그저 발을 동동 굴렀을 테지요.

진도 아이들을 태운 배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을까요. 아마 어느 누구도 가슴을 쓸어내릴 수 없었으리라 봅니다. 내 아이가 아니었어도 '우리 아이'요 이웃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인천을 출발해 제주도로 가기 위해 세월호를 탔던 그 수많은 사람과 어린 학생들이 마지막 입었던 빛바랜 구명의가 보관소로 차곡차곡 피눈물로 쌓여 갔다. 모두 다 제조연월은 '1994'라고 하얗게 찍혀 있었다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나이보다 3살이나 더 많은 만 20세의 구명의가 갑자기 빨간 수의로 보였다. 그 순간, 북받쳤던 그 서런 감정을, 진도에 살고 있는 진도인으로서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둬야 할 책무감이 들어 급히 메모장에 숨가쁘게 적었다. (녹슨 냉장고·6)

진도 공무원 이종호 님은 진도 앞바다에서 아이들을 태운 배가 가라앉은 뒤, 그 배에 실렸다가 흩어진 짐을 쌓아두는 보관소를 건사하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끝자락 공무원으로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이 애태우기만 하다가, 공무원이니 맡은 일을 하는데, 보관소로 쌓이는 빛바랜 구명의는 바닷물에 잠긴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았다고 해요.

구명조끼는 스무 해가 묵는 동안 그 자리에 얌전히 있었겠지요. 열아홉 해를 묵을 적에도, 열여덟 해나 열일곱 해를 묵을 적에도, 열여섯 해나 열다섯 해를 묵을 적에도 그저 그 자리에 곱게 있었겠지요.

이제 부디 해묵은 구명조끼는 모든 배에서 치워내기를, 해묵은 구명조끼를 버젓이 두고도 멀쩡히 배를 모는 일은 없기를, 해묵은 구명조끼 같은 이들이 권좌에 눌러앉는 일도 없기를 비는 마음으로 시집 <무당거미>를 가만히 덮습니다.
덧붙이는 글 <무당거미>(이종호 글 / 북산 펴냄 / 2016.11.9. /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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