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 농부는 불행하고 독일 농부는 행복한가
[독일의 농부 20] 농민이 주권자로 자치하는 독일의 '농업정책'
직불금, 가족농, 협동조합, 농업학교, 그리고 농업회의소. 독일 등 EU의 선진 농정을 지탱하는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은 이 5가지가 아닐까. EU의 농부들은 농가소득을 정부로부터 보전받는다. 국민이 농민의 공익성을 인정, 사회적으로 기꺼이 합의해주었다. 대개 농가소득의 50% 이상의 금액이 '직불금'으로 지급된다. 그래서 두 부부와 후계농 자식 등 2대 이상으로 이루어진 가족농으로도 '농사를 지어 돈을 벌지는 못하더라도' 얼마든지 자급하고 자립한다.
무엇보다 '가족농'들은 개별적으로 수익성이나 상업성만 좇으며 경쟁하지 않는다. 농업학교를 졸업한 정예의 농민들은 생산자조합(gemeinschaft), 농업협동조합(genossenschaf)을 이루어 공동으로, 유기적으로 협동하고 연대한다. 또 지역사회가 농업회의소를 통해 지역농정을 사실상 자조·자치하며 WTO, 곡물메이저 등이 지배하는 세계농업 질서에도 공고하고 지혜롭게 맞선다. 지난 2014년 봄과 2016년 가을에 '농부의 나라' 독일, 오스트리아의 농촌공동체와 친환경 농가를 20여 일 둘러본 소감이자 깨달음이다.
그런데 농정을 집행하는 법과 정책만 보면 한국도 독일의 사정과 크게 다르거나 모자라지 않은 듯하다. '농어업인 삶의 질 향상 및 농어촌지역 개발촉진에 관한 특별법' 하나만 봐도 그렇다. 법의 목적부터 다분히 합리적이고 이상적이다. "농어업인 등의 복지증진, 농어촌의 교육여건 개선 및 농어촌의 종합적·체계적인 개발촉진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농어업인 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지역 간 균형발전을 도모한다."
법의 기본이념은 더 훌륭하다. "농어촌과 도시지역 간에 생활 격차를 해소하고, 교류를 활성화함으로써 농어촌 주민이 도시지역 주민과 균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농어촌이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법 조항이나 문구로만 보면 흠잡을 데가 잘 보이지 않는다.
EU 농업개혁 직불금으로 독일 농부는 행복해졌다
이처럼 한국과 독일의 농정 정책의 방향과 철학은 겉으로는, 크게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농정 현실은 한국과 독일의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너무 다르고 멀어 보인다. 우선 '쌔가 빠지는' 농사를 짓는 한국 농부들의 삶은 힘겹다. 비록 독일 농부들도 '뼛골 빠지는' 농사를 짓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의 삶은 안정적이다. 농사로 좀처럼 먹고살기 어려운 한국의 농부들은, 최소한 먹고사는 걱정이 크지 않은 독일의 농부들처럼 농사일에 자부심이나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
무엇보다 한국 농부들은 독일 농부들처럼 농사의 가업을 자식에게 굳이 물려주려 하지 않는다. 자꾸 도시의 자본주의 노예 신세로 전락할지언정 도시 생업의 전쟁터로 내몬다. 농부로서의 일생은 결코 자랑스럽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는 게 이유다. 대체 왜 그런가. 왜 한국 농부와 독일 농부의 마음가짐과 생활환경은 그토록 다른가. 그 의문과 숙제를 풀기 위해 독일의 농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농부의 나라' 독일의 4가지 농정 기본목표는 '농촌 지역의 삶의 질 개선, 국민에게 고품질의 농산물·식료품 적절한 가격 공급, 자연적 생활기반 확보와 개선, 농업 관련 대외무역 관계 개선과 세계 식량 상황 개선 등이다. 1990년대 이후에는 영농활동과 병행하는 추가 소득원 개발, 농업의 다원적 기능 강조, 식품의 안전성 강조 등의 과제를 추가해 함께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독일 농정의 뼈대와 바탕은 EU의 농업개혁(Agenda 2000)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99년, EU 이사회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7년간 시행할 농업개혁안(Agenda 2000)을 합의한다. EU 공동농업정책을 기존의 농업 중심 정책에서 농촌개발, 환경보전 등도 고려한 통합정책으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농업생산의 1축 외에 농촌개발의 제2축(second pillar)을 새로 도입했다. 지지가격 수준의 인하와 직접지불에 의한 부분적 보상, 환경정책의 EU 공동농업정책 통합, 농업의 다원적 기능 접근방식에 의한 농촌개발, 정책 시행에 있어 회원국의 재량권 확대 등을 주요 원칙으로 삼았다.
무엇보다 '직접지불' 원칙을 강화한 게 눈에 띈다. 우선 경종 분야(수도작, 채소, 화훼, 과수, 특작, 복합영농 등)는 직접지불에 의한 보상을 톤당 54.34유로에서 63유로로 인상했다. 또 쇠고기나 우유의 지지가격을 단계적으로 인하하는 대신 직접지불로 보상하기로 했다. 특히 직접지불로 배정된 EU 예산의 20%까지 회원국의 재량에 따라 농촌개발사업분야로 전용할 수 있게 했다.
1956년 녹색계획에서 아젠다 2000까지
이렇게 아젠다(Agenda) 2000이 타결되면서 독일 농부들에게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EU 공동농업정책에 따른 독일의 농업지원 규모가 독일연방 정부의 지원 규모보다 더 커졌다. 우선 개별경영체에 대한 농업투자지원프로그램(AFP)에서 주업농과 부업농이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양돈농가도 지원대상에 포함되고 자본과 노동을 적게 들이는 '소농' 들의 조방적 경영과 친환경적 영농 지원도 강화되었다. 가공·유통시설 확충, 농촌 공간 기능 회복, 농촌 일자리 창출 등도 강조되는 중요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농업투자지원정책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독일은 패전 후에 주로 유럽 재부흥프로그램(ERP)에 의해 1955년 농업기본법 제정, 1956년 '녹색계획' 수립 등으로 농업 투자 재원을 확보했다. 주로 농업렌텐방크(Landwirtschaftliche Rentenbank)가 농업 투융자 창구 역할을 맡았다. 특히 1973년부터는 농업 지원업무가 연방정부에서 주 정부로 이관되면서 각 지역의 실정에 맞는 혁신적이고 유연한 투자정책을 펼 수 있었다.
독일 농정의 철학과 원칙은 주관부처의 이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농림부가 아닌 '식량농림부(Ministry für Ernährun, Landwirtschft, Forsten)'이다. 농부들만을 위한 농정이 아닌 전 국민의 먹거리, 식량 주권을 책임지려는 '국민 농정'의 깊은 의미와 비장한 결의가 느껴진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농업은 어쩔 수 없이 사양산업이다. 시대의 조류를 정부가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다. 농가 호수와 농가 인구도 지속적으로 감소추세다. 농부는 전 국민의 2% 남짓 남았다. 농업에 임업, 수산업을 다 합쳐도 독일 국내 총생산액의 1%가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농업을 포기하지 않는다. 대농이나 기업농만 챙기지 않고 가족농과 소농도 다 포용하는 정책을 편다. 그래서 농부를 육성하는 농업교육을 유난히 강조한다. 이른바 녹색직업(Gruenen Berufe)으로서 농부는 단순한 직업이 아닌 미래가 보장된 평생직장으로 인식되고 대접받는다. 중학교 과정부터 수만 명의 독일 청소년과 청년들이 농부가 되려고 농업학교(직업학교; Hauftschule)에서 농사공부를 시작한다.
독일 농부의 농지는 한국 농부의 40배
독일의 국토 면적은 3500만 ha에 달한다. 한반도의 1.6배 규모다. 한국과 반대로 평지가 70% 정도다. 농지는 국토면적의 약 48% 1700만 ha 수준이다. 한국의 농지면적 169만 ha의 10배 수준이다. 그런데 농가당 농지면적은 한국의 40배가 넘는다. 한국은 1.5ha에 불과한데 독일은 50ha에 달한다. 더욱이 농가들이 자꾸 감소하면서 농가당 농사짓는 평균면적도 늘어나는 추세다. 이같은 농가감소-평균농지의 증가 현상은 독일뿐 아니라 EU 국가 전체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30만 농가 수준의 전체 농가 중에서 가족 단위로 농사를 짓는 가족농이 94%에 달한다. 이러한 가족농 가운데 상대적으로 소농 수준인 55% 정도는 농업 관련 사업자, 또는 비전문농가이다. 나머지는 평균 50~60ha 규모의 농사를 짓는 전문농업인으로 등록되어 있다.
독일 농업의 뼈대와 바탕을 이루는 가족농을 유지하는 결정적 비결은 농지 상속 원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일 농가에서는 자녀 가운데 장남이 농지를 단독으로 상속받는 게 원칙이다. 농지를 자녀들끼리 분할하지 않는다. 가족농으로 자생할 수 있도록 적정한 농업경영 규모를 유지하려는 목적이다. 장남이 승계를 원하지 않으면 차남, 딸 순으로 농지 상속 권한이 승계된다.
농지 상속 원칙에서 보듯 독일의 농가에서 부모에서 자녀 후계농으로 2대가 농사를 가업으로 승계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농업전문대학에는 농사장인(Meister)이 되려는 20대 후계농 청년들이 끊이지 않고 수혈된다. 농사기술과 사업 경쟁력을 겸비한 전문농업인이 되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농부는 유기농, 농촌휴양으로 국토를 관리하는 정원사
무엇보다 독일 농부들은 유기농과 친환경적 농사를 고집한다. 유기농의 기준도 까다롭다. 독일 정부에서 정하는 기준과 유럽연합에서 정하는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그런데 EU의 국가에서 수입하는 농산물은 다소 기준이 낮다. 그래서 독일 소비자들은 기준이 높은 독일 농가의 자국 농산물을 선호한다.
철저한 유기농 기준 덕분에 유럽에서 광우병 피해가 가장 적은 곳이 독일이었다. 소, 돼지 등 동물에게 사료 대신 자연 방목하며 초지의 풀만 먹이며 친환경적으로 사육해서 그렇다는 과학적인 분석이다. 더욱이 1ha마다 1마리 꼴로 자연 방목되는 소는 농지와 국토를 친환경적, 생태적으로 관리하고 보전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그렇게 자연환경이 보전된 농촌을 도시민들은 휴가지, 휴양지로 삼는다. 국민들은 독일의 농부를 '국토의 정원사', '국민의 별장지기'로 부르며 고마워한다. 대농, 기업농이 주도하는 농업 질서를 따라가지 못하는 소농, 가족농들은 농가와 농지를 이용해 농박을 하거나 농장체험을 한다. 천혜의 자연환경, 농촌경관, 그리고 전통문화가 농외소득 수입원을 창출하는 밑천이다. 정리정돈이 잘 된 청결한 농가 환경이 경쟁력을 보장한다.
독일의 도시민들은 여름방학, 봄방학, 가을 방학을 이용해 자녀들을 동반하고 농박을 찾는다. 대개 유흥이나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휴양과 치유가 목적이다. 아이들은 초지, 숲, 산, 강, 호수 등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어른들은 소, 돼지 등 가축들을 기르는 농가에서 치즈, 햄, 소시지 등 육가공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유기농을 하든, 농촌휴양을 하든 독일의 농가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 EU와 독일 정부의 각종 농업보조금 지원 프로그램은 있으나 실제 지원받기는 쉽지 않다. 정기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각종 서류, 증빙자료 등도 만만치 않고 평가나 검사도 녹록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속 편하게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2차 가공이나 3차 유통부터는 농업으로 보지 않고 사업으로 간주해 농업보조 대상이 아니다.
국민의 세금을 직접 지불받는 독일의 공익농부
EU는 유기농, 동물보호적 축산, 생태관광 등 EU공동농업정책(CAP)를 집행하기 위해 2010년 기준으로 EU 전체 예산의 46.5%인 571억 유로를 농정분야에 투입했다. 놀라운 것은 농정예산의 76.5%인 437억 유로를 농가직불금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EU는 2003년 공동농업정책(CAP; Common Agricultural Policy) 개혁을 계기로 직불금 예산은 전체 농정예산의 70%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EU의 직불금 지원예산을 통해 독일의 경우 당시 약 19만 농가에 농가당 연평균 1590유로가 지급됐다. 총 예산은 3억 유로에 달한다. 그리고 전체 농가의 1.5% 가량인 대농 5690농가에는 평균 28만3105유로가 지원됐다. 총 16억 1200만 유로의 금액이다. 기본적으로 1ha마다 340유로를 지원받았다.
중요한 것은 직불금 예산이나 지원 규모 등의 양적 성과가 아니다. 직불금을 지원하는 이유이자 철학이다. 독일의 농업직불금은 '문화경관(kulturlundschaft) 직불금'으로 불린다. "기후변화와 토양침식·오염을 방지하고, 생태계 다양성을 유지하며, 문화경관을 보전하고, 동물 애호적 사육을 실천하는 농가를 지원한다"는 취지이자 원칙이다. 환경보전직불(The Green Direct Payment)을 강조해 국가별 직불금 예산의 30%를 추가지급 할 수 있다. 재원은 EU 50%, 독일 정부 30%, 주 정부 20%로 분담한다.
특히 2003년 공동농업정책 개혁으로 이전에 농산물 생산실적에 연동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품목별 직불 방식에서 생산 규모와 연계되지 않는 '생산 중립적 단일직불제(Single Payment Scheme, SPS)'로 전환했다. 이는 농업경영주에게 예측 가능한 안정적 소득을 보장하는 데 최우선 목표를 둔 것이다. 자신의 생산능력, 규모와 무관하게 소득보조를 보장받음으로써 시장의 수요에 연동해 농산물 생산을 자가조절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또 개혁된 직불제는 기본직불(SPS)과 환경, 조건불리 등 가산직불을 병행한다. 기본직불은 가격지지 철폐에 따른 농민소득 감소분을 보전하기 위해 EU 재원으로 지불한다. 그리고 가산직불은 EU 공동농업정책의 농촌개발 정책에 따라 각 회원국과 지방정부의 재량에 따라 시행한다. 특히 환경지불은 농민들의 상호준수 요건을 넘어서는 수준의 환경보전 활동으로 공공재를 생산하는 소요비용과 그에 따른 소득감소분을 국가가 보상해준다는 취지이다. 또 조건불리지역 지불은 산악, 고위도, 경사 지역 등 자연의 제한이 있는 경우 추가로 더 지불한다.
청년 농업인과 소농은 상대적으로 우대한다. 2014년 '젊은 농업인 직불금(YFS, Young Farmers Scheme)' 지원제도를 신설, 40세 이하 신규농업종사자에게 최대 5년간 기본직불금의 25%를 추가로 지불하고 있다. 최대 7만 유로까지는 일시불로 지급할 수 있다. '젊은 농업인 직불금'의 연간 예산 규모는 8억 5600만 유로(약 1조 3천억 원) 규모에 달한다. 젊은 농업인에게는 직불금 외에도 공유지 임대, 농업 시설물 설비 보조금 10%도 따로 지원된다. 소농지불은 소농이라면 경지 규모에 무관하게 정액 지불한다. 지급대상자 평균 수급액 또는 1ha당 평균지급액의 3배 수준에 달한다.
한국의 직불금 제도는 10여 종류에 달한다. 하지만 제도가 목적, 예산, 법률, 지침, 운영기준 등이 다르고 체계도 복잡하다.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다. EU처럼 농업·농촌이라는 공공재에 대해 공익적·다원적 기능을 보상한다는 철학과 원칙을 바탕으로 실효성 있게 정리·정돈할 필요가 있다.
농민회, 농업회의소, 농업협동조합으로 연대하는 독일의 농부들
독일의 농부들은 혼자 고립되지 않는다. 혼자만 잘 먹고 잘살겠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농민단체는 독일의 노동조합만큼 조직적이고 강력하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독일의 농업생산자단체로는 독일농민총연맹(Deutscher Bauernverband DBV), 농업회의소(Landwirtschaftskammern), 농업협동조합(Genossenschaften)이 대표적이다.
독일농민총연맹(Deutscher Bauernverband DBV)은 연방 단위의 농민단체로서 노동조합과 비슷한 성격과 위상을 지닌다. 자영농과 임차농은 물론 농업노동자, 농업기업가와 거대지주도 회원이 될 수 있다. 조직형태는 선거제도부터 대농에 유리하게 위계 중심적이고 비민주적으로 되어 있어 소농, 가족농들은 참여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치적인 성향도 보수정당에 기울어 있다는 평가다. 그래서 그런지 유럽의 농민당은 진보적이지 않고 보수적이다.
독일의 지역 농정은 농업청(Landwirtschaftsamt)과 농업회의소(Landwirtschaftskammern)로 이원화된 지역 농정 체제로 특징된다. 관리주체인 16개 연방의 주 정부가 산하 행정기관인 농업청을 통해 직접 농정을 수행하거나, 민간기구인 농업회의소에 농정업무를 위임해 간접적으로 관리하는 2가지 형태를 선택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농업회의소를 운영하는 국가는 독일 이외에도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이 있으나 농정업무를 위임받아 대행하는 곳은 독일이 유일하다.
독일의 농업회의소는 농업경영자와 가족, 농업노동자를 회원으로 한다. 산업부문의 상공회의소와 유사한 형태이다. 다만 상공회의소와는 달리 주 정부(주 의회)에 의해 설치 근거법안이 제정된 민간거버넌스 형태의 기구로서 연방조직이나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 최초의 농업회의소는 1894년 프로이센에서 설립되었다. 현재 독일에서 농업회의소가 조직되어 있는 곳은 바이에른주 등 구 서독지역 4개 주 정도이다.
농업회의소의 재정은 운영비에 대한 보조, 주 정부의 지원, 자체 수입 등으로 충당되는데 자체 수입은 농업경영체에 대한 과세권에서 발생한다. 아무래도 주 정부의 재정지원에 의존하기 때문에 예산집행에 관해 주 정부의 감사와 통제를 받는다. 사업의 기획과 의사 결정은 거의 농업회의소 본부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군 지소는 군 단위 집행 사업소 역할을 수행한다.
농업회의소의 주요 업무는 농업생산물의 수익성 제고와 환경친화적 개선, 직업교육 실시, 농업경영, 생산기술 및 유통문제 등 상담·지도, 시장 상황 정보 제공. 환경보호 문제와 농촌 공간 정비 문제 참여, 농림업 문제에 대한 행정기관 업무 지원 등이다.
국민·공익·지역·협동의 4대 농정패러다임 전환을
'농부의 나라' 독일의 농부처럼 한국 농부도 자랑스럽고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법이나 제도, 정책 정도를 고치는 노력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농정의 틀부터 패러다임부터 크게 손 봐야 한다. 이름하여 '국민 농정', '공익 농정', '지역 농정', '협동 농정' 4대 농정전환 패러다임으로 혁신하자고 주장한다.
우선 농민만을 염두에 둔 농정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국민 농정'이라야 한다. 인구수, 생산액, 존재감 등 공히 5%도 채 안 되는 생산자 농민들끼리의 역부족, 무기력, 불가항력의 수렁 상태에서 일단 벗어나야 한다. 나머지 95%인 소비자인 도시민, 노동자, 국민들이 함께 농정의 주체로 나설 때 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농부들이 국민의 생명을 위하는 농심으로 농사를 지으면, 국민은 농민의 생활을 걱정하는 민심으로 보살펴야 한다. 아예 귀농해서 농민군에 합류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애초 농업은 국가기간산업이라야 한다. 국민의 생존권과 국가의 식량 주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농산업이다. '공익 농정'으로 농업은 국가기간산업 대접을 받아야 하고 농업에 복무하는 농부들은 공무원 대우를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먹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먹거리를 생산해 국민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농부의 존귀함, 농업의 중요성은 말로 할 필요가 없다.
지금 한국은 THAAD(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종말 단계 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와 TPP(Trans-Pacific Partnership;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을 내세운 미국, 그리고 RCEP(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과 AIIB(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를 내건 중국 사이에 낀 박쥐 또는 샌드위치 신세다. 여기에 일본과 러시아도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있다. 마치 구한말을 연상케 한다.
이같은 세계열강과 초국적 자본과 자유무역 전쟁에서 한국 농업은 승산이 희박하다. 그런 살벌한 국제정세 속에서 주권국가이지만 국가 단위, 중앙정부 차원에서 솔직히 자주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듯하다. 농산물가격안정기금 조례, 지역순환농업네트워크처럼 지역 단위, 마을 단위에서 '지역 농정차원으로 지역공동체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보자.
그리고 '협동 농정'이라야 한다. 독불장군 농사는 불가능하다. 혼자 잘 살면 아무 재미도 없다. 그래서 협동 농정을 하자면 농부마다 '사회적 농민'이 되어야 한다. 소농, 가족농이 모여 협동조합을 만들자. 농부 말고도 교사, 예술인, 기술자, 기업가 등 서로 다른,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농장이 아닌 농촌마을을 이루자. 나와 내 가족이 아닌 남과 이웃도 더불어 챙기자. 사회적 농민들이 모여 사회경제적 농업으로 사회생태적 농촌을 일구자. 독일처럼, EU처럼 모두가 조금씩 농부인 '농부의 나라'를 함께 세우자.
무엇보다 '가족농'들은 개별적으로 수익성이나 상업성만 좇으며 경쟁하지 않는다. 농업학교를 졸업한 정예의 농민들은 생산자조합(gemeinschaft), 농업협동조합(genossenschaf)을 이루어 공동으로, 유기적으로 협동하고 연대한다. 또 지역사회가 농업회의소를 통해 지역농정을 사실상 자조·자치하며 WTO, 곡물메이저 등이 지배하는 세계농업 질서에도 공고하고 지혜롭게 맞선다. 지난 2014년 봄과 2016년 가을에 '농부의 나라' 독일, 오스트리아의 농촌공동체와 친환경 농가를 20여 일 둘러본 소감이자 깨달음이다.
그런데 농정을 집행하는 법과 정책만 보면 한국도 독일의 사정과 크게 다르거나 모자라지 않은 듯하다. '농어업인 삶의 질 향상 및 농어촌지역 개발촉진에 관한 특별법' 하나만 봐도 그렇다. 법의 목적부터 다분히 합리적이고 이상적이다. "농어업인 등의 복지증진, 농어촌의 교육여건 개선 및 농어촌의 종합적·체계적인 개발촉진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농어업인 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지역 간 균형발전을 도모한다."
법의 기본이념은 더 훌륭하다. "농어촌과 도시지역 간에 생활 격차를 해소하고, 교류를 활성화함으로써 농어촌 주민이 도시지역 주민과 균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농어촌이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법 조항이나 문구로만 보면 흠잡을 데가 잘 보이지 않는다.
▲ 유기농종자 독일의 농부들은 종자부터 유기농으로 파종한다 ⓒ 정기석
EU 농업개혁 직불금으로 독일 농부는 행복해졌다
이처럼 한국과 독일의 농정 정책의 방향과 철학은 겉으로는, 크게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농정 현실은 한국과 독일의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너무 다르고 멀어 보인다. 우선 '쌔가 빠지는' 농사를 짓는 한국 농부들의 삶은 힘겹다. 비록 독일 농부들도 '뼛골 빠지는' 농사를 짓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의 삶은 안정적이다. 농사로 좀처럼 먹고살기 어려운 한국의 농부들은, 최소한 먹고사는 걱정이 크지 않은 독일의 농부들처럼 농사일에 자부심이나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
무엇보다 한국 농부들은 독일 농부들처럼 농사의 가업을 자식에게 굳이 물려주려 하지 않는다. 자꾸 도시의 자본주의 노예 신세로 전락할지언정 도시 생업의 전쟁터로 내몬다. 농부로서의 일생은 결코 자랑스럽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는 게 이유다. 대체 왜 그런가. 왜 한국 농부와 독일 농부의 마음가짐과 생활환경은 그토록 다른가. 그 의문과 숙제를 풀기 위해 독일의 농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농부의 나라' 독일의 4가지 농정 기본목표는 '농촌 지역의 삶의 질 개선, 국민에게 고품질의 농산물·식료품 적절한 가격 공급, 자연적 생활기반 확보와 개선, 농업 관련 대외무역 관계 개선과 세계 식량 상황 개선 등이다. 1990년대 이후에는 영농활동과 병행하는 추가 소득원 개발, 농업의 다원적 기능 강조, 식품의 안전성 강조 등의 과제를 추가해 함께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독일 농정의 뼈대와 바탕은 EU의 농업개혁(Agenda 2000)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99년, EU 이사회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7년간 시행할 농업개혁안(Agenda 2000)을 합의한다. EU 공동농업정책을 기존의 농업 중심 정책에서 농촌개발, 환경보전 등도 고려한 통합정책으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농업생산의 1축 외에 농촌개발의 제2축(second pillar)을 새로 도입했다. 지지가격 수준의 인하와 직접지불에 의한 부분적 보상, 환경정책의 EU 공동농업정책 통합, 농업의 다원적 기능 접근방식에 의한 농촌개발, 정책 시행에 있어 회원국의 재량권 확대 등을 주요 원칙으로 삼았다.
무엇보다 '직접지불' 원칙을 강화한 게 눈에 띈다. 우선 경종 분야(수도작, 채소, 화훼, 과수, 특작, 복합영농 등)는 직접지불에 의한 보상을 톤당 54.34유로에서 63유로로 인상했다. 또 쇠고기나 우유의 지지가격을 단계적으로 인하하는 대신 직접지불로 보상하기로 했다. 특히 직접지불로 배정된 EU 예산의 20%까지 회원국의 재량에 따라 농촌개발사업분야로 전용할 수 있게 했다.
▲ 켐텐농업국바이에른의 문화경관직불금을 설명하는 독일 켐텐의 요지프 힘머 前 농업국장(모자 쓴 이) ⓒ 정기석
1956년 녹색계획에서 아젠다 2000까지
이렇게 아젠다(Agenda) 2000이 타결되면서 독일 농부들에게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EU 공동농업정책에 따른 독일의 농업지원 규모가 독일연방 정부의 지원 규모보다 더 커졌다. 우선 개별경영체에 대한 농업투자지원프로그램(AFP)에서 주업농과 부업농이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양돈농가도 지원대상에 포함되고 자본과 노동을 적게 들이는 '소농' 들의 조방적 경영과 친환경적 영농 지원도 강화되었다. 가공·유통시설 확충, 농촌 공간 기능 회복, 농촌 일자리 창출 등도 강조되는 중요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농업투자지원정책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독일은 패전 후에 주로 유럽 재부흥프로그램(ERP)에 의해 1955년 농업기본법 제정, 1956년 '녹색계획' 수립 등으로 농업 투자 재원을 확보했다. 주로 농업렌텐방크(Landwirtschaftliche Rentenbank)가 농업 투융자 창구 역할을 맡았다. 특히 1973년부터는 농업 지원업무가 연방정부에서 주 정부로 이관되면서 각 지역의 실정에 맞는 혁신적이고 유연한 투자정책을 펼 수 있었다.
독일 농정의 철학과 원칙은 주관부처의 이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농림부가 아닌 '식량농림부(Ministry für Ernährun, Landwirtschft, Forsten)'이다. 농부들만을 위한 농정이 아닌 전 국민의 먹거리, 식량 주권을 책임지려는 '국민 농정'의 깊은 의미와 비장한 결의가 느껴진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농업은 어쩔 수 없이 사양산업이다. 시대의 조류를 정부가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다. 농가 호수와 농가 인구도 지속적으로 감소추세다. 농부는 전 국민의 2% 남짓 남았다. 농업에 임업, 수산업을 다 합쳐도 독일 국내 총생산액의 1%가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농업을 포기하지 않는다. 대농이나 기업농만 챙기지 않고 가족농과 소농도 다 포용하는 정책을 편다. 그래서 농부를 육성하는 농업교육을 유난히 강조한다. 이른바 녹색직업(Gruenen Berufe)으로서 농부는 단순한 직업이 아닌 미래가 보장된 평생직장으로 인식되고 대접받는다. 중학교 과정부터 수만 명의 독일 청소년과 청년들이 농부가 되려고 농업학교(직업학교; Hauftschule)에서 농사공부를 시작한다.
▲ 카이센호프 가족농가180ha의 대농인 오스트리아 카이센호프 육우 가족농 ⓒ 정기석
독일 농부의 농지는 한국 농부의 40배
독일의 국토 면적은 3500만 ha에 달한다. 한반도의 1.6배 규모다. 한국과 반대로 평지가 70% 정도다. 농지는 국토면적의 약 48% 1700만 ha 수준이다. 한국의 농지면적 169만 ha의 10배 수준이다. 그런데 농가당 농지면적은 한국의 40배가 넘는다. 한국은 1.5ha에 불과한데 독일은 50ha에 달한다. 더욱이 농가들이 자꾸 감소하면서 농가당 농사짓는 평균면적도 늘어나는 추세다. 이같은 농가감소-평균농지의 증가 현상은 독일뿐 아니라 EU 국가 전체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30만 농가 수준의 전체 농가 중에서 가족 단위로 농사를 짓는 가족농이 94%에 달한다. 이러한 가족농 가운데 상대적으로 소농 수준인 55% 정도는 농업 관련 사업자, 또는 비전문농가이다. 나머지는 평균 50~60ha 규모의 농사를 짓는 전문농업인으로 등록되어 있다.
독일 농업의 뼈대와 바탕을 이루는 가족농을 유지하는 결정적 비결은 농지 상속 원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일 농가에서는 자녀 가운데 장남이 농지를 단독으로 상속받는 게 원칙이다. 농지를 자녀들끼리 분할하지 않는다. 가족농으로 자생할 수 있도록 적정한 농업경영 규모를 유지하려는 목적이다. 장남이 승계를 원하지 않으면 차남, 딸 순으로 농지 상속 권한이 승계된다.
농지 상속 원칙에서 보듯 독일의 농가에서 부모에서 자녀 후계농으로 2대가 농사를 가업으로 승계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농업전문대학에는 농사장인(Meister)이 되려는 20대 후계농 청년들이 끊이지 않고 수혈된다. 농사기술과 사업 경쟁력을 겸비한 전문농업인이 되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메르켈총리 독일의 농부들은 합리적이고 권위적이지 않은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독일 정부가 먹여살린다. ⓒ 정기석
독일의 농부는 유기농, 농촌휴양으로 국토를 관리하는 정원사
무엇보다 독일 농부들은 유기농과 친환경적 농사를 고집한다. 유기농의 기준도 까다롭다. 독일 정부에서 정하는 기준과 유럽연합에서 정하는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그런데 EU의 국가에서 수입하는 농산물은 다소 기준이 낮다. 그래서 독일 소비자들은 기준이 높은 독일 농가의 자국 농산물을 선호한다.
철저한 유기농 기준 덕분에 유럽에서 광우병 피해가 가장 적은 곳이 독일이었다. 소, 돼지 등 동물에게 사료 대신 자연 방목하며 초지의 풀만 먹이며 친환경적으로 사육해서 그렇다는 과학적인 분석이다. 더욱이 1ha마다 1마리 꼴로 자연 방목되는 소는 농지와 국토를 친환경적, 생태적으로 관리하고 보전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그렇게 자연환경이 보전된 농촌을 도시민들은 휴가지, 휴양지로 삼는다. 국민들은 독일의 농부를 '국토의 정원사', '국민의 별장지기'로 부르며 고마워한다. 대농, 기업농이 주도하는 농업 질서를 따라가지 못하는 소농, 가족농들은 농가와 농지를 이용해 농박을 하거나 농장체험을 한다. 천혜의 자연환경, 농촌경관, 그리고 전통문화가 농외소득 수입원을 창출하는 밑천이다. 정리정돈이 잘 된 청결한 농가 환경이 경쟁력을 보장한다.
독일의 도시민들은 여름방학, 봄방학, 가을 방학을 이용해 자녀들을 동반하고 농박을 찾는다. 대개 유흥이나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휴양과 치유가 목적이다. 아이들은 초지, 숲, 산, 강, 호수 등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어른들은 소, 돼지 등 가축들을 기르는 농가에서 치즈, 햄, 소시지 등 육가공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유기농을 하든, 농촌휴양을 하든 독일의 농가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 EU와 독일 정부의 각종 농업보조금 지원 프로그램은 있으나 실제 지원받기는 쉽지 않다. 정기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각종 서류, 증빙자료 등도 만만치 않고 평가나 검사도 녹록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속 편하게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2차 가공이나 3차 유통부터는 농업으로 보지 않고 사업으로 간주해 농업보조 대상이 아니다.
▲ 호텔 소들이 뛰노는 농장과 초지를 그대로 재연한 카우프보이렌의 호텔 ⓒ 정기석
국민의 세금을 직접 지불받는 독일의 공익농부
EU는 유기농, 동물보호적 축산, 생태관광 등 EU공동농업정책(CAP)를 집행하기 위해 2010년 기준으로 EU 전체 예산의 46.5%인 571억 유로를 농정분야에 투입했다. 놀라운 것은 농정예산의 76.5%인 437억 유로를 농가직불금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EU는 2003년 공동농업정책(CAP; Common Agricultural Policy) 개혁을 계기로 직불금 예산은 전체 농정예산의 70%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EU의 직불금 지원예산을 통해 독일의 경우 당시 약 19만 농가에 농가당 연평균 1590유로가 지급됐다. 총 예산은 3억 유로에 달한다. 그리고 전체 농가의 1.5% 가량인 대농 5690농가에는 평균 28만3105유로가 지원됐다. 총 16억 1200만 유로의 금액이다. 기본적으로 1ha마다 340유로를 지원받았다.
중요한 것은 직불금 예산이나 지원 규모 등의 양적 성과가 아니다. 직불금을 지원하는 이유이자 철학이다. 독일의 농업직불금은 '문화경관(kulturlundschaft) 직불금'으로 불린다. "기후변화와 토양침식·오염을 방지하고, 생태계 다양성을 유지하며, 문화경관을 보전하고, 동물 애호적 사육을 실천하는 농가를 지원한다"는 취지이자 원칙이다. 환경보전직불(The Green Direct Payment)을 강조해 국가별 직불금 예산의 30%를 추가지급 할 수 있다. 재원은 EU 50%, 독일 정부 30%, 주 정부 20%로 분담한다.
특히 2003년 공동농업정책 개혁으로 이전에 농산물 생산실적에 연동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품목별 직불 방식에서 생산 규모와 연계되지 않는 '생산 중립적 단일직불제(Single Payment Scheme, SPS)'로 전환했다. 이는 농업경영주에게 예측 가능한 안정적 소득을 보장하는 데 최우선 목표를 둔 것이다. 자신의 생산능력, 규모와 무관하게 소득보조를 보장받음으로써 시장의 수요에 연동해 농산물 생산을 자가조절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또 개혁된 직불제는 기본직불(SPS)과 환경, 조건불리 등 가산직불을 병행한다. 기본직불은 가격지지 철폐에 따른 농민소득 감소분을 보전하기 위해 EU 재원으로 지불한다. 그리고 가산직불은 EU 공동농업정책의 농촌개발 정책에 따라 각 회원국과 지방정부의 재량에 따라 시행한다. 특히 환경지불은 농민들의 상호준수 요건을 넘어서는 수준의 환경보전 활동으로 공공재를 생산하는 소요비용과 그에 따른 소득감소분을 국가가 보상해준다는 취지이다. 또 조건불리지역 지불은 산악, 고위도, 경사 지역 등 자연의 제한이 있는 경우 추가로 더 지불한다.
청년 농업인과 소농은 상대적으로 우대한다. 2014년 '젊은 농업인 직불금(YFS, Young Farmers Scheme)' 지원제도를 신설, 40세 이하 신규농업종사자에게 최대 5년간 기본직불금의 25%를 추가로 지불하고 있다. 최대 7만 유로까지는 일시불로 지급할 수 있다. '젊은 농업인 직불금'의 연간 예산 규모는 8억 5600만 유로(약 1조 3천억 원) 규모에 달한다. 젊은 농업인에게는 직불금 외에도 공유지 임대, 농업 시설물 설비 보조금 10%도 따로 지원된다. 소농지불은 소농이라면 경지 규모에 무관하게 정액 지불한다. 지급대상자 평균 수급액 또는 1ha당 평균지급액의 3배 수준에 달한다.
한국의 직불금 제도는 10여 종류에 달한다. 하지만 제도가 목적, 예산, 법률, 지침, 운영기준 등이 다르고 체계도 복잡하다.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다. EU처럼 농업·농촌이라는 공공재에 대해 공익적·다원적 기능을 보상한다는 철학과 원칙을 바탕으로 실효성 있게 정리·정돈할 필요가 있다.
▲ 전국농민대회 모두가 조금씩 농부인 ‘농부의 나라’를 염원하며 ‘아스팔트농사’를 짓는 전국농민회총연합 ⓒ 정기석
농민회, 농업회의소, 농업협동조합으로 연대하는 독일의 농부들
독일의 농부들은 혼자 고립되지 않는다. 혼자만 잘 먹고 잘살겠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농민단체는 독일의 노동조합만큼 조직적이고 강력하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독일의 농업생산자단체로는 독일농민총연맹(Deutscher Bauernverband DBV), 농업회의소(Landwirtschaftskammern), 농업협동조합(Genossenschaften)이 대표적이다.
독일농민총연맹(Deutscher Bauernverband DBV)은 연방 단위의 농민단체로서 노동조합과 비슷한 성격과 위상을 지닌다. 자영농과 임차농은 물론 농업노동자, 농업기업가와 거대지주도 회원이 될 수 있다. 조직형태는 선거제도부터 대농에 유리하게 위계 중심적이고 비민주적으로 되어 있어 소농, 가족농들은 참여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치적인 성향도 보수정당에 기울어 있다는 평가다. 그래서 그런지 유럽의 농민당은 진보적이지 않고 보수적이다.
독일의 지역 농정은 농업청(Landwirtschaftsamt)과 농업회의소(Landwirtschaftskammern)로 이원화된 지역 농정 체제로 특징된다. 관리주체인 16개 연방의 주 정부가 산하 행정기관인 농업청을 통해 직접 농정을 수행하거나, 민간기구인 농업회의소에 농정업무를 위임해 간접적으로 관리하는 2가지 형태를 선택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농업회의소를 운영하는 국가는 독일 이외에도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이 있으나 농정업무를 위임받아 대행하는 곳은 독일이 유일하다.
독일의 농업회의소는 농업경영자와 가족, 농업노동자를 회원으로 한다. 산업부문의 상공회의소와 유사한 형태이다. 다만 상공회의소와는 달리 주 정부(주 의회)에 의해 설치 근거법안이 제정된 민간거버넌스 형태의 기구로서 연방조직이나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 최초의 농업회의소는 1894년 프로이센에서 설립되었다. 현재 독일에서 농업회의소가 조직되어 있는 곳은 바이에른주 등 구 서독지역 4개 주 정도이다.
농업회의소의 재정은 운영비에 대한 보조, 주 정부의 지원, 자체 수입 등으로 충당되는데 자체 수입은 농업경영체에 대한 과세권에서 발생한다. 아무래도 주 정부의 재정지원에 의존하기 때문에 예산집행에 관해 주 정부의 감사와 통제를 받는다. 사업의 기획과 의사 결정은 거의 농업회의소 본부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군 지소는 군 단위 집행 사업소 역할을 수행한다.
농업회의소의 주요 업무는 농업생산물의 수익성 제고와 환경친화적 개선, 직업교육 실시, 농업경영, 생산기술 및 유통문제 등 상담·지도, 시장 상황 정보 제공. 환경보호 문제와 농촌 공간 정비 문제 참여, 농림업 문제에 대한 행정기관 업무 지원 등이다.
▲ 글로버스유기농산물과 유기농식품을 주로 팔고 있는 독일 글로버스 유기농마트 ⓒ 정기석
국민·공익·지역·협동의 4대 농정패러다임 전환을
'농부의 나라' 독일의 농부처럼 한국 농부도 자랑스럽고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법이나 제도, 정책 정도를 고치는 노력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농정의 틀부터 패러다임부터 크게 손 봐야 한다. 이름하여 '국민 농정', '공익 농정', '지역 농정', '협동 농정' 4대 농정전환 패러다임으로 혁신하자고 주장한다.
우선 농민만을 염두에 둔 농정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국민 농정'이라야 한다. 인구수, 생산액, 존재감 등 공히 5%도 채 안 되는 생산자 농민들끼리의 역부족, 무기력, 불가항력의 수렁 상태에서 일단 벗어나야 한다. 나머지 95%인 소비자인 도시민, 노동자, 국민들이 함께 농정의 주체로 나설 때 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농부들이 국민의 생명을 위하는 농심으로 농사를 지으면, 국민은 농민의 생활을 걱정하는 민심으로 보살펴야 한다. 아예 귀농해서 농민군에 합류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애초 농업은 국가기간산업이라야 한다. 국민의 생존권과 국가의 식량 주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농산업이다. '공익 농정'으로 농업은 국가기간산업 대접을 받아야 하고 농업에 복무하는 농부들은 공무원 대우를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먹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먹거리를 생산해 국민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농부의 존귀함, 농업의 중요성은 말로 할 필요가 없다.
지금 한국은 THAAD(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종말 단계 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와 TPP(Trans-Pacific Partnership;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을 내세운 미국, 그리고 RCEP(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과 AIIB(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를 내건 중국 사이에 낀 박쥐 또는 샌드위치 신세다. 여기에 일본과 러시아도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있다. 마치 구한말을 연상케 한다.
이같은 세계열강과 초국적 자본과 자유무역 전쟁에서 한국 농업은 승산이 희박하다. 그런 살벌한 국제정세 속에서 주권국가이지만 국가 단위, 중앙정부 차원에서 솔직히 자주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듯하다. 농산물가격안정기금 조례, 지역순환농업네트워크처럼 지역 단위, 마을 단위에서 '지역 농정차원으로 지역공동체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보자.
그리고 '협동 농정'이라야 한다. 독불장군 농사는 불가능하다. 혼자 잘 살면 아무 재미도 없다. 그래서 협동 농정을 하자면 농부마다 '사회적 농민'이 되어야 한다. 소농, 가족농이 모여 협동조합을 만들자. 농부 말고도 교사, 예술인, 기술자, 기업가 등 서로 다른,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농장이 아닌 농촌마을을 이루자. 나와 내 가족이 아닌 남과 이웃도 더불어 챙기자. 사회적 농민들이 모여 사회경제적 농업으로 사회생태적 농촌을 일구자. 독일처럼, EU처럼 모두가 조금씩 농부인 '농부의 나라'를 함께 세우자.
덧붙이는 글
※ ‘독일의 농부’ : 문화경관 직불금, 가족농, 협동조합, 농업회의소, 농업학교, 유기농업, 로컬푸드, 사회안전망 등으로 국가와 정부의 돌봄과 보살핌을 받으며, ‘돈 버는 농업’이 아닌 ‘사람 사는 농촌’을 위한 ‘농부의 나라’를 지키며 살아가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 EU(유럽연합)의 ‘행복한 사회적 농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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