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의 새해 소원 "우리나라 망하지 않게 해주세요"
지리산 노고단 일출기
▲ 2017년 1월 1일 노고단 정상에서추위와 배고픔을 극복하고 정상까지 함께 해준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 이정혁
좀 한심해 보였다, 일출 구경이... 생각이 변했다, 기가 약해진 듯하다
좀 한심해 보였다. 해가 바뀌었다고, 바다로 산으로 일출 보러 몰려가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지구가 한 바퀴 돈 것뿐이고, 태양은 40억 년 전부터 늘 그 자리에 존재할 따름이다. 달력이 새로 바뀌었다고 태양이 갑자기 흥에 겨워 일출 보러 온 사람들에게 답례품으로 바이오 에너지 한 캡슐씩 방출할 리는 없지 않은가.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뜨신 방구석 놔두고 저 추운데 나가서 굳이 떨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다 마흔 둘이 되면서 몸의 변화를 느꼈다. 꺾인다는 표현의 의미를 뼈마디와 근육, 오장육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감지하기 시작했다. 호르몬 분비 감소 탓인지 우울증 비슷한 증세도 나타났다.
생각은 변한다. 특히나 제 몸에 터럭 하나라도 잘못될 것 같으면 순식간에도 변할 수 있다. 어른들 말이 틀린 게 없구나. 기가 약해진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기를 보충해야겠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태양의 기운이었다. 2017년의 최고 목표를 건강으로 세웠으니, 새해 첫 일출을 보며 양기를 폭풍흡입 해보자. 왜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일출을 보기 위해 몰려가겠는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신비로운 우주의 기운(?)이 있을 것만 같았다.
바다에서 뜨는 해는 좀 식상했다. 호미곶이니 정동진이니 일출의 명소로 알려진 곳에는 정초를 피해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시동 켜놓고 차에 앉아 있다가 해 뜰 즈음해서 바닷가로 이동하는 건 뭔가 날로 받아먹는 느낌이랄까? 정성이 부족해 보였다. 더구나 태양에너지만으로는 모자란 2%를 채워줄 추가적인 기운도 필요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바로 지리산 노고단 일출이었다.
태양의 기운과 지리산의 정기가 합쳐지는 그 곳.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노고단 정상에 올라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한 바로 그 곳. 2017년, 나의 콘셉트와 딱 맞아 떨어졌다. 물론 지리산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에, 그 결정의 중대한 결점은 알지 못했다. 소문만 듣고 주차장에서 한 삼십분 걸어 올라가면 되는 뒷산쯤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 네 시. 숙소를 나섰다. 잠이 덜 깬 아이들에게 억지로 옷을 입혀 차에 태웠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의 말로는 그 시간에 가야 주차할 곳이 있을 거란다. 현지인의 말은 믿어야 한다. 4시 30분. 성삼재 휴게소의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다(참고로 주차요금도 실제 만원이 나왔다. 좀 쎈 편이다). 간신히 주차를 하고 일출 시간에 맞추기 위해 잠시 몸을 녹였다. 그때까지는 일출을 보겠다는 의지로 충만해 있었다.
5시 15분. 드디어 노고단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아내와 아이 손을 한명 씩 잡고. 시작은 순조로웠다. 천문대에서나 볼 법한 별들이 머리 위를 가득 덮고 있었다. 별의 숲을 통과할 때까지는 콧노래도 흥얼거렸다. 아이들 걸음으로 한 시간 반쯤 걸릴 겁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나는 아이들보다 월등히 체력이 좋을 거라 생각했었다. 오산이었다.
눈이 얼어붙은 빙판길, 아이 둘 데리고 올리가는 험한 여정이라니...
▲ 일출을 보고 하산하는 사람들저 많은 사람들이 정상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시라. 발 디딜 틈이 없었다. ⓒ 이정혁
▲ 추위에도 즐겁게 노는 아이들노고단 정상의 추위는 상상 이상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마냥 즐겁다. ⓒ 이정혁
오르막길을 삼십 여분 걷다보니 숨이 차올랐다. 손전등에 의지에 컴컴한 산길을 걷다보니 정상까지의 거리가 가늠되지 않았다. 옆에서 연신 얼마나 남았냐고 묻는 유치원생 둘째 아이에게, 거의 다 왔다는 거짓말하기도 지친 상태였다. 눈이 얼어붙은 빙판길을 아이 둘 데리고 올라가는 험한 여정은 계산되지 않은 고난이었다.
중간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새해 첫 목표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의지 약한 아비의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새해 염원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를 악물고 걸었다. 온 몸이 땀에 젖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쯤 오르니 노고단 대피소가 보였다. 거기서부터 30분만 오르면 정상이다. 한 시름 놓나 했더니 매서운 바람이 몰려왔다.
일출 시간까지 한 시간 쯤 남았기에 추위를 피하러 어딘가로 들어갔다. 그곳은 하필 취사장이었다. 배낭 가득 먹을거리를 싸온 사람들이 라면도 끓이고 밥도 해먹고 있었다. 혼미한 정신에 어디선가 갈비 굽는 냄새를 맡은 것 같다. 산행에 무지한 우리 가족은 추위와 배고픔을 동시에 견뎌내야 했다. 아무 것도 안 해먹으면서 괜히 자리 차지하는 게 눈치가 보여 한쪽 구석에서 네 가족이 부둥켜안고 있었다. 가장으로써 흥부의 맘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노고단의 예상 일출 시각은 7시 38분이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짐을 정리하기에 우리 가족도 발걸음을 옮겼다. 배도 고프고 기력도 없고 이미 패잔병의 기운이 서려있었지만 되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그렇게 노고단 정상에 꾸역꾸역 올랐으나 돌탑 주변은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밝아오는 하늘을 배경으로 사람들 머리만 보였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것인가?
태양의 정기를 온 몸으로 받아야 했다. 곧 해가 뜬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저기, 죄송한데 아이 방학 숙제라서요." 초등학교 1학년 큰 아이를 앞세우고 군중을 비집고 들어갔다. 아비의 비뚤어진 욕망에 상처 받았을 큰 아이에게 지면을 빌어 용서를 구한다. 이해심 많은 시민들 덕분에 간신히 일출이 보이는 가장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산과 구름이 빚어낸 운해를 뚫고 해가 오르고 있었다. 순간 배고픔과 추위와 피로가 단번에 사라졌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코끝이 얼어붙고 카메라를 쥔 손은 심하게 떨려왔다. 중무장을 했음에도 정상의 칼바람은 살까지 뚫고 들어왔다. 그럼에도, 일출은 장관이었다. 백두대간 끝자락 전체를 물들이며 위엄 있게 떠오르는 2017년 첫 번째 해. 나는 단전까지 태양의 기운을 깊게 빨아들였다.
늘 그렇듯 해가 떠오르는 것은 순식간이다
▲ 지리산 노고단 일출 사진-1노고단 정상에서의 일출 사진은 운해와 더불어 최고의 장관이다 ⓒ 이정혁
▲ 지리산 노고단 일출 사진-2지리산 노고단 꼭대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일출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 이정혁
▲ 해가 완전히 솟은 후의 사진지리산 노고단의 일출은 시시각각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 이정혁
늘 그렇듯 해가 떠오르는 것은 순식간이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사진 찍기 바빴던 사람들은 재빠르게 하산하기 시작했다. 모두 내 맘 같았으리라. 빨리 이 추운 곳을 벗어나자. 그렇게 지리산 노고단의 일출은 투자대비 지나치게 짧게 막을 내렸다. 욕구를 채운 나야 만족스러웠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아이들 생각이 궁금했다. 아이들에게 어떤 소원을 빌었냐고 물었다. 첫째는 지금 짝꿍과 내년에도 같은 반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단다.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게 해주세요." 다섯 살부터 세월호 집회에 참가하고, 광화문에도 다녀온 일곱 살짜리, 둘째 입에서 나온 말이다. 광화문에 다녀온 후로 녀석의 꿈은 착한 대통령으로 바뀌었다. 일신의 건강을 위해 산에 오른 아비로써 몹시 창피했다. 한편으로는 조기 교육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지리산 노고단 일출의 기운을 받아 아이의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조국을 위해 이날의 노고쯤은 흔쾌히 넘어가리라.
끝으로, 지리산 노고단 일출의 기운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몇 가지 팁을 적어본다. 동절기 입산 시간은 새벽 4시. 새해 첫날이야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므로 크게 필요 없었지만 손전등은 필히 지참할 것. 등산로 대부분은 녹은 눈이 얼어붙은 상태다. 겨울 산행에서 아이젠은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노고단 대피소에서는 따뜻한 음료나 라면 등을 팔지 않았다. 보온병에 따뜻한 물이나 차를 챙겨가길 바란다. 코펠을 가져가면 취사가 가능하다. 추위에 떨며 다른 사람들 밥 먹는 걸 보면서 서글퍼 지지 않으려거든, 성삼재 휴게소에서 배를 채우거나, 허기를 달래 줄 간식꺼리를 꼭 챙겨가길 바란다.
주말이면 아이들과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려 애쓰는 편이다. 지리산 노고단의 일출은 죽기 전에 혹은 더 늙기 전에 한번쯤은 봐야 할 만한 장면이다. 산 정상에서 떠오르는 해를 본 적 없는 분들에게는 강력 추천한다. 노고단까지의 산행이 마을 뒷동산에 오르는 수준은 아니지만, 경사도가 비교적 원만한 편이다. 기자의 저질 체력이 문제였지, 유치원생도 올라갈만한 수준이니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 일출 보고 내려온 직후의 사진춥고 배고픈 볼 빨간 갱년기를 보라. 일출을 보려거든 배부터 채우시라.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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