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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강이 만나는 아름다운 호수 위의 성

충청수영 본부였던 오천성, 본래 모습과 조선 시대 풍경 고스란히 남아

등록|2017.01.03 17:45 수정|2017.01.03 17:45

▲ 충남 보령 오천항에 남아 있는 충청수영성 성곽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풍경. ⓒ 정만진


조선 시대에 수군 지역 본부, 즉 수영이 있었던 장소로는 부산 동래, 경남 거제, 전남 해남, 전남 여수 등이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동래와 거제는 임진왜란 발발 즉시 경상좌수사 박홍이 전함을 모두 바다 속으로 밀어넣고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는 사실과 경상우수사 원균 역시 전혀 싸울 생각 없이 곧장 육지로 피신했다는 이야기 덕분에 유명해졌다. 물론 해남과 여수는 이순신의 활약에 힘입어 전라좌수영(전라좌수사 본부) 또는 통제영(삼도수군통제사 본부) 설치 지역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충청도의 서해안을 지킨 충청수군 본부 오천성

그에 비하면, 충청수영이 어디에 위치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심지어 충청수영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과연 충청수사는 어디에서 근무를 했을까? 상식적으로는 금강 하류의 군산과 장항 일대가 아닐까 여겨진다. 현재의 행정구역상 군산시 자체는 비록 전라북도 소속이지만, 장항이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이므로 두 항구 사이를 충청도라 해도 무리가 없을뿐더러, 금강은 충청도 일원에서 서해로 흘러가는 강 중 가장 넓은 물줄기이기 때문이다.

▲ 저 끝 오천성(충청수영성) 성곽이 끝나면 그 아래로 강물이 흐른다. ⓒ 정만진


충청수영은 보령 오천성에 있었다. 충청수사는 흔히 오천성이라 부르는 '충청 수영성(忠淸水營城, 사적 501호)'에 머물렀다. 지금의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번지, 둘레 1650m, 면적 1만 378㎡ 일대가 조선 시대의 충청수영성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조선 초 충청수영 산하에 군선 142척과 수군 8414명이 배속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충청수영을 충청도의 서해안 지역에 설치한 것은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한 군사적 조치였다.

오천성에는 임진왜란 당시 수군 참패의 아픈 역사가 서려 있다. 오천성 자체에서 벌어진 처참한 패전은 아니지만, 용맹하기로 이름 높던 충청수사 최호가 남해로 지원 출정을 갔다가 전사한 것이다.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충청수사 최호는 1596년(선조 29) 이래 충청수영 산하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3도수군통제사의 지휘를 받던 중, 1597년(선조 30) 7월 16일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과 함께 칠천량 바다에서 전사했다.

칠천량 참패의 원인과 경과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는 임진왜란 발발 이래 조선 수군을 괴롭힌 큰 골칫거리였다. 1594년 11월 12일, 초대 3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다. 본래 벼슬이 더 높았고, 나이도 다섯 살 많은 원균과 이순신은 호흡이 맞지 않았다. 이순신을 물러나게 할 수 없었던 선조와 대신들은 12월 1일에 경상우수사 원균을 충청병사로, 12월 9일에 진주목사 배설을 경상우수사로 발령한다.

1596년 12월 1일 이래 결정적 사건이 벌어진다.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가 거짓 제보를 해오고 선조가 속는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가등청정(加藤淸正, 기토 기요마사)이 내년 1∼2월 중에 현해탄을 건너오니 그때 부산 앞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순신은 임금의 지시를 거부한다. 선조는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면서 2월 6일 이순신 검거령을 내린다. 3월 4일, 이순신은 감옥에 갇히고, 원균이 3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선조와 조정은 원균에게 부산 앞바다로 출정하여 신속히 왜적들을 무찌르라고 독촉한다. 원균은 망설이다가 도원수 권율에게 끌려가 병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곤장을 맞는 치욕까지 당한다. 결국 7월 5일, 원균은 조선 수군 전부를 이끌고 부산 앞바다로 출발했다가, 갑자기 몰아닥친 풍랑 때문에 거제도 북서쪽 해안의 칠천량으로 후퇴한다.

7월 16일 새벽 4시, 칠천량의 주변에 매복해 있던 일본 수군의 야습이 벌어진다. 이런 일을 염려하여 최호, 경상우수사 배설,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 대장들이 한결같이 칠천량 주둔을 반대했지만, 원균의 고집을 꺾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칠천량은 물이 얕아 크고 무거운 조선 판옥선은 움직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의 대부분 전함들이 이날 불에 타 바다에 가라앉는다. 1576년(선조 9) 무과에 장원급제했고, 함경도 병마사 등을 역임한 무장 최호도  이날 전사한다. 원균도 죽는다. 임진왜란 전체 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하게 , 그리고 최초로 당한 조선 수군의 패전, 그것이 바로 칠천량 전투이다.

▲ 충청수영성(오천성) 성문 ⓒ 정만진


하지만 오늘날 답사하는 오천성에서는 전쟁의 쓰라린 아픔과 눈물은 찾아보기 어렵고, 안내판의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 시대에는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장소로, 성내의 영보정(永保亭)이 유명했다'라는 대목만이 오롯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주변에 도시가 형성되지 않은 덕분에 바다와 인접한 강물은 자연의 빛깔 그대로이고, 작은 배들이 성벽 아래에 통통 떠 있는 풍경은 어부들의 고된 생활과는 아무 관련 없이 그저 낭만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성벽이 끝나는 곳에 강물이 있고, 강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있고, 바다가 끝나는 곳에 하늘이 있다. 판옥선도, 군사들의 고함과 비명도, 칼과 화살과 탄환이 부딪히고 깨지고 터지는 소리도, 그 어느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말 그대로 아름다운 한낮, 곱고 정겨운 고요가 옥빛 강물과 은빛 수평선, 그리고 연초록 논밭과 하얀 새털구름과 어우러져 평온한 날의 조선 시대 풍경을 되살려내고 있다.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는 최호 장군도 이곳 오천성에서 오늘같이 눈부신 평화를 즐겼으리라.

▲ 오천성 성곽 ⓒ 정만진

아직 당시 모습 잘 간직하고 있는 오천성

게다가 오천성은 지금도 지난 시대의 멋진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안내판은 '근대에 들어 도로 개설이나 호안 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 목적에 마련된 충청 지역 수군 지휘부로서 충청도의 수군 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 지역 해로(海路) 요처(要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이 해설에 가장 고개가 끄덕여지는 때는 '충청수영 진휼청(賑恤廳, 유형문화재 136호)' 건물 뒤편에서 성벽 위를 밟고 서는 순간이다. 이곳이 가장 직접적으로 강물을 내려보는 지점으로, 아찔하다. 다리가 아찔하고, 머리가 아찔하다. 내륙이나 대도시에서 사는 현대인으로서는 도무지 맛볼 수 없는, 바닷가 강변 성터에서만 눈에 담을 수 있는 아찔한 호사다.

그러고 보니, 진휼청 건물이 유난히 쓸쓸해 보인다. 안내판은 '조선 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영사(營舍)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이곳의 추정(推定) 진휼청을 비롯해 객사(客舍)와 삼문(三門)만이 남아 있다'라고 했다. 세월의 무게와 시대의 변화를 이기지 못해 다들 사라졌는데, 조선 시대에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곳'이었던 진휼청이 혼자 남아 오늘날에는 멀리서 온 나그네의 고적함을 달래주고 있다.

수영 폐지 이후 일반인 살림집으로 쓰였던 진휼청

충청수영은 1896년(고종 33)에 철폐되었다. 그 이후 진휼청은 일반 백성의 살림집인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들어 토지 및 건물을 매입, 보존되고 있다. 집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 온돌방, 툇마루, 부엌 등이 있다. 이 건물에 진휼청이라는 현판을 단 것은 정확하게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충청수영 고지도(古地圖) 등에 나타나 있는 건물 배치로 미루어 추정한 결과이다. 

▲ 충청수영성(오천성) 성내에 남아 있는,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건물 ⓒ 정만진


오천성을 둘러보았으니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421 일원의 '최호 장군 유지(遺址, 자취가 남아 있는 곳)'도 한 번쯤 찾을 일이다. 전라북도 기념물 32호인 이곳에는 최호 장군 사당과 묘소가 있다. 유지 입구 안내판의 해설문은 아래와 같다.

'충의사는 조선 선조 때의 무신 최호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최호는 선조 29년(1596)에 일어난 '이몽학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2등에 올랐으며, 정유재란(1597) 당시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을 무찌르다 전사했다. 구(舊)사당은 최호 장군의 후손 최호선(崔浩善)이 영조 5년(1729)에 세웠으며, 최호의 아버지 최한정(崔漢禎)과 최호의 아들과 손자인 최몽란(崔夢鸞), 최효설(崔孝說)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2001년 신(新)사당을 건립하여 최호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가 전사한 거제도 옆 칠천량 바다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최호 장군 유지'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다. 가 보자는 말이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도 있지만, 역사여행은 역시 눈으로 보아야 진짜다.

▲ '최호 장군 유지'의 최호 장군 부부 쌍묘가 군산 시내 쪽을 바라보며 나란히 누워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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