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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이 줄곧 이긴 네 가지 이유

[아산 현충사 꼼꼼하게 둘러보기 ①] 판옥선, 화포, 거북선, 이순신의 전략

등록|2017.01.09 11:07 수정|2017.01.09 11:07

▲ 현충사 정문, 문 창틀 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현충사는 언제나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 정만진


아산 현충사는 언제나 찾아오는 '국(國)'민들로 붐빈다. 명승 고적이 있는 곳도 아니고, 특별한 향토 음식을 공급하는 유명 식당가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많은 답사자들로 북적이는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 나라(國)를 위해 온몸을 불사르다 타계한 임진왜란 구국(國)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인물 덕분에, 이곳은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흔적이 서려 있는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었다. 사당이나 옛집 등 어느 한 건물이나 활터 같은 특정 지점만이 아니라 현충사 경내 전체가 문화재라는 말이다. 현충사 경내는 당당한 문화재로서, 국가 사적 155호라는 이름표를 가지고 있다.

현충사 경내 전체가 국가 사적

그런 까닭에, 현충사 주차장에 들어서면 '아산 이충무공 유허' 안내판이 맨 먼저 나그네를 맞이한다. 사당을 의미하는 '현충사'가 아니라 이순신의 자취가 서린 곳을 뜻하는 '이충무공 유허'이다. 안내판의 글도 그런 취지로 쓰여 있다. 현충사를 방문한 적은 있지만 안내판을 읽은 기억이 없는 이들을 위하여, 또는 아직 현충사에 가보지 못한 분들을 위하여 여기 전문을 옮겨본다. 

▲ 현충사의 외삼문인 충무문 ⓒ 정만진


'이곳 백암리 방화산 기슭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이 혼인하여 살던 옛집과 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는 곳이다. 충무공은 이곳에서 십년 간 무예를 연마하여 서른두 살 되던 해(1576년, 선조 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충무공이 순국하신 지 108년이 지난 1706년(숙종 32), 이곳에 공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1707년 숙종 임금이 현충사(顯忠祠)라 사액하였다. 그 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되었으나 일제 시대인 1932년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온 겨레의 정성으로 사당을 다시 세웠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매년 4월 28일에 온 국민의 뜻으로 탄신제전을 올려 공을 추모하였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공의 위업을 기리고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 사업을 시행하였으며 2008년부터 2011년까지 현충사 유적 정비 사업을 통해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안내판은 현충사를 찾은 나그네가 반드시 둘러보아야 할 네 곳을 말해주고 있다. 옛집, 사당, 그리고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바로 그 네 곳이다. 세 곳을 말하고 네 곳이라고 쓰는 것은 사당이 1932년에 세워진 구(舊)사당과, 1967년에 건립된 신(新)사당, 그렇게 두 곳 있는 까닭이다. 두 사당 앞에 가면 구 사당은 '구(舊)본전', 신사당은 '본전'으로 이름 붙여져 있다.

현충사에서 꼭 봐야 할 네 곳은 구 사당, 신 사당, 옛집, 충무공이순신기념관  

그 외 다른 곳까지 모두 아우르되, 결코 우왕좌왕할 일 없도록 안내하는 현충사 경내 답사 여정을 짠다. ①충무공이순신기념관 ②복제품 타루비 ③외삼문 충무문 ④구본전 ⑤내삼문 충의문 ⑥본전 ⑦이순신 가족 우물 충무정 ⑧충무공 옛집 ⑨이순신 활쏘기 연습장 활터 ⑩이순신 막내아들 이면 묘소 ⑪정려!

▲ 현충사 내 충무공이순신기념관 ⓒ 정만진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임진왜란과 조선 수군'부터 읽는다. 이순신이 실제로는 약 22년의 군인 생활 중 육군과 수군으로 각각 절반인 11년씩 지냈지만, 그저 수군 대장으로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수군 대장이었기에 조선은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고, 1910년보다 318년 전인 1592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참사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모두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정조가 직접 이순신의 신도비 비문을 쓰면서 "선조대왕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는 오직 충무공 한 사람의 힘에 의한 것(維忠武一人之力)"이라고 찬양한 사례가 있으니 결코 지나친 과장도 아니리라.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정복 야욕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무려 7년을 끌며 조선에 큰 피해를 주었다. 전쟁 초기에 조선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밀려 불과 20일만에 한양이 점령되고 말았다. 임금은 멀리 의주까지 피란을 가고 전 국토의 70%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조선은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남해 바다 곳곳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조선 수군의 화포와 판옥선은 일본 수군의 조총과 군선을 압도하였다. 여기에 거북선을 만들고 탁월한 전술을 펴나간 이순신의 지도력으로 조선 수군은 전쟁 기간 내내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은 서해를 돌아 한양으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을 막음으로써 곡창 지대인 호남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수군의 승리는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요약하면,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나라를 구한 가장 큰 힘이었다!

▲ 충무공이순신기념과에 게시되어 있는 판옥선 그림 ⓒ 현충사


'임진왜란과 조선 수군' 게시물은 아군의 승리 요인으로 화포, 판옥선, 거북선, 이순신의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안에 걸려 있는 다른 게시물들을 통해 그 넷을 하나 하나 살펴본다. 이곳에 들어온 목적을 이루자는 뜻이다. 역사적 인물을 찾는 여행에서는 기념관 또는 유품 전시관 등의 내부를 성심껏 둘러보는 것이 최고의 관광이자 학습이다.

게시물 '주요 해전'에 따르면 조선 수군은 1592년 5월 7-8일에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5월 29일-6월 7일에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7월 8-10일에 한산도, 안골포에서, 9월 1일에 부산포에서, 1597년 9월 16일에 명량에서, 1598년 11월 18일-19일에 노량에서 큰 전투를 치렀다. 게시물은 단지 한 곳, 1597년 7월 16일에 칠천량에서 벌어진 조선 수군 최대의 참패만 생략하고 있다. 그 무렵 이순신은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백의종군 중이었고,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칠천량 전투를 총지휘한 장수는 원균이었으므로 '충무공이순신기념관'과는 직접 관계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의종군과 명량대첩' 게시물도 이에 대해 가벼운 설명을 해준다.

'1597년 2월 이순신은 조정의 출동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서울로 압송되어 옥에 갇혔다. 4월에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풀려났지만 곧 어머니를 여의는 슬픔을 겪었다. 이 때 일본의 재침략으로 7월 16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패전하자 이순신은 7월 23일 다시 통제사로 임명되어 흩어진 조선 수군을 일으켜 세웠다. 9월 16일 명량에서 불과 13척으로 133척의 일본 전선을 상대로 싸워 기적 같은 승리로 다시 나라를 구하게 되었다.'

현충사 본전현충사에서는 구사당(구본전), 신사당(본전), 옛집,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꼭 둘러보아야 한다. 사진은 그 중 하나인 본전이다. ⓒ 정만진


이순신이 선조의 출동 명령을 거부했다? 1596년 12월 4일, 김응서의 장계가 선조에게 도착한 것이 발단이었다. 김응서는 일본군 2군사령관 가등청정(加籐淸正, 가토 기요마사)을 죽일 수 있게 됐다고 보고했다. 1597년 1월 1일, 선조는 대신들에게 "일이 성공하면 통제사(이순신)와 경상우병사(김응서)를 1등공신으로 삼겠소" 하고 말했다.

김응서가 선조에게 올린 보고는 일본군 1군사령관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에게서 받은 정보였다. 소서행장과 가등청정 두 사람은 극도로 사이가 나빴는데, 이는 조선에서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소서행장의 말을 선조도 김응서도 믿었던 것이다.

소서행장에게 속는 선조, 속지 않는 이순신

소서행장은 가등청정이 1월 중순에 일본에서 건너오는데, 막강한 조선 수군이 바다 가운데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습 공격을 하면 충분히 그를 죽일 수 있다고 했다. 강력한 주전파(主戰派, 전쟁을 하자는 세력)가 사라지고 나면 주화파(主和派, 평화를 주장하는 세력)인 자신이 임진왜란을 끝내겠다고 했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부산 앞바다로 출정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선조의 지시를 거부했다. 선조의 명령 문서가 계속 내려왔지만 끝내 듣지 않았고, 도원수 권율이 직접 왕명을 들고 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사이 가등청정은 무사히 부산포에 상륙했다.

현충사 구본전현충사에서는 구사당(구본전), 신사당(본전), 옛집,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꼭 둘러보아야 한다. 사진은 그 중 하나인 구본전(구사당)이다. ⓒ 정만진


이순신은 소서행장의 제안이 속임수라고 판단했다. 당시 경상도의 남해안 일대는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부산포에서 나오는 일본 수군과, 지금의 진해, 창원, 마산, 가덕도 등지에서 배를 타고 나온 일본 육군 가운데에 스스로 포위되는 행위였다. 조선 수군을 모두 죽이고, 조선 전함을 남김없이 불살라 물속에 집어넣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래서 왕명조차도 이순신은 거부했던 것이다.

선조는 분노했다. 1월 23일, 선조는 "왜추(倭酋, 소서행장)가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해내지 못했다. 우리나라야말로 참으로 용렬한 나라다. 우리나라는 왜추보다도 못하다"면서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한산도의 장수'는 이순신이었다. 2월 6일, 선조는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라고 선포했다. 3월 4일, 이순신은 마침내 한양으로 끌려와 감옥에 갇혔다.

현충사 경내 이순신 고택현충사에서는 구사당(구본전), 신사당(본전), 옛집,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꼭 둘러보아야 한다. 사진은 그 중 하나인 옛집(이순신 고택)이다. ⓒ 정만진


그리고 7월 16일, 칠천량 해전이 벌어졌다. 부산 앞바다로 출정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다가 도원수 권율에게 끌려가 매질까지 당한 원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부산까지 갔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칠천량으로 회군했는데, 남해안 일대 왜성에서 줄곧 지켜보던 왜군들은 곳곳에 군대를 잠복시킨 후 밤에 기습을 했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이 전투에서 10여 척을 제외한 조선 수군 보유 판옥선 모두를 잃었다. 약간 명의 생존자를 제외한 대부분 장졸들도 이날 전몰했다. 어렵사리 육지로 올라왔던 원균은 매복한 채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충청수사 최호,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 맹장들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간신히 끌고 탈출한 10여 척 판옥선이 살아남은 조선 수군의 모두였다. 그 10여 척 판옥선이 바로 '백의종군과 명량대첩'의 마지막 부분, 즉 '9월 16일 명량에서 불과 13척으로 133척의 일본 전선을 상대로 싸워 기적 같은 승리로 다시 나라를 구하게 되었다'라는 표현에 등장하는 13척 바로 그 전함들인 것이다.

칠천량 패전으로 거의 무너진 조선 수군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계속 격파해낼 수 있었던 근거 중 한 가지가 전함의 우수성에 있다고 했다.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과 돌격선인 거북선이 일본군의 전함들보다 전투력에서 훨씬 뛰어났다는 뜻이다. 두 나라 전함의 특징과 상대적 장·단점을 살펴본다.

일본 군선(軍船, 전함)은 주로 삼나무와 전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이 나무들은 소나무에 비해 가공하기가 쉬워 판재를 얇게 만들 수 있어 배가 가볍고 빨랐다. 그러나 선체가 얇고 판재가 약해 무거운 대형 화포를 실을 수 없었고 조선의 군선과 부딪혔을 때 쉽게 깨졌다.

▲ (위) 조선의 군선은 소나무를 여러 겹으로 구성되어 무겁고 튼튼하며 배바닥이 편편하다. (아래) 일본 전함은 가벼운 삼나무 등으로 만든데다 구조도 단순하고 바닥이 뾰족하다. 그 결과 일본 전함들은 빠르기는 했지만 우리 판옥선이 들이박으면 바로 넘어지고 부서졌다. ⓒ 현충사


일본 수군의 주력선인 세키부네(關船)도, 대장선인 아다카부네(安宅船)도 마찬가지였다. 뱃머리가 날카롭고 선체의 폭이 좁아 속도가 빠른 세키부네는 임진왜란 때 동원된 일본 전함의 주력 군선이었다. 하지만 배의 폭이 좁고 무게가 가벼운 만큼 운행 속도는 빨랐지만 판옥선에게 들이박히면 속수무책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중 갑판으로 되어 있어 구조와 크기에서 우리 판옥선과 비슷한 아다카부네도 배밑이 역삼각형이었다. 물살을 헤치고 재빠르게 나아가는 데 유리한 구조였지만 밑바닥이 편편하고 무거운 판옥선과 충돌해서는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었다.

판옥선이 일본 배를 들이박으면 결과는 뻔했다

조선 수군이 움직인 배는 대략 네 가지였다.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 함선이었고, 거북선은 조선 수군의 돌격선이었다. 탐망선은 적의 상황을 살피는 정찰선으로, '사후선(伺候船)'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포작선은 군량 등을 수송하는 어민의 배였다. 그러므로 포작선은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명량 해전 때 아군의 배가 13척에 불과한 상황에 적선은 무려 133척이나 몰려오자, 우리 판옥선 멀리 뒤쪽에 포작선을 배치하여 전함이 많은 양 위장 전술을 썼다. 

▲ 판옥선의 구조(충무공이순신기념관 게시물) ⓒ 현충사


기념관은 게시물의 글과 그림을 통해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배 모양과 구조 등을 생생하게 설명해준다. 게시물에 따르면, 판옥선(板屋船)은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주력 군선이다. 16세기 중엽에 대형 선박을 타고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진압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갑판을 이중으로 만들어 선체를 높임으로써 적의 배 위에 뛰어오르지 못하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방패판(防牌板) 안의 포판(鋪板)에서 노꾼이 안전하게 노를 젓고, 청판(廳板)의 여장(女牆) 뒤에서 전투원들이 활과 포를 쏘았다.

노꾼은 노를 젓는 군사이다. 그러나 방패판, 포판, 청판, 여장 등은 어렵다. 이런 용어들을 쉽게 이해하려면 게시물 '판옥선의 구조'를 보면 된다. 방패판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격군(格軍, 노꾼)을 보호하는 방패이다. 따라서 방패판은 배의 바깥, 노꾼들의 머리 윗부분에 달려 있다. 이 방패판 안이 포판이다. 포판은 즉 1층 갑판인 셈이다.

청판은 2층 갑판으로, 여기서 군사들이 활과 포를 쏜다. 그런데 그냥 몸을 노출한 채로 포를 발사하고 활을 쏘다가는 너무 위험하다. 그래서 산성 성벽 위에 벽돌을 요철로 쌓아 튀어나온 부분에 몸을 숨기고, 벽돌 없이 뚫린 부분으로 화살을 쏘듯이 2층 갑판에도 성가퀴를 설치했다. 그 성가퀴를 여장이라 한다.

▲ 일본 전함의 특징은 '가볍고 빠르다, 그러나 충돌에 약하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 게시 그림) ⓒ 현충사


무겁고 튼튼하지만 느린 조선 전함, 가볍고 빠르지만 허약한 일본 전함

어쨌든, 조선 군선의 특징은 한 마디로 소나무 판재를 두껍게 써서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배가 무거워져서 속도는 다소 느린 단점을 띠게 되었지만, 그 반면 바닥이 넓어 짧은 시간에 방향을 바꾸기 쉬운 이점이 있었다. 한산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후퇴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거꾸로 틀어 재빠르게 학익진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다. 그런 장점이 없는 배를 탄 일본군들은 조선군의 뜻밖 회전 공격에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과 일본 군선의 비교' 게시물이 조선 전함과 일본 전함의 장·단점을 간명하게 요약해준다. 조선의 군선은 배 바닥이 넓어 속도는 느리지만 회전 반경이 짧다. 판재가 두꺼워 배가 무겁지만 선체가 강하다. 반면, 일본의 군선은 배 바닥이 좁아 속도는 빠르지만 회전 반경이 넓다. 판재가 얇아 배가 가볍지만 선체가 약하다. ('아산 현충사 꼼꼼하게 둘러보기' 두 번째 기사는 곧 게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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