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을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전남 신안군 흑산도 심리마을. 노을만큼이나 아름다운 '돔'이라는 독특한 섬 문화가 있었다.(사진은 2016년 9월 26일 흑산도 심리 노을 풍경) ⓒ 이주빈
제주도엔 '괸당'이란 말이 있다. 돌보는 무리라는 뜻의 권당(眷黨)이 제주말 '괸당'으로 자리 잡았다는 풀이가 있지만 통상 제주도에선 멀고 가까운 친척들을 두루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 당, 저 당 해도 괸당이 최고"라는 우스갯소리가 절로 생겨날 정도로 '괸당'은 하나의 언어를 넘어 독특한 제주문화를 상징한다. 자연환경이 척박하고, 중앙권력으로부터 잦은 핍박을 받아온 제주도. '괸당'은 기쁘고 슬프고 힘든 일 가리지 않고 함께 힘을 모아 헤쳐 온 관계의 버팀목이자 제주도 사람들이 일궈온 하나의 문화인 것이다.
'괸당'보다 조금 더 친밀한 말로는 '삼춘'이 있다. 남녀 불문하고 손윗사람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다. '삼춘'은 '삼촌'이 발음하기 좋게 변화한 것이다. 족보로 삼촌이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가. 이웃지간의 손윗사람을 남녀 가리지 않고 '삼춘'이라고 부르는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 풍경이 따뜻하기만 하다.
제주도 사람들이 쓰는 '삼춘'과 비슷하게 쓰이는 호칭이 흑산도에도 있다. '작숙'과 '오춘'이다.
'작숙'은 원래 고모부를 뜻한다. 그리고 '오춘' 즉 오촌은 아버지의 사촌이나 사촌의 아들과의 촌수를 뜻한다. 하지만 흑산도에선 먼 친척뻘 되는 이에게도 스스럼없이 '작숙'이라고 부른다. '오춘'은 그 쓰임이 더욱 넓다. 오촌이 넘는 먼 친척은 물론 동네의 이웃어른을 부를 때도 '오춘'이라 했다.
흑산사람이면 누구나 '오춘'과 '작숙'에 얽힌 추억이 있을 것이다. 유년기에 나는 그 많은 ''작숙'과 오춘'들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우리 친고모가 아닌 분의 부군을 '작숙'이라 불러야 하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또한 성씨도 다른 분들, 이를 테면 윤씨 성이나 황씨 성을 지닌 분들을 이씨인 내가 '오춘'이라 부르는 까닭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격하지 않은 '작숙'이란 호칭에선 같은 혈족은 아니지만 인척의 범위를 넓혀 섬마을 공동체를 건사하려 했던 우리 흑산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두루두루 살근하게 불렀던 '오춘'이란 호칭에선 각박한 섬살이를 친척처럼 함께 의지하며 헤쳐 가고자 했던 흑산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애틋한 정리(情理)를 읽을 수 있다.
'작숙'과 '오춘'은 흑산도 특유의 공동체문화인 '돔'문화를 만들었다. 돔은 마을공동체에서 구역을 중심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또 하나의 작은 공동체다. 혈족이 아닌 수많은 '작숙'과 '오춘'들과 함께 윗돔, 아랫돔, 중간돔을 만든다.
▲ 흑산도에는 '돔'이라는 독특한 공동체 문화가 있다. 여름이면 미역이며, 톳, 다시마를 돔별로 공동으로 채취해서 공동으로 분배했다.(사진은 2016년 8월 19일 흑산도 사리의 다시마 말리는 풍경) ⓒ 이주빈
그리고 여름이면 물때에 맞춰 돔별로 바다에 나가 미역이며 다시마, 톳을 캤다. 돌아오는 봄이면 돔별로 갯바위에 붙은 돌김을 땄다. 돔은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나이가 들었거나 장애가 있어서 채취 작업에 나오지 못하는 이들에겐 첫물 작업 때 개인별로 나눠 갖는 정량의 1/3을 지급했다. 함께 힘을 모아 노동하고, 이웃의 사회적 약자를 살뜰하게 보살폈던 공동체의 원형이 흑산도의 '돔'엔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마을마다 각 돔을 이루던 '작숙'과 '오춘'들이 그립다. 아마도 돌김 따는 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리라. '작숙'과 '오춘'들은 외딴 섬마을 힘든 갯일을 수월하게 해주는 동무였다. '작숙'과 '오춘'들은 가로등 하나 들어오지 않은 외딴 섬마을 어둔 밤을 지키는 등대였다.
겨울풍랑 거센 바다 잠잠해지고 며칠 만에 여객선 들어오면 '작숙'과 '오춘'들도 함께 오시면 좋겠다. 붉디붉은 흑산 동백꽃 배경삼아 사진 몇 장 찍고, 불콰하게 술기운 오르면 오랜만에 '산다이(함께 어울려 노래하며 춤을 추는 서남해 연희문화)'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흑산 주민들이 만드는 신문 <흑산신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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