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오던 날, '대박' 택배 받았습니다
겨울이 오면 택배 올까 두려웠던 내가 '눈님' 덕분에 변했다
다행히 보낸 사람 이름이 찍혀 있다. 낯익은 친구. 전화를 거니 사과를 주문해 보낸다나. 말 한마디 없었는데, 깜짝 선물로 준비했나 보다. 내가 사과 보내줘도 시원찮을, 돈도 많이 못 버는 이 친구가…. 짠한 감동이 밀려오지만 '눈길 택배' 생각에 얼른 정신 차리고 말을 건넨다.
▲ 눈 평펑 오는데 택배도 온다니 걱정, 또 걱정 눈발이 휘몰아치는 아침. 우체국에서 택배 배달한다는 카톡이 왔다. 반가운 마음보다 걱정부터 앞선다. 이렇게 눈이 휘날리는데 택배 기사님 어찌 오시려나, 우체국 택배는 거의 오토바이 타고 오던데…. ⓒ 조혜원
"여기 눈 엄청 많이 와서 택배기사님 오기 어려울까 봐, 내용물 물어봤지. 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사과를 상자로 보내고 그래.^^ 사과면 며칠 늦게 받아도 되겠다. 택배기사님한테 연락해 볼게."
깜짝 선물 리듬을 끊어도 유분수지. (친구야, 전화하고 나서 좀 미안했다. 그래도 이해해 줘라. 눈 오는 날 산골 택배는 뭔가 엄청 어려워서는. ㅜㅜ) 택배 기사님께 바로 전화.
"기사님~ 어디 마을 누군데요, 오늘 저희 것만 있으면 배달 나중에 해주셔도 되는데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오시기 힘들까 봐요."
우리 집 말고 다른 배달도 있어서 와야만 한단다. 어쩔 수 없지. 에구, 저렇게 눈이 쏟아지는데 오토바이 타고 어찌 오실지 걱정 또 걱정…. 안 되겠다, 눈을 치워야겠다. 택배 기사님 오시기 전에!
부부 눈 청소단 출동!
▲ 부부 눈 청소단 출동! 내 집 앞 눈을 쓸어 보고자 나간 우리 부부. 온통 하얀 저 마을길이 모두 내 집 앞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우리 집에서 가까운 길, 남편은 저 아래 마을회관 길까지 눈을 쓴다, 아니 젖먹던 힘까지 쓴다. ⓒ 조혜원
점심 먹고 나니 눈이 잦아든다. (차라리 치울 엄두도 못 내게 계속 내리길, 솔직히 바라기도 했으나) 눈님이 잠시 쉬는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 다시 또 오시더라도.
산골 부부, 내 집 앞 눈을 쓸어 보고자 나간다. 눈에 보이는 마을 길이 온통 하얗다. 산골 마을에서 겨울을 네 번째 보내는 우리 부부, 이미 알고 있다. 온통 하얀 저 마을 길이 모두 내 집 앞이라는 걸. 부부 눈 청소단 출동! 나는 우리 집 가까운 길, 남편은 집에서 보이지 않는, 저 아래 마을회관 길까지 눈을 쓴다, 아니 젖 먹던 힘까지 마구 쓴다. 땀이 뻘뻘 나도록.
'바그적, 버그적, 벅벅.' 눈삽에 눈 쓸리는 낯익은 그 소리에 마을 분들 하나둘씩 등장. 팔순 가까운 앞집 할머니가 가장 먼저 말을 건네신다. "걸어 다니는 길만 쓸어도 되는데." "택배도 오고 차도 다녀야 하잖아요. 주말에 계속 눈 온다는데 조금이라도 치워 놓아야 나중에 또 치울 때 쉽죠." "그랴~"
끙끙대며 눈을 밀어내는데 저 아래 쪽에 한 아주머니가 보이고. "뭘 거기까지 쓸어요!"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남편도 저 아래서 쓸고 있어요." 살짝 웃으면서 돌아가신다. 올해, 처음 뵙는다. 눈 쓸러 나오길 잘했지, 이렇게라도 새해 인사드릴 수 있어서. 눈이 많이 와 줘서 오히려 고맙다.
▲ 우리에게도 전성기가 있다! 이번 겨울 들어 처음으로 털 고무장화랑 여기저기 뜯어진 겨울장갑, 그리고 눈삽을 꺼냈다. 눈이 와야만 바깥 구경을 하는 이 물건들은 오랜만에 제 세상을 만나, 전성기를 누렸다. ⓒ 조혜원
▲ 오토바이쯤은 거뜬히! 두 시간쯤 눈을 치우고 나니, 오토바이쯤 거뜬히 올라올 수 있게 길이 말끔해졌다. 그리고 눈 치우자마자 택배 기사님이 오셨다. 예상대로 오토바이를 타시고. ⓒ 조혜원
"눈 다 치우신 거예요? ^^"
그렇게 두 시간쯤 하고 나니 온몸이 힘겹다. 오후 일정 딱히 없지만, 오후 일정 접고 쉬어 버린다. 그래도 좋다. 올겨울, 눈이 너무 덜 와서 겨울 가뭄 들까 걱정이었는데. 눈 덕분에 마을 분들하고 인사도 나누었고. 게다가 눈이 와야만 세상 빛을 보는 눈삽과 털 고무장화, 이번 겨울 들어 처음으로 제 몫을 다하며 전성기를 누린 날이기도 하니까.
눈 치우고 잠시 쉬는 그때, 전화로 먼저 만난 택배기사님이 오토바이 끌고 오셨다. 아, 빨리 치우길 잘했다, 잘했어! "눈 다 치우신 거예요?^^" 어느 때보다 환히 웃는 얼굴로 사과 상자랑 함께 인사말을 건네는 택배 기사님, 우리가 치웠는지 어찌 아셨을까? "네, 기사님 오시기 좋으라고 열심히 치웠어요."
꼭 기사님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것도 중요하게 작용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니 생색 좀 내 보았다. 껍질째 먹는 건강 사과, 뚜껑을 여니 향긋한 내음이 집 안에 가득 퍼진다. 사과 맛도 좋지, 택배기사님 밝은 얼굴에 기분도 좋지, 깜짝 선물에는 실패한 친구한테 이 기분 건네고 싶어서 카톡을 보낸다.
'사과 잘 받았어~ 너 평생 할 사과, 오늘 다 보낸 거다아~^^ 사과 엄청 맛있어. 잘 먹을게!'
▲ 껍찔째 먹는 숲골 사과 껍질째 먹는 건강 사과, 뚜껑을 여니 향긋한 내음이 집 안에 가득 퍼진다. 택배기사님 밝은 얼굴에 좋았던 기분, 사과 맛보며 한껏 더 올라간다. 깜짝 놀라는 데는 비록 실패했지만. ⓒ 조혜원
세상에, 또 택배다!
사과 내음에, 친구의 짠한 마음에 흠뻑 취해 있는 가운데 차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현관을 두드린다. '누구지?'
세상에, 또 택배다! 이번엔 사진 달력! 여러 해 전 일 하다 인연을 맺은 사진작가 선생님. 얼마 전 자기 사진으로 만든 달력을 보내 주겠다고 하셨는데 그게 딱 오늘 도착한 거다. '오, 행운이시여! 오늘 내게 제대로 와주셨나이다!' 눈을 치우지 않았다면 달력 건네주신 택배기사님도 차 끌고 예까지 오긴 참 어려웠을 텐데. 깜짝 선물들이 아녔어도 이 눈은 치우긴 했을 테지만, 눈 쓸어낸 보람을 이렇게 제곱으로 안겨 주시다니. 아, 오늘 눈 쓸기를 잘했다. 아니, 눈님이 정말 잘 와주셨다.
눈과 함께 온 깜짝 선물, 여기서 끝인 줄 알았건만, 또다시 내게 온 선물. 우리 집 위쪽에 컨테이너 두고 귀농 준비하는 아저씨가, 이 눈길을 뚫고 오셨다. 눈길에 설마 오시랴 싶어 윗길은 쓸지 않았건만, 아래쪽이라도 눈 치운 게 고마우셨는지 아귀포를 주신다. 전에도 더러 맛보게 해 주신, 그래서 우리 부부 고급 술안주 몫을 톡톡히 했던 여수산 맛난 아귀포를, 하필 또 오늘!
아귀포 선물까지 받아들고 나니, 좀 멍하다. 우리 부부, 눈 한두 시간 쓸었을 뿐인데, 눈 치운 보람을 느끼기엔 이 많은 선물들이 도체 감당이 안 되는 거다. 우리 부부와 얽히고설킨 이 인연들은 눈 펑펑 오는 이 날, 이번 겨울 들어 처음 눈을 치운 오늘, 마치 다 같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한가득 깜짝 선물을 안겨 주었다.
▲ 깜짝 선물 릴레이멋진 사진 달력에 이어 여수산 아귀포까지. 눈이 펑펑 온 날, 깜짝 선물 릴레이가 이어졌다. 뭔가 감당이 안 될 만큼. ⓒ 조혜원
눈이 오는 날 받는 선물이란. 다른 때보다, 다른 무엇보다, 가슴 애타고도 찡하게 만들어 준다는 걸, 산골 살이 4년째 들어선 지금에야 제대로 느낀다. 그전에는, 집까지 못 올라오겠다며 하소연하는 택배기사님들께 화날 때가 많았다. 도시에서 만만하게 누렸던 택배 수령자 생활, 산골에 산다고 해서 못 온다는 둥, 마을회관에 놓겠다는 둥, 면으로 나와 달라는 둥, 이런 소리를 들을 때 솔직히 열, 많이 받았다.
겨울이 오면 택배가 올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눈마저 오면, 누가 택배라도 보낼까 봐 지레 걱정부터 했다. 두렵기까지 했다. 누가 택배 보낼까 연락 오면 손사래 치며 말리기도 여러 번. (시어머니의 사랑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땐, 시어머니 표 택배를 막는 노릇을 눈님이 톡톡히 해 주었다만) 전화 올일 거의 없어서 모르는 번호가 뜨면 여지없이 택배 기사님. 전화기 너머로 여지없이 들려오던, '거기도 눈 많죠? 어디 어디에 두고 갈게요' 하던 목소리. 그럴 때마다 화를 낼 수도 안 낼 수도 없어서 속이 엄청 부글거렸다. '택배 기사님이 오기 어려운 길은, 우리도 받으러 나가기 힘든 길이거든요! ㅜㅜ'
눈 덕분에, 깜짝 선물 안겨준 고마운 인연들 덕분에, 택배기사님들을 좀 더 너그럽게 바라볼 마음을 얻은 것 같다. 이 마음 잊지 않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꼬불꼬불 산길, 마을 길 다니느라 고생 많으신 수많은 시골 택배 기사님들의 삶도, 마음도 이해하며 더불어 잘 살아가고 싶다. 다 떠나서, 그분들이 없으면 늘 자식들에게 보내는 것 많은 마을 어르신들도, 우리처럼 주야장천 받는 것 많은 집도 그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지니.
▲ 눈을 그대로 두고 싶다 눈 치운 지 하루 지나니 다시금 눈이 온다. 눈은 땅 위에 그대로 얹혀 있다 햇볕에 자연스레 녹아야 맞지 않을까. 그게 이 지구에도, 자연에도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 조혜원
눈 치우고 하루를 넘기자마자 다시금 눈이 온다. 사람이, 차가 다녀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저 새하얀 눈을 밀어내기는 하지만, 눈은 땅 위에 그대로 얹혀 있다 햇볕에 자연스레 녹아야 맞지 않을까. 그게 이 지구에도, 자연에도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눈이 아무리 많이 와도 최소한만 길목을 내거나 그조차 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곳, 살아가는 삶을 다시금 꿈꿔 본다. 지금은 나도, 사람보다는 차가 다닐 수 있게 눈을 치워야만 마음이 놓이기에, 나부터 아직 멀었다. 그래도 그런 삶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조금씩, 끈질기게…. 그전까지는 택배 기사님들을 반갑게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눈을 치워야지. 내 집 앞부터 저 아랫마을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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