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과 군대, '선거권'의 조건이 아닙니다
[18세 선거권 논란 ⑤] 권리는 '성인'만이 가질 수 있는 걸까?
요즘 들어 18세 선거권 이야기가 많이 보인다. 진선미 의원이 18세 선거권을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일부 개정안'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고, YMCA 등의 단체들이 국회 토론회를 열거나, 언론들이 관심을 가지고 조명하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청소년 참정권이 조명받는 것도 기쁘고 지금 당장은 18세 참정권이기는 하지만, 나아가서는 모든 청소년의 참정권이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18세 참정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종종 꺼림칙한 기분을 버릴 수 없다. 18세 참정권을 주장하면서 "세금이나 병역, 결혼도 18세부터인데 왜 투표는 할 수 없냐"는 말을 자주 꺼내오기 때문이다. 그게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8세인 청소년 대다수는 이렇다 할 소득이 없어서 직접세를 내지 않는 경우가 많고, 병역을 바로 이행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결혼의 경우에는 친권자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을 떠올리면 별로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의 주체성을 강조한다기에도 의미가 애매하다.
권리는 의무에 우선한다
당장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만 해도 이렇다 할 정기적 소득이 없어서 직접세도 내지 않고-간접세는 이미 많이 내고 있지만-굳이 군대를 갈 생각도 없으며, 곧바로 결혼을 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투표도 하고 싶고 정치 참여도 하고 싶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나 다른 청소년들은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시대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를 비롯한 청소년들은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고,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다.
모든 권리의 투쟁이 그러하지만 참정권과 관련된 투쟁에는 많은 오해들이 따라붙는다. 대표적인 말이 '의무도 이행하지 않으면서 왜 권리만을 주장하느냐?'다.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참정권을 비롯한 모든 권리는 의무를 이행했을 때 줄줄이 딸려오는 '대가'가 아니며, 의무나 권리는 대립되거나 선행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의무를 모두 이행해야만 주어지는 권리 같은 건 없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의 극소수만이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며, 아주 쉽게 그 권리가 박탈당할 수 있을 것이다. 권리는 의무에 우선한다.
참정권은 보편적 권리다. 그런데 왜 청소년에게만 그 권리가 주어지지 않을까? 청소년 참정권을 반대하는 쪽이든 찬성하는 쪽이든 시작은 이 질문에서부터다. 청소년 참정권을 완전히 반대하는 논리는 보통 청소년이 스스로 정치적 의사를 개진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청소년은 그 자신의 삶 대부분을 누군가에게 의탁하고 지내고, 미성숙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 만 19세가 되는 순간 청소년은 갑자기 정치적 이해관계나 사안들에 대해 자신만의 독립적 사유를 통한 의견을 낼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지고, 그 의견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자리에 충분히 참석할 수 있으며, 경제적이든 단순한 생활반경이든 자기 혼자서 자립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바뀌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또 한국에서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정치적 의견을 내려고 하면 '어린애가 그런 거 알아서 뭐하게?'라는 말들이 돌아온다. 이 말은 돌고 돌아 정치적 의사를 낸 학생을 징계하는 학칙이 되고, 청소년이기 때문에 선거운동조차 할 수 없는(공직선거법 제 60조에 따라 미성년자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로 분류된다) 법이 된다.
'청소년' 그 자체로서 인정받기 위한 투쟁
청소년이 정치적 의사를 드러내는 걸 학교나 가정, 심지어는 국가까지도 나서서 탄압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정치적 의견을 말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이들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을까? 결국은 악순환만 부를 뿐이다.
세금이나 병역, 결혼 등을 할 수 있으니 18세 참정권을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 또한 사실 마찬가지다. 그냥 저 말을 교묘히 바꿔놓은 것뿐이다. 소득이 있어서 직접세를 내는 것, 군대에 가는 것, 결혼을 하는 것 등은 보통 사회적 '어른'이 되었다는 대표적 요소로 거론되는 것들이다. 즉 18세도 '어른'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건 결국 청소년 자체로써는 참정권을 얻을 수 없고, 사회가 인정한 '어른'이 되어야만 정치 참여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식이라면 여전히 '어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권리는 뒷전이 된다.
권리는 '성인'만의 것이 아니다. '성인'이 아닌 사람들도 인간이고, 그들에게도 인권이 있다. 참정권은 단순히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건 그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결정할 수 있게 하고, 그리고 그걸 사회에 요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민주주의의 활성화와 인권의 향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숙한 이를 성숙하게 하는 것은 '실수할 수 있는 기회'다. 고전적인 말이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 말은 자기계발이나 동기부여 같은 것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는 실패나 실수를 통해 '성숙'해진다. 정치나 말하기, 선택은 더더욱 그러하다.
참정권의 확대는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못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런 흐름이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성숙/성숙에 관한 문제는 굳이 다뤄질 필요도 없으며, 애초에 모든 인간은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항상 미성숙하다.
참정권의 확대를 논의할 때는 민주주의가, 인권이 어떻게 확대되고 보장되는지를 다뤄야 한다. 그게 18세 참정권을 논의하는 것이든 모든 청소년의 참정권을 논의하는 것이든. 청소년들은 성인으로서 편입되고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그 자체로도 인간이기 위한 투쟁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18세 참정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종종 꺼림칙한 기분을 버릴 수 없다. 18세 참정권을 주장하면서 "세금이나 병역, 결혼도 18세부터인데 왜 투표는 할 수 없냐"는 말을 자주 꺼내오기 때문이다. 그게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8세인 청소년 대다수는 이렇다 할 소득이 없어서 직접세를 내지 않는 경우가 많고, 병역을 바로 이행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결혼의 경우에는 친권자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을 떠올리면 별로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의 주체성을 강조한다기에도 의미가 애매하다.
권리는 의무에 우선한다
▲ 박근혜하야 전국청소년비상행동 소속 학생들이 지난달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만 16세 선거권 부여를 요구하는 '세월호 진상 규명, 세월호 세대의 투표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당장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만 해도 이렇다 할 정기적 소득이 없어서 직접세도 내지 않고-간접세는 이미 많이 내고 있지만-굳이 군대를 갈 생각도 없으며, 곧바로 결혼을 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투표도 하고 싶고 정치 참여도 하고 싶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나 다른 청소년들은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시대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를 비롯한 청소년들은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고,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다.
모든 권리의 투쟁이 그러하지만 참정권과 관련된 투쟁에는 많은 오해들이 따라붙는다. 대표적인 말이 '의무도 이행하지 않으면서 왜 권리만을 주장하느냐?'다.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참정권을 비롯한 모든 권리는 의무를 이행했을 때 줄줄이 딸려오는 '대가'가 아니며, 의무나 권리는 대립되거나 선행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의무를 모두 이행해야만 주어지는 권리 같은 건 없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의 극소수만이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며, 아주 쉽게 그 권리가 박탈당할 수 있을 것이다. 권리는 의무에 우선한다.
참정권은 보편적 권리다. 그런데 왜 청소년에게만 그 권리가 주어지지 않을까? 청소년 참정권을 반대하는 쪽이든 찬성하는 쪽이든 시작은 이 질문에서부터다. 청소년 참정권을 완전히 반대하는 논리는 보통 청소년이 스스로 정치적 의사를 개진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청소년은 그 자신의 삶 대부분을 누군가에게 의탁하고 지내고, 미성숙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 만 19세가 되는 순간 청소년은 갑자기 정치적 이해관계나 사안들에 대해 자신만의 독립적 사유를 통한 의견을 낼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지고, 그 의견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자리에 충분히 참석할 수 있으며, 경제적이든 단순한 생활반경이든 자기 혼자서 자립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바뀌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또 한국에서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정치적 의견을 내려고 하면 '어린애가 그런 거 알아서 뭐하게?'라는 말들이 돌아온다. 이 말은 돌고 돌아 정치적 의사를 낸 학생을 징계하는 학칙이 되고, 청소년이기 때문에 선거운동조차 할 수 없는(공직선거법 제 60조에 따라 미성년자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로 분류된다) 법이 된다.
'청소년' 그 자체로서 인정받기 위한 투쟁
▲ 청소년 투표권 ⓒ 오마이뉴스
청소년이 정치적 의사를 드러내는 걸 학교나 가정, 심지어는 국가까지도 나서서 탄압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정치적 의견을 말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이들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을까? 결국은 악순환만 부를 뿐이다.
세금이나 병역, 결혼 등을 할 수 있으니 18세 참정권을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 또한 사실 마찬가지다. 그냥 저 말을 교묘히 바꿔놓은 것뿐이다. 소득이 있어서 직접세를 내는 것, 군대에 가는 것, 결혼을 하는 것 등은 보통 사회적 '어른'이 되었다는 대표적 요소로 거론되는 것들이다. 즉 18세도 '어른'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건 결국 청소년 자체로써는 참정권을 얻을 수 없고, 사회가 인정한 '어른'이 되어야만 정치 참여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식이라면 여전히 '어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권리는 뒷전이 된다.
권리는 '성인'만의 것이 아니다. '성인'이 아닌 사람들도 인간이고, 그들에게도 인권이 있다. 참정권은 단순히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건 그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결정할 수 있게 하고, 그리고 그걸 사회에 요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민주주의의 활성화와 인권의 향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숙한 이를 성숙하게 하는 것은 '실수할 수 있는 기회'다. 고전적인 말이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 말은 자기계발이나 동기부여 같은 것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는 실패나 실수를 통해 '성숙'해진다. 정치나 말하기, 선택은 더더욱 그러하다.
참정권의 확대는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못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런 흐름이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성숙/성숙에 관한 문제는 굳이 다뤄질 필요도 없으며, 애초에 모든 인간은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항상 미성숙하다.
참정권의 확대를 논의할 때는 민주주의가, 인권이 어떻게 확대되고 보장되는지를 다뤄야 한다. 그게 18세 참정권을 논의하는 것이든 모든 청소년의 참정권을 논의하는 것이든. 청소년들은 성인으로서 편입되고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그 자체로도 인간이기 위한 투쟁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김경빈씨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