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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사람들의 Goya 발음, 참 난감하네

[다섯 부부의 인상파식 여행] 아! 이베리아 반도 ⑭

등록|2017.01.03 14:49 수정|2017.01.03 14:49
마드리드의 첫 밤은 겨우 한 뼘이나 될 듯 짧았다. 침대를 떠나고 싶지 않아 몸을 뒤척였다. 전날 다녀온 중세 도시 톨레도의 감흥이 선연하게 보태진다. 콘수에그라 풍차 마을과 라만차 지방의 드넓은 벌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이야기가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뇌리에서 살아난다.

오늘은 마드리드를 정조준하고 뛰어들어야 한다. 왠지 어제 여행은 맛보기, 오늘 여행은 본게임 느낌이다. 소화해야 할 일정이 많은 날이다. 아침부터 서두를 수밖에 없다.

▲ 프라도 미술관 앞 쪽에 세워진 고야의 동상 ⓒ 길동무


고야(Goya)의 동상을 만난 것은 프라도 미술관 앞 광장이었다. 마치 지인이라도 만난 듯 반갑다. 길동무 모두 달려가 포옹이라도 하고픈 기색이다. 한 무리의 젊은 서양인 여행객들이 동상 앞에 모여 웃고 즐기고 있다. 길동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동상 앞으로 갔다. 그리고 늘 그렇듯 길동무 가족사진 포즈를 취했다.

프라도 미술관까지 오는 동안 동상을 제법 여럿 만났다. 스페인 광장의 동상들을 시작으로 마드리드 대성당의 베드로 성인 상, 마요르 광장의 펠리페 3세 기마 동상, 마드리드 도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카롤로스 3세 동상, 마드리드의 상징이라는 산딸기 먹는 곰 동상 등. 그에 더해 동상 흉내를 내며 여행객들을 놀라게 하는 광장이나 길거리 퍼포먼스꾼들까지.

▲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의 세르반테스 동상. 그 앞과 옆에 소설 돈키호테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동상이 있다. ⓒ 길동무


뭐든 첫인상이 중요하다. 동상도 그랬다. 마드리드 첫 탐방지 스페인 광장의 동상들이 모두 반가운 인물들이었던 거다. 스페인이 낳은 대문호 세르반테스를 기리는 거대 동상과 그의 소설 주인공들이 길동무들의 마음을 단박에 풀어헤쳤다. 책을 들고 앉은 세르반테스의 동상은 아주 근엄했다. 하지만 보고 느끼기에 참 편안했다. 그가 쓴 소설 속 주인공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굽어보고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다감했다.

그런가 하면 청동의 돈키호테 상은 긴장감이 넘쳤다. 허리에 찬 긴 칼도 그렇거니와 날카로운 창을 꼬나 쥐고 형형한 눈빛으로 목표물을 노려보는 날렵한 모습이 기세 넘쳤다. 금방이라도 로시난테를 몰고 풍차를 향해 달려들 듯했다. 그러나 그의 충직한 부하 산초 판사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방패를 등에 멘 통통한 형상, 무게를 버거워하는 듯한 노새 등에 올라앉아 늘어진 말 끈을 쥔 모습에 긴장감이라곤 없다. 돈키호테로 인해 상상과 현실을 오가는 두 역할의 여인 드루네시아와 알론사 로렌소가 함께 조형된 것도 흥미롭다.

바라보는 대상에 관해 어느 만큼이라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은 느낌을 크게 좌우한다. 특히 그 대상이 모두에게 호감을 주는 인물임에랴. 그러니까 유럽 여행에서 흔히 만나는 전쟁 영웅이나 왕 등의 동상과 달리 스페인광장의 동상들은 모두 다정하고 다감한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이른 시간 이곳을 찾은 여행객들 모두 서두름이 없다. 동상을 배경으로 즐겁게 사진을 찍고 부담없이 대화를 나눈다. 해석을 할 수 없는 몇 개 국어가 만국의 공통 언어 웃음소리와 함께 섞여 나긋나긋 흩어졌다.

▲ 마드리드의 스페인 왕궁. 이른 시간임에도 오른쪽 입구에 입장객들이 줄을 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 길동무


▲ 왕궁 ⓒ 길동무


환한 햇살이 화르르 마드리드를 깨워 나간다. '천국에서도 작은 창을 통해 본다는 마드리드'에 생기가 돋는다. 둘러보고 돌아보며 짓쳐나간다. 마드리드 점거를 시작했다. 걸음은 빠르게 미소는 우아하게, 백조의 모습을 유지하기로 했다. 어느 사이 왕궁에 도착했다. 처음부터 왕궁은 외관만 보기로 한 곳이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이미 그렇게 결정한 곳이고 보니 더 열중해서 설명을 듣게 된다.

▲ 마요르 광장에서 길동무들 ⓒ 길동무


▲ 스페인 모든 도로의 시작점인 마드리드의 중심 0km 좌표 ⓒ 길동무


▲ 마드리드의 번화가 ⓒ 길동무


왕! 왕 노릇을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에 빠지는 사이 왕궁과 이웃한 대성당이다. 마드리드 구시가지, 마요르 시장과 광장, 마드리드 중심지 프에르타 델 솔과 번화가 그란비아를 거쳤다. 스페인 모든 도로의 시작점인 마드리드의 중심 0km 좌표에 발을 얹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이미 미술 장르로 인정받았다는 길거리 페인팅도 카메라에 담으며 뛰듯 걸었다. 그리고 프라도 미술관, 거기서 길동무는 옛 친구를 만나듯 고야의 동상을 만났다.

"와우! 고야다~ 우리가 '고야'를 만난 고야?"
"……"

"왜 대답이 없는 고야? 내가 말끝을 올렸으면 대답을 해야 하는 고야. 왜 아무도 대답을 안 하는 고야?"

개그콘서트 '요리하는 고야' 코너의 한 개그맨 버전이 튀어나왔다. 대답 대신 폭소가 지나갔다. 그리고 가이드 이 선생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대개 Goya를 '고쟈'로 발음합니다."

불길에 기름 역할이었다. 길동무 대부분이 자지러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고야?"와 "고야~", 그리고 "고쟈"는 찰나와 순간마다 길동무 웃음의 효소가 되었다.

▲ 프라도 미술관 가는 길에서 만난 길거리 퍼포먼스 ⓒ 길동무


돌아보니 길동무 여행에는 그때마다 드러난 말이 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갔을 때는 "썹써바이"였다. 이 말은 캄보디아어로 '안녕하세요.'다. 일반적으로 많이 쓴다는 이 말이 귀에 들린 순간 길동무 누군가의 순발력이 발휘되었다.

"섭섭하이!"

뭐가 섭섭하다는 것이지? 참 난데없는 해석이었다. 그때부터 '섭섭하이'는 '안녕하세요'가 필요할 때나 아쉬운 일이 생겼을 때, 또 분위기 반전이 필요할 때 시도 때도 없이 등장했다. 캄보디아 여행 때뿐만 아니다. 지금까지도 정기 만남 때면 때에 따라 '섭섭하이'가 등장한다. 잊을만하면 누군가로부터 들춰지면서 윤활유 역할을 한다. 

길동무가 아프리카 4개국 여행을 갔을 때 주도했던 말은 "오빠는 강남스타일"이었다. 가수 싸이의 독특한 춤과 함께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노래 제목, 이 역시 요소요소 매우 흥겹게 쓰였다. 노래와 어우러진 '말 춤' 또한 여행 중 몇 번이나 등장했었다. 영국 일주 여행을 할 때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였다. 그리고 이 말 또한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상황에 따라 등장한다. 이처럼 길동무 여행 상황에 따라 생겨난 이 말들은 길동무 여행 신조 "우리가 언제 또 여기를 온다고~"와 함께 참 유용한 조미료다.

고야,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란 긴 이름의 스페인 화가, 나는 마드리드 여행기를 시작하면서 '고야'라는 두 글자를 쓴 그 후 며칠을 옴짝달싹 못 했다. 고야 삼매에 갇혔다. 그의 일대기를 읽다가 그를 그린 영화 <고야의 유령(Goya's Ghosts. 2006)>을 보았다. 머리를 싸매고 그를 생각하다가 안주 없는 술을 그와 대작하기도 했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나타난다."

고야의 생각이다. 그렇다. 사람에겐 이성이 필요하다. 특히 작금과 같은 시대 상황에서는 괴물이 나타나지 않도록 자기의 이성을 잠재우지 말아야 한다. 훌륭한 예술가는 참 많다. 내가 존경하는 예술가도 부지기수다. 그중에서도 고야는 단연 품격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알았다. 그의 품격은 그의 삶과 작품이 온전히 증명한다. 그는 조국 스페인과 스페인 민중을 위해 자신을 불태웠다. 스페인 최고의 화가이니 문화 영웅이니 하는 따위의 찬사로 그를 대변하기에는 한참 부족할 정도다.

"고야는 미래를 위해 불합리와 무분별한 폭력에 끝까지 대항하며 현대의 삶과 정치를 바꾸어 놓았다." <뉴욕 타임즈> 예술 평론가 마이클 키멜만의 말이다. 세상은 늘 혼돈이고 늘 불확실하다. 고야는 그 혼돈과 불확실을 탐구하여 창작의 소재로 삼았다. 그래서 "시대와 민족의식을 깊이 탐구한 '전무후무한 진정한 예술가'"라는 평가가 너무 잘 어울린다.

고야의 전기를 쓴 로버트 휴는 "고야는 처음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 화가이다. 그리고 축제의 기쁨 또한 훌륭히 그려냈다"고 밝힌다. 그렇다. 고야에 대한 대표적인 평가 한 마디는 '낭만주의 작가'다. 그는 작은 오렌지, 담배 한 모금, 와인의 뒷맛, 촉촉이 젖은 실크, 아무 무늬 없는 면, 여름밤 축제의 분위기, 밤하늘의 어스레함 등 관능적인 것을 사랑했다.

고야는 일생 인물을 그렸다. 그가 남긴 작품 대부분이 인물화일 정도다. 그는 인물화를 그릴 때 그 인물이 지닌 내면적 특성을 통찰하여 그림으로 드러내는 데 천재적이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들을 살피면 후기로 갈수록 간결하면서도 상황이 인물의 얼굴에 강렬하게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자는 그가 악마적 분위기에 빠져든 결과라고 하는데, 전쟁과 사회 악습에 대한 고야의 깨우침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고야는 그의 작품을 통해 생명력 없는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기보다 살아 숨쉬는 정치적·사회적·종교적 악습을 비판했다. 한편으론 명예를 추구하고 세속적 성공을 향해 돌진한 적도 있다. 그러나 언제라도 세속의 명예와 성공에 이성을 잃거나 이성이 잠들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자신이 몸담았던 상류사회나 자신을 후원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것에 관해 그의 기록은 항상 냉철하고 신랄했다. 

프라도 미술관은 파리의 루부르, 상트페테스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마드리드 여행객들에게 프라도 미술관은 빠트릴 수 없는 곳이다. 길동무 이번 여행에도 프라도 미술관 탐방은 마드리드 여행의 핵심이었다.

프라도 미술관의 자랑은 3천 개 이상의 회화 작품을 보유한 세계 최고 수준의 규모다. 그리고 디에고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루벤스, 라파엘, 알브레이트 뒤러, 렘브란트 등 불멸의 화가들의 뛰어난 작품들이다. 과연 놀라운 곳이었다. 그리고 거기 고야가 있었다. 이전에 내가 미처 다 알지 못했던 새로운 고야가 거기 있었다. '새로운 발견'이란 바로 이런 것일 터였다.

고야는 1799년에 그가 바라던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권위를 누리기 위해 궁정화가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무능하고 부패했던 궁중을 비판하고, 타락한 왕실의 모습을 풍자한 그의 작품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는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 직전 청력을 잃었다. 신체적으로 불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으로 승화였다. 그로부터 그의 작품은 주제의식이 더욱 분명해졌고,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깊이를 탐구하고 표현했다.

▲ 고야의 동상을 배경으로 길동무 가족사진 ⓒ 길동무


길동무가 프라도 미술관을 탐방했을 때 마침 '검은 그림들(Pinturas negras)'로 불리는 고야의 만년 연작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 작품들은 고야가 지배자들의 폭정을 이기지 못해 망명지로 선택한 프랑스 보르도의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이라 이름 붙인 시골 별장의 벽을 장식한 작품들이다. 그는 늙고 쇠약했지만 죽을 때까지 그곳에 살면서, 그의 생애에서 받은 인상을 작품으로 남겼다.

그 작품들은 일반인이 예상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그림 본연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다. 추하고 자극적이다. 그래서 극히 일부인 그 작품들만을 보고 고야를 광기 넘치는 작가로만 치부해버리는 이들도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시기 고야의 정신세계였다. 만약 고야가 그 처지와 시기에 세상이 좋다 좋다할 그림 따위나 그렸다면 역사는 그 작품들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 취급을 했을 것이다. 그 작품들을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곧 프라도 미술관의 위대함이기도 하다. 

밀로스 포만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아마데우스> 등을 연출한 거장 영화감독이다. <고야의 유령>은 바로 그의 감독 작품이다. 그가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다. 그는 히에로니무스 보시의 <쾌락의 동산>을 보기 위해 프라도 미술관을 찾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고야의 그림이었고, 그로 인해 영화 <고야의 유령>이 탄생하였다. 그는 영화를 연출하고 나서 말했다.

"고야는 현대회화의 선구자입니다. 제 영화 안에 있는 인물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입니다."

고야의 위대함은 그가 늘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아픈 현실이나 고단한 민중의 편에 서지 않아도 됐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권력과 부에 아첨하지 않았고 작가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고야는 민중의 진실이 권력에 유린당하거나 짓밟히면 그것을 참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만약, 만약에 말이다. 오늘 그가 있어 한국의 정치 상황과 민중의 촛불을 본다면 어떤 작품을 창작할까?

위임받은 권력자들이 일말의 양심과 책임, 도덕적 반성이 없는 상황에서 오직 아름다운 촛불로 드러나는 민심을 고야의 감성과 신념이라면 어떻게 표현했을까? 참 다행이다. 혹한에도 세시기에도 민중의 촛불이 끊이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멀리서 보고 느끼기에 한편 안타깝고 고맙지만, 고야와 같은 정신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것이 참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고야, 그의 정신은 불멸이다. 한국 민중의 정신도 결코 시들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여행 후, 시간이 갈수록 고야는 나를 지배하고 있다. 그의 뛰어난 통찰력과 표현 능력이 참으로 부럽다. 그리고 용기와 신념은 존경의 마음을 그칠 수 없게 한다. 고백한다. 나는 이번 길동무 여행을 통해 평생 마음 안에 모실 한 분 스승을 만났다.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생각을 바꾸게 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내 창작을 지배할 위대한 스승을 만났다.

그 이름은 바로 '프란시스코 고야'다. 
덧붙이는 글 여행을 위해 '길동무'란 이름으로 뭉친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 다섯 부부의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인도네시아 한인 경제신문 사이트 PAGI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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