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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로 김 양식에 성공한 김여익

전남 광양 김시식지를 가다

등록|2017.01.16 16:35 수정|2017.01.16 16:35

▲ 80년전에 지은 영모제 모습으로 현판은 석촌 윤용구 씨의 글이다 ⓒ 오문수


전라남도 광양시 김시식지 1길 57-6에 가면 김시식지 기념관이 나온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13호인 기념관이 주는 의미는 우리나라에서 김 양식을 가장 먼저 시작했던 지역이라는 것이다.

김시식지가 있는 마을 이름은 '궁기'이다. 태인도 사람들은 예로부터 '굼턱(궁터)'으로도 불렀다. 궁궐터였다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조선 중기 도술가 전우치의 전설과 관계가 있다. 전우치가 태인도에서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전우치는 이곳에서 양반과 지주들이 주민들로부터 착취한 세금을 다시 나눠준 의로운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김을 식용으로한 역사는 1천여년 전이며 우리나라에서 김을 처음 양식한 시기는 370여년전인 조선 중엽으로 김여익 공이 전라도 광양현 인호도(현 태인도)에서 김양식 방법을 고안하여 널리 보급한데서 비롯됐다. 이 사실은 1714년 광양현감 허심이 쓴 김여익의 묘표(墓表)에 기록되어 있고, 김이라는 명칭도 김공(金公)의 성씨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진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던 김여익, 고향 떠나 태인동에서 김양식법 창안해

▲ 김양식법을 창안한 김여익 공의 초상화 ⓒ 오문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김양식법을 창안한 김여익은 조선 선조 39년(1606년) 전라도 영암에서 김식의 여섯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인조 2년(1624년) 이괄의 난에 아버지 김식을 따라 난을 평정하기 위해 출정하였다가 아버지가 순절하는 슬픔을 겪었다.

병자호란(1636년) 때 의병을 이끌고 활약하다가 청주로 가던 중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낙향했다. 당시 호(胡)의 연호 아래 고향에서 살 수 없다며 3년간 고향을 떠나 배회하다가 인조 18년(1640년) 광양현 인호도(현 태인도)에 입도했다.

허심의 묘표기록에 의하면 "김여익이 어느해(1642년경) 겨울날 섬진강 하구의 배알도 해안에 표착한 밤나무 가지에 이름 모를 해조가 부착한 것을 발견하고 이것을 채취하여 시식해 보았더니 양분이 많고 맛이 좋았다"고 한다.

▲ 김말리는 모습 ⓒ 오문수


▲ 김작업 중인 모습이 담긴 사진들 ⓒ 오문수


이듬해인 1643년경에 현재 포스코 연관단지 부지로 편입되어 사라진 애기섬 주변에 밤나무섶과 죽림을 이용한 건홍(建篊)양식에 성공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김양식의 시초이다.

'해태'를 '김'이라 부른 것은 김여익이 태인도에서 김양식법을 창안하여 생산품을 하동장에 내달 팔 때 태인도 김가(金家)가 기른 것이다'는 뜻으로 김이라 불렀다. 김여익 공은 현종 원년(1660년)에 별세하였으며 사후 숙종 37년(1711년)에 호조 참판겸 지의금부사의 증직을 받았다.

전라남도 5개 지역의 군수와 광양시장을 역임했던 김옥현(84세)씨는 김여익 공의 10대 후손이다. 그는 조상인 김여익공에 대한 자부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전라남도 5개 지역군수와 광양군수를 역임했던 김옥현(84세)씨는 김양식법을 창안한 김여익 공의 10대 후손이다 ⓒ 오문수


"육지에서는 농사가 잘되어야 하지만 바닷가에서는 김이 잘 되어야 합니다. 일본 다나까 수상이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에게 일본인들이 김을 소개시켜주었다'고 해서 일본 갔을 때 '역사가 있는데 무슨 소리냐? 한국이 일본보다 50년 앞섰다'고 말하자 아무말도 못했어요."

그는 "김여익 공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김을 시작한 사람"이라며, 미국 사람들도 일본의 스시를 먹으면서 김을 'Black Paper'라고 말한다"고 하며 "돈 밭이었던 김 양식장이 포스코 공장부지로 들어가 버렸다"고 말했다. 

기수역인 광양인근 바다가 김에 풍부한 영양을 제공해

▲ 김양식장 모습으로 지금은 공장부지로 들어가 사라졌다 ⓒ 오문수


▲ 김시식지 기념관에 전시된 '김으로 만든음식' 코너 ⓒ 오문수


'기수역'은 해수와 담수가 혼합되어 있는 곳의 물로 민물보다는 염분이 높고 해수보다는 염분이 적은 물이다. 이곳은 영양분이 풍부해 해산물이 잘 자란다. 광양은 섬진강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기수역이다.

태인도 일대에서는 영양이 풍부한 이점을 살려 인공적으로 포자를 받지 않고 밤나무가지를 꽂는 김섶꽂이 방식을 이용했다. 마른 김의 유래는 갈대나 띠로 만든 풍석을 돛으로 사용하던 해안주민들이 배를 타고 나가 돌김을 뜯어오면서 돛대로 사용하던 풍석에 김을 말리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종이장 모양의 마른김이 됐다. 풍석은 돛을 만드는 데 쓰는 돗자리를 말한다.

김 한 장 만드는데도 여러 단계의 과정이 필요하다. 김 제작과정은 양식김→ 김뜯기→세단→현탁→초제→탈수→건조→김떼기→결속→마른 김의 과정을 거친다.

김 풍작을 기원하는 용지 큰줄다리기 

▲ 용지마을 '큰줄다리기' 회원들이 정월대보름날 사용할 용줄을 들어보이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김풍작이 들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250년 이상이어져온 전통민속놀이다 ⓒ 오문수


태인도에 김 양식법이 보급되어 살기가 좋아지자 1700년대 말경에는 하동곶이(용지마을)라는 큰 마을이 형성되었고 용지 줄다리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성행했던 용지마을 큰줄다리기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다만 세계 최초로 김양식법 개발 전파로 김의 원산지가 된 태인동 용지 마을주민의 안녕과 김밭에 잡태가 끼지 않고 풍작이 들기를 기원하기 위해 열렸다. 1700년대 초기에 시작되어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까지 250여 년 동안 이어져온 전통놀이는 올 정월 대보름날에도 어김없이 열릴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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