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몰락한 사회, '마을'만이 대안이다

[마을학개론 2] 마을이란 무엇인가

등록|2017.03.02 15:47 수정|2017.03.02 15:47
'사회학(Sociology)'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주로 사회의 구조와 변동, 그리고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주제로 삼는다. 대체로 사회 안에서 인간의 사회적 행위는 사회적 공동생활로 표출되고 구현된다. 다만 사회적 공동생활은 간단하지 않다. 경제, 정치, 법, 교육, 도덕, 종교, 예술 등 다방면에서, 광폭적으로, 복잡다단하게, 부단하게 펼쳐진다. 

따라서 사회학은 기본적으로 사회와 개인의 문제에 종횡으로 천착할 수밖에 없다. 본질적으로 사회와 개인은 불가분한 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사회 없는 개인은 무기력하고 개인 없는 사회는 무의미하다. 적어도 현대사회에서 인간으로 권리와 책무를 행사하려면, 사람 행세를 하려면 곧 사회적 인간이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규정했을 것이다. 본디 '정치적(politukos) 동물'이라는 어원이었으나 번역되면서 사회적 동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국가 사회를 형성하는 동물"이라는 메시지다.

그는 인간이 사유능력으로 실현해야 할 최선의 행위를 자아실현이라 생각했다. 그 행위들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며 행복의 최고목표는 곧 개인의 자아실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아실현이란 사회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개인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지 않고, 사회 또는 국가는 개인으로부터 유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가족, 마을, 도시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농촌사회학회사회적 인간이 몰락하는 현대사회의 출구는 ‘마을’일 것 ⓒ 정기석


그러나, 사회적 인간은 몰락했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적 동물로서, 사회적 인간은 몰락하고 있다. 사회학자 김윤태는 '사회적 인간의 몰락'을 통해 "사회적 인간이 약화되는 반면, 고립되고 원자화된 경제적 인간이 확산되는" 사회적 현상의 원인을 분석해냈다. 홉스, 루소, 스미스, 마르크스, 엥겔스, 베버, 뒤르켐 등 근대 사회사상가에서부터 프로이트, 레비스트로스, 아렌트, 푸코, 엘리아스,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부르디외, 벡, 기든스, 바우만 등 현대 사회사상가에 이르는 사회학의 사상을 종횡으로 살핀 결과다. '사회적 인간'이 서서히 몰락해가는 현대사회를 사회과학적으로 제보하고 있다.

흔히 사회학자들은 모든 개인이 사회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사회에 관심을 가진다고 전제한다. 또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회적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운영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사회가 엄연히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며, 인간의 행동을 제약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사회의 법칙, 질서, 관습, 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들은 이기적인 수많은 개인이 모여 이루어지는 게 사회라고 가정한다. 심지어 사회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단지 합리적인 행동을 하고 경제적 효용성을 최대로 추구하는 '비인간적, 반사회적' 개인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사회라고 믿는 공동체는 신기루같은 허상이라는 것이다, 사회에는 무수한 개인들만 존재 할 뿐, 그 개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 인간이 몰락한' '헬조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회적 인간이 몰락한 현대사회에서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은 공적 영역을 파괴하고 사회문제를 외면하고 정치에 무관심한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사람들이다. 미국사회의 그늘에 불안과 고독감을 지니고 있는 성격 유형을 나타낸다. 리처드 세넷은 '공적 인간의 몰락'을 통해 사적 생활로 도피해 개인적 의미만 찾는공적 문화와 공동체가 해체되는 현상을 비판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사회(Fluid Society)'는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전통 사회가 아니라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액체적이고 유동적인 현대사회에 다름 아니다. 

에밀 뒤르켐은 '사회분업론'에서 '기계적 연대로부터 분업에 따라 개성적이고 이질적인 개인들의 유기적 연대'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합의식이 약하고 개인의식이 우월한 근대사회에서 사회적 인간의 몰락을 염려했을 것이다. 로버트 퍼트넘은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에서 사회적 자본을 폐쇄성이 강한 결속형 자본과 포용성이 큰 교량(연계)형 자본으로 구분했다. 가령 성가대나 볼링클럽 같은 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포괄하는 교량형 사회적자본이 많을수록 건강한 사회라는 것이다.

광화문광장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의 대안은 ‘정치적 시민들의 생활정치’라고 주장 ⓒ 정기석


새로운 '우리의 사회'가 필요하다

울리히 벡은 서구를 중심으로 추구해온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이 실제로는 가공스러운 '위험사회'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위험사회-새로운 근대성을 찾아서'를 통해 계급정체성이 약해지고 가족 유대가 불안정해지는 '개인화' 시대를 위험사회로 규정했다. 이러한 위험사회를 극복하려면 급진적으로 개인화된 '정치적 시민(citoyen)'들이 기존의 제도들에 대항해 새로운 '생활정치를 통한 새로운 시민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 유연화, 현대판 프롤레타리아인 워킹 푸어 증가, 자본과 시장에 권력을 빼앗긴 국가의 쇠퇴, 소비주의 문화, 가족의 해체, 여성, 장애인, 다문화 등 취약 계층의 사회적 배제, 정상적 소통이 불가능한 네트워크에 매몰된 고독한 군중, 정치적 무기력증에 의한 사회적 무관심 등. 모두 사회적 인간이 몰락한, 위험한 현대사회의 지배적인 모습이자 속성을 나타내는 병리적 증상들이다.

이런 불공정하고 비관적인 사회에서 민주주의 시민혁명의 주체인 사회적 인간은 실존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의 성공과 안위만 좇으며 경쟁심과 불안감에 사로잡힌 고립되고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개인들만 양산될 뿐이다. 공동의 사회 문제는 사라지고 '아프니까 청춘이다'식의 힐링처방전이 남발되면서 모든 책임은 개인의 문제로 전가된다.   

'사회적 인간의 몰락'은 "이렇게 사회적 인간이 사라지면 민주주의도 사라진다"면서 "개인의 자유가 증가할수록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이타주의, 사회의 공동선, 좋은 사회에 관심이 사라진 사회가 출현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 사회적 인간이 몰락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바보로 전락한다며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권력과 자본에 맞서 행동하자고 추동한다.

그리고 그는 1987년 민주화 이후 급속히 대두된 '신사회운동'을 새삼스레 다시 꺼내든다. 신사회운동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복원을 추구하며 다양한 개인의 연대를 꿈꾸자는 것이다. 초계급적인 운동이며, 문화적인 가치, 정체성, 삶의 질의 차원을 중시한다. 조직이 수평적이고 유연하며, 의사 결정 방식이 상향식이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는 초국적 방식이라 세계적 차원의 민주주의 발전과 지구 시민사회를 발전시킨다.

농민대회 1987년 이후를 대체할 새로운 ‘신사회운동’이 필요하다. ⓒ 정기석


몰락하는 사회의 출구, 마을공동체

그렇다면 몰락하는 사회의 대안으로 제기된 신사회운동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면 되나.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복원을 추구하며 다양한 개인의 연대를 꿈꾸려면' 어떻게 행동하면 되나. 경제학자들이 주로 구축해놓은 진지, 현대 자본주의의 패러다임과 플랫폼에 갇혀있는 도시나, 국가에서는 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인 대안을 찾는 게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마을로 내려가자"는 것이다. 마을공동체야말로 몰락하는 사회, 자본주의의 전초기지 도시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마을에서는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사회학자 김기홍은 '마을의 재발견'에서 자본주의 발전이론에서는 물적 자본, 인적 자본이 많은 사회가 유리하지만, 공동체 형성이론에서는 '선의, 동료의식, 사회 공감, 사회적 교류' 같은 사회적 자본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효율성 보다 인간관계, 사회적 관계가 사회발전의 주요동력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 전통마을은 향약, 두레, 품앗이 처럼 사회적 자본을 밑천으로 한 공동체생활 방식으로 작동하고 유지됐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국가 단위나, 중앙정부 차원에서 돌보고 보살필 수 없는 사회적 영역과 과제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대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들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사회를 지혜롭게 살아가려면서 마을공동체 안에서, 공동체구성원끼리 서로 자조하고 자구하고 자치하는 게 상책일 수 있다.

마을회의 무주초리넝쿨마을의 생활정치, 마을총회 ⓒ 정기석


사전에서 정의하는 마을은 "주로 시골에서 여러 집이 한데 모여 사는 곳"이다. 시골에 가야 비로소 삶과 일과 놀이가 하나될 가능성과 여지가 있다. 도시에서는 어렵다. 에밀 뒤르켐은 '도시의 동네(quartier)'는 "기계적 연대와 배제의 공간으로 주민들이 어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비정한 생활공간"이라고 지적했다. 도시민들은 생활보다 생업이 우선일 수밖에 없는 운명에 매달려 살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도 농촌의 온갖 자원을 수탈해 건설한 도시를 마을로 치지 않았다.

이런 간디가 설계한 마을은 사실상 자치공화국에 가깝다. 가히 마을자치(Swaraji)가 작동하는 마을공화국이라 할 수 있다. 일단 기본적 필요에 관해서 이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곳이다. 그러면서도 의존이 불가피한 다른 여러가지에 관해서는 상호의존적인 완전한 공화국이다. 모든 마을의 최우선 관심사는 식량작물과 옷을 자급하기 위해 목화를 키우는 일이다.  마을에는 가축들을 위한 비축 양식이 있어야 하고, 어른과 아이들을 위한 오락과 놀이터가 있어야 한다. 가용 토지가 더 있으면 '쓸모 있는' 환금작물을 키워서 미라화나, 담배, 아편 등을 쫓아내야 한다.

마을에는 마을극장, 학교, 공화당을 두어야 한다. 깨끗한 물 공급을 보장하는 자체 급수시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육은 기초과정의 끝까지 의무적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한 한 모든 활동은 협동체제로 수행된다. 마을 정부는 해마다 최소한의 자격요건을 갖춘 마을의 성인 남녀들이 선출한 다섯명으로 구성된 판차야트(마을회의)가 운영한다. 여기에는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완전한 민주주의가 있어서 개인은 자신의 정부를 만드는 건축가로서 대우받는다. 비폭력의 법이 개인과 그의 정부를 다스림으로써 개인과 그의 마을은 세계의 힘에 맞설 수 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진도리 한국형 생태공동체마을의 사례지, 무주 진도친환경마을 ⓒ 정기석


'마을'은 생태적, 사회적 공동체마을이라야

굳이 간디의 스와라지마을이 아니더라도 '사회적 인간들이 모여 살기 좋은 마을'이려면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이라야 할 것이다. 1991년에 로버트 길만(Robert Gilman)은 이른바 생태공동체마을(Eco Village)의 개념을 이렇게 정립했다. 인간적 규모로서, 생활요소가 완결적으로 갖추어져, 인간의 활동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건강한 인간성이 개발되는, 무한한 미래로 지속가능한 공동체로 정의내렸다.

여기서 '인간적 규모'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서로 쉽게 알 수 있는 정도를 나타낸다. 서로 긴밀히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규모로서 대략 500명 정도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지는 마을을 얘기한다. '생활요소가 완결적으로 갖추어진 공동체 거주지'란 주거, 노동, 생활, 사업활동 등 일상적 생활의 모든 부분이 균형 잡힌 비율로 통합되어 존재하는 상태이다.

'인간의 활동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말은 진정으로 '생태적(eco)'인 공동체라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다른 생명 사이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으며 한결같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감히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할 일이라곤 제 분수에 맞는 자리를 찾아 자연과 조화를 꾀하는 노력이어야 한다는 충고다.

마을공동식당 노인들이 2층 마을공동식당으로 편히 출입할 수 있도록 계단공사 중인 초리넝쿨마을 ⓒ 정기석


나아가 진정한 인간성, 건강한 인간성을 추구하지 않는 공동체는 성공할 수 없다. '건강한 인간성'이란 육체적, 감정적, 심리적, 정신적인 면이 통합되고 조화된 인간성이다. 어쨌든 이 '사회적 마을'은 서로 다른 인간성을 지닌 사람들끼리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 '무한한 미래로 지속가능한 공동체'야말로 결론같은 숙제다. 이게 되지 않으면 결국 공동체 외부 사회가 축적해놓은 자본과 반환경적 활동에 오로지 의존하게 된다.

한국에서 이와 같은 생태마을을 설계하고 계획하려면 가능하면 '작고 낮고 느린' 농촌마을이 좋을 것이다. 물론 도시에서도 적당한 공간과 추진모임이 있다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도 '마을만들기 사업'이 활발하다. 하지만 이제 '몰락할 위기에 놓인 사회적 인간'들이 주로 모여 사는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도시는 이미 늦은 게 아닌가. 도시를 지속가능한 생태마을로 되돌리기보다 농촌으로, 지역으로 내려가는 게 더 쉽고 옳아 보인다. 농촌으로, 지역으로 내려가면 비로소 '마을'을 볼 수 있다. 그 마을에서 '사회적 인간'으로 살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마을학개론(마을에서 먹고 사는 법) : 귀농을 하거나 자발적 하방을 해서 마을에서 먹고 살려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마을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을, 공동체, 마을시민. 마을기업, 대안마을, 대안농정, 그리고 대안사회를 열심히 공부해서 체화해야 한다. 그러면 마을에서 사람답게 먹고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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