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걸음 멈추고 복직 서명해주는 시민들, 절로 힘나요"

한국산연 해고노동자 경남희망행진 동행기

등록|2017.02.23 18:09 수정|2017.02.23 18:09

희망행진 셋째날새벽부터 출근선전전에 나선 한국산연 노동자 ⓒ 정영현


"야 비 온다. 설거지물 받아 놔라."

한국산연 노동자들의 천막은 22일 새벽부터 분주하다. 한국산연 노동자들은 지난 20일부터 경남지방노동위원회의 복직판정 이행을 촉구하는 경남희망행진을 진행했다. 이날은 행진 셋째 날이었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 때문에 '행진'이 좀 더 고단해졌지만, 이들은 이런 악조건에 맞춰 생활할 줄 아는 노동자였다.

천막농성 169일 차, 우리는 경남희망행진에 나섰다

우리 희망이 보여요한국산연 노동자들이 희망행진 중 기자회견을 준비 하고 있다 ⓒ 정영현


한국산연 노동자들이 거리로 쫓겨난 것은 지난해 10월 1일. 사측은 지난해 2월부터 경영상 이유로 생산라인 폐쇄하겠다며 생산직 전 직원에 대한 해고를 예고했다. 또 사측은 정리해고한 생산직 자리를 외주로 돌리겠다고 밝혔다. 즉
정규직 생산사원 35명을 해고한 후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만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산연 노동자들의 시계는 해고일로 멈췄다. 아침에 회사로 출근하는 대신 거리로 출근했고, 한국산연 본사인 산켄전기가 있는 일본으로 원정투쟁도 다녀왔고, 한국산연 영업소가 있는 서울로 상경투쟁도 이어갔다. 일본 회사인 한국산연의 해고를 부당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일본 대사관과 영사관도 찾았다.

지난해 12월에는 기쁜 소식도 있었다. 경남지방노동위원회에서 한국산연 정리해고를 '부당해고'로 판정하고, 30일 내로 원직복직을 명령했다(관련 기사 : "부당해고 판정 났다, 한국산연 원직복직 이행해야"). 하지만 사측은 부당해고에 대한 노동자들의 교섭요구를 수용하기보다 중앙노동위원회에 항소하며 '부당해고'로 판정받은 노동자들을 거리에 방치했다.

천막농성 169일차. 한국산연 노동자들의 시간이다. 삶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천막농성장은 어느덧 집이 되었고, 거리는 작업장이 되었다. 사측의 중앙노동위원회 항소 이후 노동자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경남도민들에게 부당해고 판정을 무시하는 일본 기업의 부당성을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현장으로 복귀하고 싶었다. 이들은 지난 20일부터 '한국산연 정리해고 철회! 먹튀 외자기업 규제법안 마련! 일본군 위안부 사죄배상 촉구! 경남희망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22일은 한국산연 노동자들이 진주로 향하는 날이었다.

생산라인 폐쇄한 거 아닌가요?

노동자는 역시 하나다기자회견장에서 양성모 한국산연 지회장 ⓒ 정영현


노동자들은 경남희망행진에 나서기 전 현수막과 선전물을 챙겼다. 그때였다. 소형화물차가 노동자들을 가로질러 회사 주차장으로 향했다. "전체 생산직을 해고한 공장에 제품 나갈 것도 없는데 웬 화물차?"라는 물음에 양성모 전국금속노조 한국산연지회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수시로 화물차가 오갑니다. 어떨 때는 컨테이너도 들어오고, 대형 탑차도 들어옵니다."

생산직 전 사원이 해고됐지만 회사는 분주했다. 양성모 지회장은 이런 모습을 보며 정리해고를 "노조파괴를 위한 부당해고"라고 인식하고 있다. 사측으로부터 해고된 생산직의 상당수는 전국금속노동조합 소속 조합원이다. 한국산연이 위치한 마산수출자유무역지역 내 마지막 남은 금속노조 조합원이다. 나머지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들은 자본철수 등으로 사라졌고, 조합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양성모 지회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화물차를 바라보았고, 화물차는 희망행진을 준비하는 조합원들을 가로질러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측이 경남지방노동위원회의 판정을 수용했으면 화물차에는 현장노동자들이 생산한 제품이 담겼어야 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제품이 아닌 현수막과 피켓, 홍보물품 등을 차에 실었다.

"피곤하지만 좋아요."

진주에 도착했다. 진주시청을 찾은 노동자들은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진주시지부를 찾았다. 이날 진주시청 기자회견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3일째에 접어든 희망행진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이정희 조합원은 "피곤하지만 좋다"라는 다소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들려줬다. '피곤한데 좋을 수 있을까?'라는 원초적 의문이 있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난 2일동안 부산, 양산, 김해를 들렸는데 시민 중엔 발걸음을 멈추고 설명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분들이 있었고, 설명을 들은 분들은 꼭 서명(정리해고 철회 요구서명)을 해 줬어요. 예전에 일본에서 오래 사셨다는 어떤 어르신은 일본인이 곤조(근성)이 있어서 정리해고 철회까지 힘들 수도 있지만 본인이 변하고 세상이 변했듯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응원도 해 줬어요. 사람들을 만나고 응원을 들으니 절로 힘이 나죠."

사람은 사람에게 힘을 얻는다. 169일이라는 긴 시간이었지만 한국산연 노동자들은 여전히 관심과 응원에 소외돼 있었다. 무수한 정리해고와 노사분규 중에서 35명의 정리해고는 어떻게 보면 작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산연은 35명 개개인의 삶이 달린 일터였다. 일터에서 해고되는 것은 인생을 좌우하는 큰일이다. 그렇기에 한국산연 노동자들에게는 더욱 큰 관심과 응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국산연 노동자들은 희망행진을 통해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물론 힘든 일도 있다. 대부분의 노동자가 늙은 노부모의 건강을 걱정해야 하는 나이. 해고 기간 중에 어떤 노동자의 부모님은 암 판정을 받았다. 아이도 문제다. 어떤 이의 자녀는 대학에 입학했고, 어떤 이의 자녀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노부모의 부양과 자녀의 부양까지 책임져야 하는 나잇대의 한국산연 노동자들이 투쟁을 이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지역에 있는 많은 노동자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사실 일면식도 없지만 같은 노동자라는 이유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양성모 지회장은 모든 노동자가 힘든 상황에서도 한국산연 노동자의 상황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는 부분에 고마움을 표했다. 이러한 도움들이 있었기에 이날까지 싸울 수 있었다.

22일은 진주의료원 해고 노동자도 경남희망행진에 함께했다. 이들은 본인들도 해고되어 힘든 상황에서 십시일반 쌈짓돈을 모아 투쟁기금을 전달했다. 그뿐만 아니다. 경남희망행진을 하는 동안 효성중공업 노동자들이 김치와 물, 라면을 기부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어디서나 투쟁하는 노동자가 있다

해고자가 해고자에게진주의료원해고노동자들이 십시일반 모아 낸 기금을 한국산연지회에 전달했다 ⓒ 정영현


진주지역은 창원지역과 다르게 대규모 공단이 없다. 그래서 노사분규도 적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이날 경남희망행진에는 지역에서 투쟁하는 동지들이 함께 결합했다.

이날 전국공무원노조 진주시지부는 이창희 진주시장 규탄대회를 준비 중이었다. 지부는 이창희 시장이 '공무원 총궐기 참가 협박, 인사원칙 폐기, 노사합의 사항 외면, 어용노조 배후조정'을 했다고 말한다.

삼성교통노동자들도 함께했다. 이들은 '삼성교통은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인데, 산간벽지 노선에 대한 시의 운송원가 보상이 턱없이 부족해 삼성교통노동자들이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산연 노동자들이 진주를 찾은 이날 진주시청 앞에 천막농성장을 설치했다.

3년간 투쟁 중이 아세아세라텍 노동자들도 있었다. 강창호 아세아세라텍지회장은 "산연만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위장폐업이라고 지방노동위원회에서 판정했지만 사측은 위장폐업을 철회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경남지노위는 지난 2015년 아세아세라텍의 위장폐업을 인정했다. 하지만 현재 아세아세라텍지회는 소수의 조합원만이 남아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억울해서 이대로 쫓겨날 수 없다"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한국산연 노동자들과 3년간 투쟁을 이어가는 아세아세라텍 동지들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국노동자를 지켜줄 수 있는 법을 제정해 주세요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세요한국산연노동자들이 자신의 상황을 담은 선전물을 돌리기 위해 선전물을 한장씩 손가락에 끼워들었다 ⓒ 정영현


한국산연 노동자들은 이날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지역 국회의원 사무실도 찾았다. 김재경 국회의원, 박대출 국회의원, 여상규 국회의원 사무실을 각각 찾았다. 이 자리에서 한국산연 노동자들은 국회의원의 일본 본사 방문, 일본 본사 항의공문 발송, 정리해고 철회 서명을 요청했다.

안타깝게도 모든 사무실에 국회의원들은 없었다. 하지만 국회의원 사무실 보좌관 또는 사무국장이 노동자들을 맞이했다. 모든 국회의원 사무실 관계자들이 한국산연 노동자들의 상황을 경청하고 국회의원에게 전달할 것을 약속했다.

외자기업 규제법안 필요하다박대출 의원 사무실을 찾은 경남희망행진단이 보좌관에게 상황을 설명 중이다. ⓒ 정영현


외자기업 규제법안 필요하다여상규 의원 사무실을 찾은 경남희망행진단이 사무국장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정영현


여상규 국회의원실의 이종범 사무국장(사천시의원)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법안 발의를 위해서는 당론을 정하는 것이 필요하고, 외국기업 규제와 관련해서는 당론채택을 건의해 놓았고, 논의해 보겠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라고 밝혀 외자기업과 관련한 법안 마련에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박대출 국회의원실 보좌관도 "한국산연 내용을 미리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소리를 충분히 전달하겠습니다"고 밝혔다.

한국산연은 지난 40여 년간 마산수출자유무역지역에서 외자기업에 대한 각종 혜택을 누리며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준법기관인 지방노동위원회의 판정을 무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노동자들이 주장이다. 실제로 외국기업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안은 현재 전무한 상황이라 외국기업이 자본을 철수할 경우 한국 노동자들은 별다른 해결책 없이 해고를 당한다.

희망은 우리가 만들어 갈 것

노동자들이 함께 있기에한국산연 노동자들이 IS동서지회장과 원직복직 결의를 다졌다 ⓒ 정영현


이날 진주와 사천지역 순회에 나선 노동자들은 IS동서를 찾아 선전전을 진행하고, 진주시지부 집회에 결합해 한국산연의 상황을 알려냈다.

수 달간의 거리생활로 지칠 법도 했지만 이들은 이동하는 동안 이야기꽃을 피워냈다. 비록 사측의 중앙노동위원회 항고로 노동자들의 원직복직은 조금 멀어졌을지 몰라도 노동자들의 얼굴에는 '원직복직'에 대한 희망이 가득했다. 

이들은 경남희망행진을 시작하며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맞이하듯이 희망의 새싹을 키워내는 희망행진에 나선다'라고 밝혔다. 3일째에 접어든 노동자의 희망 발걸음이 복직이라는 열매로 맺어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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