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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열차 '아베', 사치스럽지만 좋았다

[스페인에서 한 달 살이-첫 번째] 마드리드에서 '여름 도시' 세비야 가는 길

등록|2017.01.26 14:51 수정|2017.01.26 14:58
지난 해 12월 30일부터 1월 24일까지 약 한 달 간 스페인에서 겨울을 나고 돌아왔습니다. 시간에 쫓겨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그냥 사글세방 얻어 살듯 지내다 왔습니다. 자린고비처럼 살지 않고 즐길 건 다 즐기며 지냈지만, 생각보다 경비가 많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스페인에서 한 달 산 경험담을 여기 소개합니다. -기자 글

새벽에 비행기를 타고 12시간 비행, 그런데 새벽이라니...

세비야 대성당의 오렌지 나무세비야의 겨울은 따뜻하다 못해 덥다. 섭씨 20도에 이르는 날도 많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 오렌지 나무가 자라고, 창문에 놓아둔 화분에 꽃이 화사하게 피어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서부원


지난 해 말 도망치듯 스페인으로 떠났다. 휴가차 떠나는 며칠짜리 해외여행이 아니라, 그곳에서 이번 겨울 한 철을 보내기 위해 무작정 짐을 쌌다. '보러' 간 게 아니라, '살러' 간 것이다. 같은 북반구의 나라지만, 그곳은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일 것만 같았다.

태양과 정열의 나라라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삭막해진 내 삶을 성찰해보고 싶었다. '겨울 공화국'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겨우내 주말마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꿋꿋하게 촛불을 들 많은 이웃들에게 죄스러웠지만, 연일 쏟아지는 우울하고 참담한 뉴스로부터 일단 벗어나고 싶었다.

후안무치한 권력자들의 행태에 욱하지 않으려면 안 보는 게 상책이라는 비겁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일까. 배낭 차림의 내 행색을 보니, 흡사 방사능에 피폭당하지 않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모양새였다.

시차는 몸을 천근만근 피곤하게 할지언정 먼 타국 땅에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반가운 환영인사다. 경유지인 베이징에서 새벽에 비행기를 탔고, 열두 시간을 날았는데도, 마드리드 바라하 공항은 여전히 짙은 새벽이었다. 태양보다 더 빨리 날아온 비행기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시차만큼 외국에 왔음을 실감시켜주는 건 없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빠져나오는 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피곤한 여행객을 위한 배려일 리는 없고, 그만큼 당국의 입국 수속 절차가 느슨한 탓이다. 스페인은 현재 여행 유의 국가로 지정되어 있어 입국 수속에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터다. 여느 곳 같으면 강압적인 태도로 바지의 허리띠까지 풀게 하는 마당인데 이래도 되나 걱정될 정도였다.

영어가 병기돼 있지 않다니...당황스런 스페인 공항 주변

공항의 칠흑 같은 어둠이 이방인을 포위하고 있다. 그러나 밤의 어둠과 새벽의 어둠은 공기의 맛부터가 다르다. 이내 아침이라는 생각에 초행길의 낯섦과 두려움은 없다. 게다가 늘 그런 곳에는 도움을 주는 마음 따뜻한 사람 한 명쯤은 있게 마련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살라망카 대학으로 유학 왔다는 여학생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공항에서 동트는 아침 해를 볼 뻔했다.

공항 밖 곳곳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만, 도통 알아볼 수 없는 스페인어 일색이었다.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영어가 병기되어 있지 않은 공항 주변은 처음이었다. 그나마 공항버스 정류장을 찾아갈 수 있었던 건, 글자와 함께 표기된 '그림' 때문이었다. 공항버스 시간표를 봐도, 아라비아 숫자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없어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말보다 영어가 먼저 적히곤 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에 더 당황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비슷한 알파벳을 사용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대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 거라는 생각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공항과 기차역의 안내데스크만 벗어나도 영어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외국어'였다. 관광지의 매표소 직원과 가이드 등을 제외하면 한 달 동안 만난 숱한 스페인 사람들 중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냥 손님을 기다리며 마냥 줄 서 있는 택시를 타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타국 생활의 시작부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웬만하면 택시를 타지 않는다는 건 내 오래된 철칙이다. 당장 지갑에 든 돈을 떠올리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그보다 스페인의 장삼이사들 중 선뜻 택시를 잡아타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들처럼 살겠다고 마음먹은 이에게 분명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정류장에서 속절없이 한 시간 가까이 흘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방인에게 그 여학생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요일마다 첫 차 운행과 버스 운행 시간이 다르다고 했다. 빼곡하게 적혀 있는 버스 시간표를 내 맘대로 해석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렇게 더 30분을 기다려야 버스가 온다고 했다. 그런데도 나머지 시간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던 것은 그와 영어로 나눈 즐거운 대화 때문이다. 비록 서툰 영어일지언정 마치 모국어처럼 느껴졌다.

그도 기차를 타기 위해 역에 가려던 참이었다. 버스 안 안내방송도 스페인어 일색인 마당에 언제, 어디서 내려야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될 터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내 짧은 영어 실력이 부끄러웠는데, 외려 그는 영어가 서투르다며 미안해했다. 스페인에서의 첫 인연인 그는 공부를 위해 마드리드 북서쪽인 추운 살라망카로 가고, 난 따뜻한 남쪽 플라멩코의 도시 세비야로 간다.

'난민을 환영한다'는 마드리드 청사

바르셀로나 몬주익 성에 남아있는 해시계실제 한 시간 남짓의 오차가 보이는데, 표준시를 한참 동쪽에 자리한 독일과 동일하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스페인의 일상은 시차 적응이 한 번 더 필요하다. ⓒ 서부원


마드리드 시청 광장을 지날 무렵 늦은 동이 텄다. 시계는 오전 8시가 넘었지만, 거리는 한산하기만 하다. 뒤늦게 안 것이지만, 이 또한 시차 때문이다. 스페인은 지리적으로 영국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지만, 표준시는 영국보다 한 시간 빠른 시간을 적용하고 있다. 한참 동쪽인 독일과 같은 시간대다 보니, 9시가 다 돼서야 밖이 환해지는 것이다.

그래선지 스페인 사람들은 대개 10시 넘어서 아침을 먹고, 미술관 등 주요 관광지도 10시나 11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 기차나 버스 운행을 제외하면, 10시 이전의 스페인은 '휴면' 상태나 마찬가지다. 한국에서처럼 6시 경에 일어났다간 낭패다.

창밖을 내다보면 8시 넘어서까지도 불 켜진 집이 손에 꼽을 정도다. 시차는 비행기에서만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12시가 넘도록 점심 메뉴를 팔지 않는 곳이 스페인 말고 또 있을까 싶다. 12시 이전엔 무조건 달달한 빵과 커피로 된 '데사유노(Desayuno)'뿐이다. '데사유노'는 스페인어로 아침식사라는 뜻이다.

식당에서 점심식사는 1시 이후, 저녁식사는 8시 이후에나 가능하다. 그때 아니면 아예 문을 열지 않은 곳도 많다. 아무튼 우리와 견줘 일과가 두 시간쯤 늦다고 보면 된다.

여명 사이로 큼지막한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마드리드 시청사 외벽에 걸린 낯설고도 강렬한 글귀였다. 주변은 어두웠지만 글자만큼은 또렷했다. 'REFUGEES WELCOME.' 난민을 환영한다는 뜻이다. 유럽 전역이 테러의 공포에 떨고 있고, 여러 나라에서 극우 정권이 등장해 난민 유입을 차단한다고 공공연히 밝히는 마당에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다.

아닌 게 아니라, 버스에 함께 타고 있는 이들 중 스페인 사람보다 이방인이 더 많아 보였다. 남루한 차림의 흑인도 있었고, 짙은 눈썹의 아랍계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그들이 모두 난민일 리는 없지만, 스페인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유럽의 국경이 하나둘 닫혀가고 있는 현실에서, 스페인만큼은 아직 난민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바깥 풍경은 굴곡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밋밋했다

창밖으로 본 메세타 고원의 풍경사진처럼 무미건조한 풍경이 몇 시간 동안 이어진다. 비가 자주 내리지 않는 메마른 땅에 나무라곤 둥글고 키작은 올리브 나무가 고작이다. ⓒ 서부원


스페인의 고속열차, 아베시속 300킬로미터를 훌쩍 넘는 고속열차로, 스페인의 주요 도시를 불과 몇 시간 이내로 대부분 연결한다. ⓒ 서부원


어느 나라건 기차역만큼 분주한 곳은 없다. 온갖 사연을 담은 짐 꾸러미와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곳, 기차역은 내가 해외여행 중 시장 다음으로 즐겨 찾는 곳이다. 기차를 탈 일이 없어도 부러 찾기도 하고, 이따금 하루 종일 대합실에 앉아 사람들 구경을 할 때도 있다.

여느 여행 안내서에서는 소매치기가 들끓는 곳이라고 겁주곤 하지만, 그런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선 참다운 여행을 누릴 수 없다. 실제로 기차역 등지에서 소매치기를 당해본 적도 없다.

우리나라를 떠나기 전 '아베'라고 불리는 고속열차표를 인터넷으로 예매했다. 마드리드에서 세비야까지 4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두 시간 반에 주파할 만큼 빠르고 안락한 기차다. 고작 택시비 몇 유로조차 아까워 주저하는 마당에 분명 사치스러운 선택이지만, 도시 간 이동할 때만큼은 돈과 시간을 맞바꾸기로 했다. 스페인은 우리보다 여섯 배 가까이 넓은 나라다.

나중 어쭙잖은 해외여행 경험이 부른 참사라며 스스로 애통해한 거지만, 유럽인들은 웃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는 유레일패스의 '가성비'를 무한 신뢰한 탓이기도 하다. 도시 내 지하철처럼 운영되는 국철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기차는 예약이 필수이고, 구간별로 만만치 않은 수수료가 들어간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다음 편에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기차는 언뜻 들판 같은 메세타 고원을 쏜살 같이 내달렸다. 창밖을 내다볼 겨를조차 없을 만큼 빠른 탓이기도 하지만, 바깥 풍경은 굴곡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밋밋했다. 메마른 땅에 성긴 숲, 이따금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떼와 양떼뿐이었다. 변변한 마을 하나 보이지 않고, 땅을 가로지르는 도로 하나 나 있지 않았다. 이 땅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듯했다.

마드리드에서의 아침은 분명 쌀쌀한 겨울이었는데, 고작 두 시간 반 만에 계절이 바뀌었다. 세비야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거리에는 반바지와 반팔 차림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샌들을 신고 배낭을 둘러맨 여행자들까지, 세비야는 차라리 여름이었다. 두툼한 오리털 점퍼 차림의 나는 순간 황망해지고 말았다. 그렇듯 계절을 망각한 채 태양을 품은 세비야에서 스페인에서의 한 달 살이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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