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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야 잘 산다'고요? 에라이 '탕진잼'이다!

[2030의 지갑 ②] '탕진잼'부터 '시발비용'까지, '저축의 신화' 무너진 세대의 소비

등록|2017.03.02 10:49 수정|2017.03.07 09:56
'77만원 세대', '삼포 세대'라는 말을 듣는 요즘 청년들은 그들의 돈을 어디에 쓸까요? '2030의 지갑' 기획은 청년들의 새로운 소비 형태와 이로 인해 일어나는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편집자말]

▲ '월급고개'를 무사히 넘기려면, '지름'의 유혹에 맞서야 한다. ⓒ pixabay


"이거보다 저게 조금 더 저렴한데. 내용물이 그닥... 어느 걸 살까?"

물건을 구매하려다가 손에 집어든 상태로, 혹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장바구니에 담은 채로 고민한 경험은 누구나 있을 법하다. 기회비용이란 건 어느 상황에서나 발생하니까. 아니, 천 원이라도 아껴야 월급고개를 성한 상태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한때 라면만 먹으면서 한 달을 보낸 적이 있다. 그나마 하루 한 끼만 유일하게 먹는 음식이 라면이었다. 당시 60대 후반이던 내 몸무게가 59kg까지 내려간 것도 이때였다. 178cm의 키에 뼈만 남은 몰골로 돌아다니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진심 어린 걱정을 듣곤 했다.

가끔 운 좋게 돈이 남으면 편의점 도시락으로 하루 한 끼의 식사가 '업그레이드'되기도 했다. 고작 500원이 부족해서 소시지 들어간 도시락을 눈앞에 두고도 더 저렴한 도시락을 집어 들면서 한숨을 쉬던 나날이었다. 편의점에서 옆 사람이 집어 든 캔맥주를 보면서 박탈감을 느낄 정도로 생활이 피폐했다.

몇 년이 지나서 겨우 개미지옥 같은 시기를 벗어났다. 이젠 한 끼 식사를 고르면서 액수를 보면서 고민하지 않게 됐다. 그렇다고 한 끼에 2만 원 이상 '고-오-급' 밥상을 마음껏 먹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예전처럼 편의점에서 한 끼를 '때우는' 생활을 하지 않는 정도다. 한 끼에 8천 원, 한 시간 시급보다 비싼 메뉴를 고르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됐다는 것.

소비의 변화, '탕진잼'과 '시발비용'

▲ 지름신의 강림은 무엇보다 강력하다. ⓒ SNS 갈무리


단기 아르바이트 노동자로 전전하던 삶에서 벗어나자 씀씀이가 달라졌다. 처음 몇 개월은 쌓인 빚을 청산하느라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거기서 해방되자 스스로 보상을 주고 싶었다.

액수 뒷자리에 '0' 하나 더 붙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면 망설이지 않고 물건을 산다. 버스비조차 아끼려고 걸어 다니던 시절도 있었건만, 이젠 발이 아프면 가까운 거리라도 주저하지 않고 택시를 잡는다. 미터기 안에서 달리는 LED 말의 걸음질에 초조하지 않은 것도 심정적인 변화라면 변화랄까.

추위나 더위에 시달리는 계절, 약속 시간이 애매하다면 길에서 버티지 않고 카페에 들어가 달콤한 휴식을 취한다. 저가형 음료를 파는 카페에 들러 메뉴판 가장 위에서 최저가(주로 아이스 커피)를 찾던 눈길은 이제 훨씬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이전엔 미처 몰랐다. 휘핑 올라간 음료의 달콤함이 이런 맛이라는 것을!

지름신의 강림은 무엇보다 강력했다. 일단 지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나도 지갑도 휩쓸리는 건 순식간이다. '탕진잼'의 재미는 물건을 구매하고, 배송을 기다리는 맛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짜릿한 건 통장 잔고를 탕진했는데도 여전히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수십만 원을 주고 타투를 새기는 일도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 몸에 평생 남을 '의미있는 문양'에 돈을 쓰는 게, 스스로 만족스럽다면 아까울 게 뭐란 말인가? 애초에 돈을 쓰면서 '본전 생각'에 매달리거나, '이 돈을 아끼면 한 끼는 더 먹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삶이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 "지갑을 얇게 조여갈수록 내 허리 치수도 동시에 줄어들었다." ⓒ pexel


업무와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데도 소비가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런 방식의 소비에 어느 트위터 누리꾼이 '시발비용'이라 이름 붙이기도 했다. 사실 과거 미국 드라마에서도 이런 개념을 일컬어 '퍽 유 머니(Fuck you money)'라 언급했다고 한다. 애초 스트레스가 없었다면 쓰지 않았을 돈이지만, 원하는 만큼 치맥을 사 먹거나 옷을 구매하는 걸로 기분이 나아진다면 결코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20대엔 지갑을 얇게 조여갈수록 내 허리 치수도 동시에 줄어들었다. 30대로 접어들어 '가성비의 족쇄'를 끊어버렸다. '국가가 내게 허락한 유일한 마약' 같은 닭강정을 마음껏 사 먹는 삶을 살고 있다. 1일 1치킨의 행복을 어찌 돈으로 환산하겠는가? 이젠 시급이 아니라 연봉으로 노동 임금을 받는 것도 차이점이지만, 이제 구매 실행을 위한 심리적 마지노선을 '가격'에 두지 않게 된 점도 있다.

'아끼고 모으면 잘 산다'는 믿음의 붕괴

▲ '아끼고 모아야 잘 산다'는 말, 요즘 현실에도 통할까? ⓒ pixabay


어릴 적 부모님은 내게 통장 개설을 가르쳐주면서 돼지저금통을 함께 선물해주셨다.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은 돈, 종류별 동전과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를 가득 채워서 저축하는 법을 알려주려고 한 거였다.

아마도 당연한 일이었을 거로 생각한다. 부모님 세대는 평생의 임금을 모아 저축하고, 집을 살 돈도 모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 세대도 그럴까? 우린 부모 세대보다 낮은 임금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 집 마련'은커녕 토지 재산은 대부분 꿈 같은 얘기고, 그들보다 더 높은 스펙으로도 취업조차 힘들어졌다.

우리는 '아끼고 모으면 잘 산다'는 믿음이 붕괴하고, '저축의 신화'가 무너진 시대를 살고 있다. 옛말에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지만, 이제는 '쥐구멍'이 되어 볕을 기다리느니 당장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는 것이 더 현명한 행동으로 보인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오늘 고생한 보상을 소박하게나마 당장 구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더 저렴한 것, 조금이라도 가격대비 나은 것 사이에서 '도토리 키재기'하느라 내 삶까지 후려치기 당하는 자괴감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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