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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꽉 껴안으며 반가워한 사촌 여동생

동생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의 눈물 흘렸지요

등록|2017.02.21 14:46 수정|2017.02.22 14:15
지난 2월18일 사촌 누나의 아들 결혼식이 부천에서 있었습니다. 어릴 때는 사촌끼리 가끔 만나서 잘 어울렸지만 어른이 돼서 각자 가정을 이룬 다음부터는 집안의 큰 행사가 아닌 다음에는 얼굴을 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결혼식에 가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촌들 얼굴을 보겠구나 기대하며 시간에 맞춰 예식장에 도착했습니다.

예식장에 들어가니 아들이 결혼하는 사촌 누나의 얼굴이 무척 행복해보였습니다. 작은 사촌 누나도 보고 사촌 남동생도 봤습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하며 짧은 정담을 나눴습니다. 식장 안으로 들어갔을 땐가요. 사촌 여동생이 나를 보고 "오빠, 반가워!" 하며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동생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며 별안간 나를 꽉 껴안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했습니다. 동생이지만 나이는 나랑 같은 59살입니다. 겨우 7개월 앞서서 태어났을 뿐인데도 꼭 "오빠"라고 부르며 경어를 쓰곤 해서 여간 거북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대하라고 해도 빙그레 웃기만 할 뿐 고치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여동생의 강렬한 포옹에 나는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순간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나를 본 것이 얼마나 반갑고 좋았으면 그렇게 꽉 껴안았겠습니까. 그 마음이 그 태도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동생의 그런 모습에 한없이 행복하면서도 그에 걸맞은 반응을 제대로 보이지 못했습니다. 말도 하지 못했고 밝은 얼굴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동생에게 그저 미안하기만 했습니다.

그날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동생의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친척을 그렇게 강렬하게 반가워서 포옹을 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봤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교육용으로 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가까운 친구나 일가친척에게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동생이 나를 그렇게 좋게 생각하고 그런 태도를 보여줬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고맙기만 했습니다. 문득 46년 전 추억이 생각났습니다. 어찌 그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요.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니다가 6학년 때인 1971년 6월말에 두 누나가 있는 서울로 전학을 했습니다. 한 달 동안 서울에서 학교를 잘 다니다가 여름방학을 맞아 큰누나와 밤에 고향에 가게 됐습니다.

모기장을 들추고 부모님이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세 살 아래인 남동생이 "형아!" 하고 외치면서 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우리 형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루에서 얼싸안고 뒹굴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생활하다가 형제가 처음으로 헤어져서 한  달 만에 만났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형인 나는 그때의 일이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동생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날 동생과의 끈끈한 포옹은 지금도 여전히 내 가슴속에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나는 사촌 동생에게 조금이라도 잘해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동생이 자라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을 때에도 위로의 말 한 마디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동생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결혼식장에서 보여준 그 껴안음은 결코 쉽게 나올 수 없는 행동입니다.

내가 도대체 동생에게 어떠한 존재이기에 그런 엄청난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나를 그렇게 꽉 반갑게 껴안아준 사람이 있었나요? 없습니다. 부모님도 그렇게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백합꽃 같은 밝은 미소를 띠며 나를 껴안아준 동생에게 뭐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예식이 끝나고 돌아오며 동생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카카오톡을 통해서 그동안 종종 소식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동생도 바로 답장을 줬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동생이 내가 사는 인천에 와서 데이트해야겠다고 했습니다. 나도 동생이 사는 서울 집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냥 인사치레로 끝나는 형식적인 게 아니라 이번에는 꼭 실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소를 보내줬습니다. 다행히 며칠간 시간이 나는 관계로 이번에 반드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늦추다 보면 십중팔구는 가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2월20일 오후에 시간이 돼서 동생 집을 찾아갔습니다. 휴대폰으로 검색해보니 2시간이 넘었습니다. 전동차와 버스를 타고 동생이 사는 곳으로 갔습니다. 날이 추우니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동생은 손자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버스정류장으로 마중 나왔습니다.

날이 몹시 추웠습니다. 제법 아파트 단지가 커서 주위에 있는 마트에 들러 뭐라도 사갖고 들어가려 했는데 동생이 막았습니다. 가게가 여기에서 멀다고 그리고 그냥 들어가도 된다고 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동생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먼 거리를 찾아와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면서 동생은 과일을 정성껏 깎아줬습니다. 시집 간 딸과 같이 사는데 직장에 다니는 관계로 손자 둘을 돌보느라고 정신없이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사위가 퇴근해서 애들을 볼 때 동생은 나를 위해서 저녁을 차려줬습니다. 갈비를 찌려고 할 때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계란반찬을 해준다 했을 때도 그냥 있는 반찬으로 먹겠다고 했습니다. 식탁 의자에 앉아있으면서도 손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동생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동생은 따뜻한 국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는데 내가 계란반찬을 원하지 않아서 매우 아쉬워했습니다.

동생이 차려준 저녁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밥 더 먹으라고 해서 반 그릇을 더 먹었습니다. 깎아놓은 과일을 후식으로 다 먹은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동생 손자에게 과자 사주라고 돈을 주고 싶어서 주머니를 뒤졌는데 아, 이걸 어떻게 하나요? 만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몇 장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밖에서 거의 카드를 사용하기에 현금은 조금만 갖고 다니는데 그날은 주머니 사정이 영 말이 아니었습니다. 만 원짜리 두 장만 있어도 좀 나을 텐데 한 장뿐이니 그렇다고 천 원짜리까지 싹 털어서 이게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이라며 주기도 뭐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만 원짜리 한 장을 부끄럽게 동생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돈이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다고 하며. 동생은 아니라고 하며 알았다면서 잘 받아줬습니다.

그 다음입니다. 나는 동생의 태도를 보고 놀랐습니다. 옷장으로 가더니 서랍에서 목도리 하나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목도리 없이 춥게 다니는 것 같이 보였던지 그것을 내 목에 둘러주면서 몸 따뜻하게 하고 다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건강이 최고라며, 건강을 잃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고 엄마가 자식한테 따뜻하게 옷을 입히면서 사랑을 담뿍 담아 말하는 것처럼 그대로 했습니다. 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꾹 참았습니다. 동생의 그 천사 같은 마음씨가 이번에도 또 내 가슴을 울렸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했습니다. 메고 다니는 내 가방 안에 있는 목도리를 꺼내 보여줬습니다. 몹시 추우면 이걸로 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것 아니었더라면 동생 집에 있는 목도리 하나를 가져올 뻔했습니다. 날이 추우니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동생은 큰손자를 등에 업고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배웅해주었습니다. 버스 타기 전에 동생은 나에게 집에 도착하면 꼭 문자 보내달라며 오늘 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동생은 차를 타고 가는 나에게 문자를 보내줬습니다.

'오빠~~~ 조심히 귀가하시고 좋은 생각과 함께 삶을 사랑하길 바라요. 정말 고맙게 감사해요^^'

나는 이왕 서울 온 김에 조카나 보고 간다며 잠깐 중간에 내려서 조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가느라고 집에 많이 늦었습니다. 내가 연락이 없어 집에 잘 들어갔는지 걱정이 돼서 10시30분쯤 동생한테 문자가 또 왔습니다.

'오빠~~~ 아직 집에 도착 못했나요? 좋은 꿈 꾸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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