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동안 집권해도 '독재자' 소리 안 듣는 이유
[독일의 농부 11] 1500 농부의 사회적 자본, 슈베비쉬할 농민생산자조합
"설립 이후 30년 동안 단 한 번도 대표가 바뀌지 않았다고요? 창업자가 아직도 대표를 맡고 있다고요? 그건 협동조합의 이념과 가치에 안 어울리지 않나요? 어찌보면 1인 장기 집권 독재가 아닌가요?"
조합의 역사를 열심히 설명하던 홍보책임자 만(mann)씨에게 따지듯 물었다. 다소 무례하거나 도발적인 질문이었을 텐데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그런 질문을 한두 번 받아본 게 아니라는 듯, 예상했다는 듯, 전혀 동요하지 않는 표정과 말투로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우리 조합에 뷔러 회장 만한 신념과 지도력을 가진 리더가 없기 때문이에요. 조합원들도 물론 그를 그 만큼 신뢰하고 존경하고요. 설립 30년만에 1500명의 농민조합원, 1500억 원의 연간 매출액을 올리는 조합으로 성장한 데는 그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어요."
만씨는 온화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설명했으나, 목소리는 당당하고 단호했다.
"물론 그가 아직 대표직에 있기는 하지만 은퇴한 상태나 마찬가지예요.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워요. 물론 한푼의 보수도 지급되지 않아요. 조합원들이 쉬고 싶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죠. 이제 출근도 하지 않아요. 요즘은 본인 농장에서 돼지를 키우는 게 그가 주로 하는 일이죠."
그때, 예전에 메르켈 총리가 독일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독일 교포의 대답이 떠올랐다.
"그녀는 권위적이지 않고 합리적이다."
30년 장기 집권 지도자, 루돌프 뷔러 회장의 진실
조합의 창업자이자 독재자(?) 루돌프 뷔러(rudolf bühler)회장은 올해 64세다. 어쩌면 100세 인생 시대에 본인의 모든 것인 조합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은퇴하기에는 아직 젊다는 생각이 든다. 장기 집권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다. 어쨌든, 명예직이든 고문이든, 실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그런 형식적 요건이나 겉치레는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슈베비쉬할 농민생산자조합을 30년 넘게 이끌고 있다. 대체불가능한 조합의 최고지도자로 여겨진다.
뷔러 회장은 젊은 날부터 이웃과 사회에 대해 이타적이고 헌신적이었다. 오직 아프리카 등 제3세계 해외봉사에 삶을 바쳤다. 34살이 되던 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봉사 경험을 고향에서 펼쳐보고 싶었다. 1986년 돼지를 키우던 8명의 농부를 모아 조합을 세웠다. 그리고 30년 동안 영국의 찰스 황태자 등 세계 각국에서 다투어 견학을 올 정도의 성공신화를 일구었다.
뷔러 회장의 농업철학, 경영방침은 'Anti-GMO, Anti-항생제, Anti-집단사육 등 동물애호적 축산에 대한 철저한 신념과 원칙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이게 슈베비쉬할 생산자조합의 성장동력이자 지도력의 원천으로 평가받는다. 뷔러 회장으로부터 주식회사 같은 영리조직이든 협동조합 같은 비영리조직이든 어떤 사업조직이든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진리와 상식을 새삼 환기한다. 물론 지도자가 잘못하면 공동체조직은 얼마든지 망가질 수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공동체 구성원인 조합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협동할 수 있다면 되지 않나. 한 사람의 헌신적인 지도자로 인해 지역이 연대하고, 연대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닌가. 뷔러 회장은 바로 그런 이상적 지도자가 아닌가. 이같은 뷔러 회장 사례를 목격하면서 나는 그동안 책으로 익힌 오래된 편견 하나가 깨져나가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비록 보기에 모양은 좋지 않고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을 망정, 한 사람이 지도자를 몇 년을 하든 그게 무슨 대수인가. 경제든, 정치든 공동체조직이 건강하고 안정되게 지속발전가능할 수만 있다면 되는 것 아닌가. 그 결과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면 좋은 일 아닌가. 그게 바로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산인 '사회적 자본'의 진실이 아니겠는가.'
8명의 농부가 시작한 '슈베비쉬 할리쉬 돼지'의 성공신화
독일 남부 바덴-뷔템베르크주의 슈베비쉬 할(schwabisch Hal|) 농민 생산자조합(bäueriche erzeuger gemeinschft)의 성공사는 가히 신화적이다. 슈베비쉬 할(Schwäbisch Hall) 지역은 인구 3만6천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목가적 도시이나, 농민생산자조합 본부가 자리잡은 볼퍼츠 하우젠(bolpertshausen)마을 때문에 전국적인 농업의 명소가 됐다. 부설 호헨로에 지역농민시장(hohenlohe regional markt)도 유기농 직판장으로 명성이 드높다.
애초 조합의 설립 목적 자체부터 농업의 규모화나 기업화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지속가능한 농업이었다. 1980년대 초반, 멸종 위기의 재래종 돼지였던 '슈베비쉬 할리쉬종' 지역특산 돼지를 되살리자는 데 몇 명의 농부들이 뜻을 모았다. 비계가 두꺼운 특성을 가진 그 돼지를 상인들이 사가지 않자 고민하던 농민들이 자구책으로 직접 직판을 시작한 것이다.
이어 1986년 '돼지육종협회'를 본격 설립했다. 당시 불과 8명의 조합원이 모였을 뿐이다. 1988년에는 마침내 농민조합으로 발전했다. 이후 조합의 성공신화를 쓰기 시작한다. 2000년에 조합도축장 자체 설립하고 2007년에는 호헨로에 지역농민시장을 개장했다.
특히 2011년 소시지 공장을 설립한 건 조합의 성장사에 중요한 전기를 제공한다. 이때 설립 자금 6백만 유로 가운데 100만 유로를 정부에서 지원받은 게 성장의 탄력을 얻는 데 큰 힘이 됐다. 이를 계기로 지역 뿐 아니라 독일 전역을 대상으로 농식품을 판매하게 되면서 안정경영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30년 넘게 줄기차게 양적, 질적 성장을 거듭한 조합은 2014년말 현재 1450명 생산자 조합원의 규모로 성장했다. 연간 매출은 1억200만 유로(약 1285억4346만 원)에 달한다. 조합원 가운데 35%는 유기농가이다. 조합에 기업농은 가입할 수 없고 오직 가족농 생산자만 가입이 가능하다. 가입하려는 생산자들이 줄을 잇지만 조합 가입요건이 A4지 10장 정도일 정도로 문턱이 높다. 아무나 조합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되살아난 슈베비쉬 할리쉬 돼지가 지역사회를 살려
협동조합의 7원칙에 나와있는대로 협동조합답게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지역에 기여하려는 사업철학과 전략도 확고하다. EU의 지리적 원산지 증명을 받은 지역특산 '슈베비쉬 할리쉬' 전통품종을 되살리면서 지역 전체의 경기도 살아났다. 조합은 호헨로에와 슈베비쉬 할 두 지역 관공서는 물론 농민조합과 지역관광업체가 상호 협력, 지역관광산업을 촉진하는 역할까지 감당하고 있다. 지역고용 창출 효과는 물론이다.
무엇보다 생산자조합 본연의 역할을 철저히 명심하고 실천하고 있다. 조합원인 농민들의 협력과 공생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사고하고 행동한다. 농촌과 지역의 고유 문화, 전통, 미풍양속도 유지하려 노력한다. 유기 순환농업을 통해 생태적 다양성을 보전하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적 공동체로서 청년들의 미래가 열리는 희망찬 농촌공간을 확보하는 데도 앞장 선다.
또 슈베비쉬 할 농민생산자조합은 조합과 별도로 주식회사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공장의 운영주체인 주식회사를 따로 설립, 생산자조합에서 고기를 수매해 세금문제 등을 원활히 해결하고 있다. 자체 도축장(schlachhof), 소시지 가공장, 농민시장 등 1차 생산에서 2차 가공, 3차 직거래 유통에 이르는 이른바 6차산업화 과정을 내부 계열화하는 것도 효과적인 사업수행 전략으로 삼고 있다. 명분이나 원칙에만 매달리지 않는 사업전략도 유연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특히 2007년에 개장한 호헨로에 로컬푸드 지역농민시장의 성과는 두드러진다. 총면적 950㎡의 농민시장에서는 4000여 종류의 로컬푸드를 직거래 판매하고 있다. 인근 생태마을 볼퍼츠 하우젠(bolpertshausen)의 축산농가들이 생산하는 바이오가스 열병합 발전기의 열, 지열 등을 활용해 건물을 난방하고 있다. 로컬푸드 레스토랑, 허브가든, 빵가게, 지역여행사, 어린이 놀이터, 태양광발전소 등 복합시설도 함께 운영한다.
로컬푸드를 넘어 '돈 많은 독일부자'들의 최우량 식자재로
지역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조합의 영업권과 위세는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남부 독일에만 8개 지역직판장(bauernmarkt S.H.)을 운영하고 350여 유기농 전문매장에 조합의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홍보책임자 만씨는 "특히 '돈 많은 부자'들이 조합의 제품을 좋아한다"고 자랑한다. 독일의 고급호텔, 유명레스토랑, 최고기업 식자재, 루프트한자 기내식, 벤츠 구내식당 등 최우량 식자재로 대우받고 있다는 것이다.
2013년엔 본인도 유기농가라고 주장하는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견학을 왔다. 그만큼 슈베비쉬 할 생산자조합의 성가와 경쟁력은 국내외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입을 모으는 성공비결은 생산제품의 품질이 우수하다는 점이다. 조합에 고용된 전문 기술지도사들이 수시로 생산자를 컨설팅하며 품질을 상향평준화한 결과다. 유럽연합 최고 등급의 유기농 인증서 '외코테스트(Oekotest)'를 비롯해 Non-GMO 인증, 국제 표준규격, 독일농민협회(DLG) 골드라벨 인증 등 다양한 인증서를 보유하고 있다.
지역에서 생산할 수 없는 양념류(향신료)는 루마니아, 세르비아, 인도, 잠비아 등의 생산지에서 현장 기술지도를 해서 유기농 생산한 것만 공수해 사용한다. 인산염 등은 유해 식품첨가물은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원산지 스페인 처럼 도토리만 먹여서 키운 이베리코 돼지로 하몽(Jamon, 염장 건조 생햄)을 생산하기도 한다.
조합에 대한 조합원들의 신뢰와 지지는 전폭적이다. 가격이 하락된 우유 등 원재료 농산물을 2배 이상 값을 쳐주는 등 상대적으로 고가로 구입해준다. '돈 놓고 돈 먹는' 출자금 연동 배당보다는 넉넉한 납품 결제대금으로 회원농가에게 고수익을 바로 '현금'으로 돌려주고 전략이다.
그 결과, 매년 1500억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는 데 고작 7만유로 정도만 조합의 잉여이익금으로 남길 뿐이다. 슈베비쉬 할 농민생산자조합은 지역의 가족농에게는 '든든한 비빌 언덕이자 안전한 둥지'로서 일종의 사회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초리넝쿨마을을 되살릴 '무주초리넝쿨마을협동조합'
마을연구소(Commune Lab)가 리빙랩(Living Lab)처럼 자리잡고 있는 무주의 초리넝쿨마을도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큰 숙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마을주민들과 함께 먹고 살 수 있을지" 주로 연구하고 있다. 다행히도 초리넝쿨마을은 녹색농촌체험마을, 전북 향토산업마을로 조성된 체험센터, 펜션, 공동식당 등의 시설과 공간을 보유하고 있다. 여느 농촌마을들처럼 방치해서 유휴시설화되기 전에 재활용, 재생하려고 한다.
다만 초리마을 주민은 물론, 적상면민, 무주군민, 나아가 인접한 충청도와 경상도의 사람들까지 어울리는 일종의 '생활문화복지 커뮤니티 센터'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마을공동시설도 관리하고 마을공동체사업도 경영할 책임주체로서로서 '무주초리넝쿨마을협동조합'부터 만들었다. 그리고 '마을Cafe초리(初里)' 간판도 보란듯이 걸어두었다. 나름대로는 새로운 마을공동체사업의 차원과 지평을 열어보려는 시도다.
일단 '마을Cafe초리'는 '마을학교 초리'가 중심이다. 그림 그리기, 글 쓰기, 책 짓기, 노래 부르기, 농사 짓기 등을 서로 가르치고 배울 예정이다. '마을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토론하는 마을학개론이나, 나아가 국가와 지역, 국가와 사회가 돌아가는 이치를 따져보는 '사회학 교실'도 궁리 중이다. 여기에 칡떡, 칡칼국수, 칡효소, 으름꽃차, 으름효소 등 마을을 상징하는 이미지와 브랜드인 '넝쿨식물'을 이용한 마을특산품도 개발하고 있다.
또 마을과 지역의 유기농 로컬푸드 농산물과 먹거리를 직거래로 나누는 '마을가게초리', '이야기가 있는 그림문패', '통나무가구' 등을 만드는 '마을공방초리'도 빼놓을 수 없다. 이어서 마을도서관, 마을사랑방, 나아가 지역커뮤니티 허브로서의 역할과 기능이 자꾸 '칡넝쿨'이나 '등나무넝쿨'처럼 엮이는 퍼져나가는 '혁신적인 갈등(葛藤)구조'가 창조되기를 소망한다.
마을과 지역, 도시와 농촌이 함께 먹고사는 협동조합
마침내 이같은 마을공동체사업의 끝에는 부디 '마을양로원(공동생활주택)'이 놓였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 이미 노인공화국으로 변한 모든 농촌마을의 공통된 숙원사업이라 할 수 있다. 마을 안에서 평생 생활한 마을사람들이 늙고 병들어 마을 밖의 요양원 같은 곳으로 내몰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장 편하고 안전한 마을 안에서 여생을 보내다 '웰다잉(Welldying)'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마을사업이 발전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마을 대표, 사무장, 부녀회장, 노인회장 등이 '월급받는 마을공동체사업 일꾼'으로 거듭났으면 한다. 농사로 턱없이 모자란 소득을 채우기 위해 외지로 품을 팔러 돌아다니는 소농, 영세농으로서 고달프고 불안한 생활을 이제 그만 두었으면 한다.
보다 본질적으로 마침내 '마을 기본소득 또는 마을공동체사업 주민배당'을 농가당 매달 몇십만 원씩이라도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정부나 정치가 못하면 초리넝쿨마을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그 정도는 할 수있기를 소망한다. 그래야 비로소 '일과 삶과 놀이'가 하나되는 '초리넝쿨마을 생활공동체'는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니어링 부부처럼 하루 4시간 일하고, 4시간은 배우고, 4시간은 노는 '조화로운 삶(Good Life)'을 '가진 자', '놀고 먹는 자'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초리넝쿨마을 주민들도, 한국의 농민들도 얼마든지 꿈꾸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독일의 슈베비쉬 할 농민생산자조합처럼, 농민들의 생산자 협동조합, 농촌지역주민들의 생활문화 협동조합, 그리고 도시의 소비자와 농촌의 생산자가 서로 상생하고 연대하는 공동체 협동조합이 그 열쇠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조합의 역사를 열심히 설명하던 홍보책임자 만(mann)씨에게 따지듯 물었다. 다소 무례하거나 도발적인 질문이었을 텐데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그런 질문을 한두 번 받아본 게 아니라는 듯, 예상했다는 듯, 전혀 동요하지 않는 표정과 말투로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우리 조합에 뷔러 회장 만한 신념과 지도력을 가진 리더가 없기 때문이에요. 조합원들도 물론 그를 그 만큼 신뢰하고 존경하고요. 설립 30년만에 1500명의 농민조합원, 1500억 원의 연간 매출액을 올리는 조합으로 성장한 데는 그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어요."
만씨는 온화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설명했으나, 목소리는 당당하고 단호했다.
"물론 그가 아직 대표직에 있기는 하지만 은퇴한 상태나 마찬가지예요.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워요. 물론 한푼의 보수도 지급되지 않아요. 조합원들이 쉬고 싶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죠. 이제 출근도 하지 않아요. 요즘은 본인 농장에서 돼지를 키우는 게 그가 주로 하는 일이죠."
그때, 예전에 메르켈 총리가 독일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독일 교포의 대답이 떠올랐다.
"그녀는 권위적이지 않고 합리적이다."
30년 장기 집권 지도자, 루돌프 뷔러 회장의 진실
▲ 슈베비쉬 할 1,500명의 농민이 모여 일군 슈베비쉬 할 농민생산자조합 ⓒ 정기석
조합의 창업자이자 독재자(?) 루돌프 뷔러(rudolf bühler)회장은 올해 64세다. 어쩌면 100세 인생 시대에 본인의 모든 것인 조합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은퇴하기에는 아직 젊다는 생각이 든다. 장기 집권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다. 어쨌든, 명예직이든 고문이든, 실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그런 형식적 요건이나 겉치레는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슈베비쉬할 농민생산자조합을 30년 넘게 이끌고 있다. 대체불가능한 조합의 최고지도자로 여겨진다.
뷔러 회장은 젊은 날부터 이웃과 사회에 대해 이타적이고 헌신적이었다. 오직 아프리카 등 제3세계 해외봉사에 삶을 바쳤다. 34살이 되던 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봉사 경험을 고향에서 펼쳐보고 싶었다. 1986년 돼지를 키우던 8명의 농부를 모아 조합을 세웠다. 그리고 30년 동안 영국의 찰스 황태자 등 세계 각국에서 다투어 견학을 올 정도의 성공신화를 일구었다.
뷔러 회장의 농업철학, 경영방침은 'Anti-GMO, Anti-항생제, Anti-집단사육 등 동물애호적 축산에 대한 철저한 신념과 원칙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이게 슈베비쉬할 생산자조합의 성장동력이자 지도력의 원천으로 평가받는다. 뷔러 회장으로부터 주식회사 같은 영리조직이든 협동조합 같은 비영리조직이든 어떤 사업조직이든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진리와 상식을 새삼 환기한다. 물론 지도자가 잘못하면 공동체조직은 얼마든지 망가질 수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공동체 구성원인 조합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협동할 수 있다면 되지 않나. 한 사람의 헌신적인 지도자로 인해 지역이 연대하고, 연대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닌가. 뷔러 회장은 바로 그런 이상적 지도자가 아닌가. 이같은 뷔러 회장 사례를 목격하면서 나는 그동안 책으로 익힌 오래된 편견 하나가 깨져나가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비록 보기에 모양은 좋지 않고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을 망정, 한 사람이 지도자를 몇 년을 하든 그게 무슨 대수인가. 경제든, 정치든 공동체조직이 건강하고 안정되게 지속발전가능할 수만 있다면 되는 것 아닌가. 그 결과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면 좋은 일 아닌가. 그게 바로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산인 '사회적 자본'의 진실이 아니겠는가.'
8명의 농부가 시작한 '슈베비쉬 할리쉬 돼지'의 성공신화
▲ 호헨로에 4,000종의 유기농 로컬푸드를 직판하는 호헨로에 지역농민시장 ⓒ 정기석
독일 남부 바덴-뷔템베르크주의 슈베비쉬 할(schwabisch Hal|) 농민 생산자조합(bäueriche erzeuger gemeinschft)의 성공사는 가히 신화적이다. 슈베비쉬 할(Schwäbisch Hall) 지역은 인구 3만6천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목가적 도시이나, 농민생산자조합 본부가 자리잡은 볼퍼츠 하우젠(bolpertshausen)마을 때문에 전국적인 농업의 명소가 됐다. 부설 호헨로에 지역농민시장(hohenlohe regional markt)도 유기농 직판장으로 명성이 드높다.
애초 조합의 설립 목적 자체부터 농업의 규모화나 기업화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지속가능한 농업이었다. 1980년대 초반, 멸종 위기의 재래종 돼지였던 '슈베비쉬 할리쉬종' 지역특산 돼지를 되살리자는 데 몇 명의 농부들이 뜻을 모았다. 비계가 두꺼운 특성을 가진 그 돼지를 상인들이 사가지 않자 고민하던 농민들이 자구책으로 직접 직판을 시작한 것이다.
이어 1986년 '돼지육종협회'를 본격 설립했다. 당시 불과 8명의 조합원이 모였을 뿐이다. 1988년에는 마침내 농민조합으로 발전했다. 이후 조합의 성공신화를 쓰기 시작한다. 2000년에 조합도축장 자체 설립하고 2007년에는 호헨로에 지역농민시장을 개장했다.
특히 2011년 소시지 공장을 설립한 건 조합의 성장사에 중요한 전기를 제공한다. 이때 설립 자금 6백만 유로 가운데 100만 유로를 정부에서 지원받은 게 성장의 탄력을 얻는 데 큰 힘이 됐다. 이를 계기로 지역 뿐 아니라 독일 전역을 대상으로 농식품을 판매하게 되면서 안정경영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30년 넘게 줄기차게 양적, 질적 성장을 거듭한 조합은 2014년말 현재 1450명 생산자 조합원의 규모로 성장했다. 연간 매출은 1억200만 유로(약 1285억4346만 원)에 달한다. 조합원 가운데 35%는 유기농가이다. 조합에 기업농은 가입할 수 없고 오직 가족농 생산자만 가입이 가능하다. 가입하려는 생산자들이 줄을 잇지만 조합 가입요건이 A4지 10장 정도일 정도로 문턱이 높다. 아무나 조합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되살아난 슈베비쉬 할리쉬 돼지가 지역사회를 살려
협동조합의 7원칙에 나와있는대로 협동조합답게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지역에 기여하려는 사업철학과 전략도 확고하다. EU의 지리적 원산지 증명을 받은 지역특산 '슈베비쉬 할리쉬' 전통품종을 되살리면서 지역 전체의 경기도 살아났다. 조합은 호헨로에와 슈베비쉬 할 두 지역 관공서는 물론 농민조합과 지역관광업체가 상호 협력, 지역관광산업을 촉진하는 역할까지 감당하고 있다. 지역고용 창출 효과는 물론이다.
무엇보다 생산자조합 본연의 역할을 철저히 명심하고 실천하고 있다. 조합원인 농민들의 협력과 공생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사고하고 행동한다. 농촌과 지역의 고유 문화, 전통, 미풍양속도 유지하려 노력한다. 유기 순환농업을 통해 생태적 다양성을 보전하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적 공동체로서 청년들의 미래가 열리는 희망찬 농촌공간을 확보하는 데도 앞장 선다.
또 슈베비쉬 할 농민생산자조합은 조합과 별도로 주식회사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공장의 운영주체인 주식회사를 따로 설립, 생산자조합에서 고기를 수매해 세금문제 등을 원활히 해결하고 있다. 자체 도축장(schlachhof), 소시지 가공장, 농민시장 등 1차 생산에서 2차 가공, 3차 직거래 유통에 이르는 이른바 6차산업화 과정을 내부 계열화하는 것도 효과적인 사업수행 전략으로 삼고 있다. 명분이나 원칙에만 매달리지 않는 사업전략도 유연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특히 2007년에 개장한 호헨로에 로컬푸드 지역농민시장의 성과는 두드러진다. 총면적 950㎡의 농민시장에서는 4000여 종류의 로컬푸드를 직거래 판매하고 있다. 인근 생태마을 볼퍼츠 하우젠(bolpertshausen)의 축산농가들이 생산하는 바이오가스 열병합 발전기의 열, 지열 등을 활용해 건물을 난방하고 있다. 로컬푸드 레스토랑, 허브가든, 빵가게, 지역여행사, 어린이 놀이터, 태양광발전소 등 복합시설도 함께 운영한다.
▲ 찰스황태자조합을 방문한 찰스황태자와 류돌프 뷔러 회장 ⓒ 정기석
로컬푸드를 넘어 '돈 많은 독일부자'들의 최우량 식자재로
지역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조합의 영업권과 위세는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남부 독일에만 8개 지역직판장(bauernmarkt S.H.)을 운영하고 350여 유기농 전문매장에 조합의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홍보책임자 만씨는 "특히 '돈 많은 부자'들이 조합의 제품을 좋아한다"고 자랑한다. 독일의 고급호텔, 유명레스토랑, 최고기업 식자재, 루프트한자 기내식, 벤츠 구내식당 등 최우량 식자재로 대우받고 있다는 것이다.
2013년엔 본인도 유기농가라고 주장하는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견학을 왔다. 그만큼 슈베비쉬 할 생산자조합의 성가와 경쟁력은 국내외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입을 모으는 성공비결은 생산제품의 품질이 우수하다는 점이다. 조합에 고용된 전문 기술지도사들이 수시로 생산자를 컨설팅하며 품질을 상향평준화한 결과다. 유럽연합 최고 등급의 유기농 인증서 '외코테스트(Oekotest)'를 비롯해 Non-GMO 인증, 국제 표준규격, 독일농민협회(DLG) 골드라벨 인증 등 다양한 인증서를 보유하고 있다.
지역에서 생산할 수 없는 양념류(향신료)는 루마니아, 세르비아, 인도, 잠비아 등의 생산지에서 현장 기술지도를 해서 유기농 생산한 것만 공수해 사용한다. 인산염 등은 유해 식품첨가물은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원산지 스페인 처럼 도토리만 먹여서 키운 이베리코 돼지로 하몽(Jamon, 염장 건조 생햄)을 생산하기도 한다.
조합에 대한 조합원들의 신뢰와 지지는 전폭적이다. 가격이 하락된 우유 등 원재료 농산물을 2배 이상 값을 쳐주는 등 상대적으로 고가로 구입해준다. '돈 놓고 돈 먹는' 출자금 연동 배당보다는 넉넉한 납품 결제대금으로 회원농가에게 고수익을 바로 '현금'으로 돌려주고 전략이다.
그 결과, 매년 1500억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는 데 고작 7만유로 정도만 조합의 잉여이익금으로 남길 뿐이다. 슈베비쉬 할 농민생산자조합은 지역의 가족농에게는 '든든한 비빌 언덕이자 안전한 둥지'로서 일종의 사회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 마을카페 ‘무주초리넝쿨마을협동조합’이 열고 꾸리는 ‘마을카페 초리’ ⓒ 정기석
초리넝쿨마을을 되살릴 '무주초리넝쿨마을협동조합'
마을연구소(Commune Lab)가 리빙랩(Living Lab)처럼 자리잡고 있는 무주의 초리넝쿨마을도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큰 숙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마을주민들과 함께 먹고 살 수 있을지" 주로 연구하고 있다. 다행히도 초리넝쿨마을은 녹색농촌체험마을, 전북 향토산업마을로 조성된 체험센터, 펜션, 공동식당 등의 시설과 공간을 보유하고 있다. 여느 농촌마을들처럼 방치해서 유휴시설화되기 전에 재활용, 재생하려고 한다.
다만 초리마을 주민은 물론, 적상면민, 무주군민, 나아가 인접한 충청도와 경상도의 사람들까지 어울리는 일종의 '생활문화복지 커뮤니티 센터'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마을공동시설도 관리하고 마을공동체사업도 경영할 책임주체로서로서 '무주초리넝쿨마을협동조합'부터 만들었다. 그리고 '마을Cafe초리(初里)' 간판도 보란듯이 걸어두었다. 나름대로는 새로운 마을공동체사업의 차원과 지평을 열어보려는 시도다.
일단 '마을Cafe초리'는 '마을학교 초리'가 중심이다. 그림 그리기, 글 쓰기, 책 짓기, 노래 부르기, 농사 짓기 등을 서로 가르치고 배울 예정이다. '마을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토론하는 마을학개론이나, 나아가 국가와 지역, 국가와 사회가 돌아가는 이치를 따져보는 '사회학 교실'도 궁리 중이다. 여기에 칡떡, 칡칼국수, 칡효소, 으름꽃차, 으름효소 등 마을을 상징하는 이미지와 브랜드인 '넝쿨식물'을 이용한 마을특산품도 개발하고 있다.
또 마을과 지역의 유기농 로컬푸드 농산물과 먹거리를 직거래로 나누는 '마을가게초리', '이야기가 있는 그림문패', '통나무가구' 등을 만드는 '마을공방초리'도 빼놓을 수 없다. 이어서 마을도서관, 마을사랑방, 나아가 지역커뮤니티 허브로서의 역할과 기능이 자꾸 '칡넝쿨'이나 '등나무넝쿨'처럼 엮이는 퍼져나가는 '혁신적인 갈등(葛藤)구조'가 창조되기를 소망한다.
▲ 초리넝쿨마을협동조합이 마을공동체사업을 책임지는 초리넝쿨마을 ⓒ 정기석
마을과 지역, 도시와 농촌이 함께 먹고사는 협동조합
마침내 이같은 마을공동체사업의 끝에는 부디 '마을양로원(공동생활주택)'이 놓였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 이미 노인공화국으로 변한 모든 농촌마을의 공통된 숙원사업이라 할 수 있다. 마을 안에서 평생 생활한 마을사람들이 늙고 병들어 마을 밖의 요양원 같은 곳으로 내몰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장 편하고 안전한 마을 안에서 여생을 보내다 '웰다잉(Welldying)'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마을사업이 발전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마을 대표, 사무장, 부녀회장, 노인회장 등이 '월급받는 마을공동체사업 일꾼'으로 거듭났으면 한다. 농사로 턱없이 모자란 소득을 채우기 위해 외지로 품을 팔러 돌아다니는 소농, 영세농으로서 고달프고 불안한 생활을 이제 그만 두었으면 한다.
보다 본질적으로 마침내 '마을 기본소득 또는 마을공동체사업 주민배당'을 농가당 매달 몇십만 원씩이라도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정부나 정치가 못하면 초리넝쿨마을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그 정도는 할 수있기를 소망한다. 그래야 비로소 '일과 삶과 놀이'가 하나되는 '초리넝쿨마을 생활공동체'는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니어링 부부처럼 하루 4시간 일하고, 4시간은 배우고, 4시간은 노는 '조화로운 삶(Good Life)'을 '가진 자', '놀고 먹는 자'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초리넝쿨마을 주민들도, 한국의 농민들도 얼마든지 꿈꾸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독일의 슈베비쉬 할 농민생산자조합처럼, 농민들의 생산자 협동조합, 농촌지역주민들의 생활문화 협동조합, 그리고 도시의 소비자와 농촌의 생산자가 서로 상생하고 연대하는 공동체 협동조합이 그 열쇠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덧붙이는 글
※ ‘독일의 농부’ : 문화경관 직불금, 농업회의소, 협동조합, 가족농가, 유기농업, 사회안전망 등으로 국가와 정부의 돌봄과 보살핌을 받으며, ‘돈 버는 농업’이 아닌 ‘사람 사는 농촌’을 위한 ‘농부의 나라’를 지키며 살아가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 EU(유럽연합)의 ‘행복한 사회적 농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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