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배우의 비참한 죽음... "예술인에게 적절한 보상을"
[인터뷰] 김선찬 한국연극협회 인천시지회장
98주년 3.1절이었던 지난 1일, 수봉공원 근처에 있는 문화회관을 방문했다. 김선찬 한국연극협회 인천시지회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문화회관 3층 연극협회 사무실에 들어가니, 김 지회장이 청소년 몇 명과 연극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 지회에서 매해 청소년연극제를 한다. 연극제가 끝나면 연기학원에 가고 싶은데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서, 돈이 없어서 못가는 아이들이 안타까워 한두 명 수업을 하다 보니 벌써 5년이 됐다"고 김 지회장은 설명했다.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예술인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인천에도 연기학원이 10여 곳 있는데 학생들이 인천에 있는 학원에 가지 않고 서울로 다녀요. 비용도 30만원 차이가 나는데도 말입니다. 내가 보기엔 강사진은 비슷하지만 관련 전공학과가 있는 대학에 합격한 사람이 서울에 많으니까 그 데이터를 보고 가지요. 서울은 학원이 포화상태라 인천으로 와 학원을 여는데 인천 학생들이 서울로 가니까 학원 운영이 어려워 다시 서울로 갑니다. 악순환이지요. 인천은 서울 근처라 여러 가지로 불리합니다."
본의 아니게 서울의 위성도시로서 인천 예술의 어려움부터 얘기하기 시작했다. 김 지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인천에 살면서도 서울에서 연극영화과를 다녔던 학생들이 인천에서는 활동하지 않아요. 인천에서 1년 이상 거주하면 지원금을 주는데 지원금만 받고 서울에서 활동하죠. 서울이 가깝기 때문에 인천에서 열심히 할 필요가 없죠. 하지만 부산이나 광주 등, 다른 지역은 서울까지 가기 힘드니까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해요. 인천에서 좋은 작품을 하겠다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고, 자원이 남아있지 않아요. 배우들도 인천에서 잘 하다가 서울 대학로에 가면 인천으로 다시 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과 가까워 어려움이 많다는 김 지회장은 생활예술인들과 전문 예술가 사이에서 생기는 어려움도 토로했다. 첩첩산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생활예술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 연계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문 예술인들이 지도해야 아마추어가 프로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생활예술은 예술 강사 중심이라서, 전문가가 보기엔 그들은 예술가라고 하기엔 좀 어렵습니다. 실기교육은 전문가들이 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엔 인천 예술이 전반적으로 낙후돼있고, 예술의 문턱이 낮아서 생기는 일이라고 봐요. 문턱이 높으면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데 낮으니까 혼선이 생기는 거죠. 이 문제가 인천이 문화예술도시로 발전하는 데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어요. 문화예술이 하향 평준화될 수도 있고요."
긴장하며 들었지만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았다. 어떤 의견을 내기에도 조심스러웠다. 아마추어 예술가들도 연륜이 쌓이면 전문가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경계는 무엇인가? 역시 어려웠다.
김 지회장은 연출의 경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최소 5년 이상은 해야 전문 연출가라고 말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작품을 한 지 1~2년밖에 안 됐는데 자칭 배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배우와 연기자는 다릅니다. 연기자는 연기를 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할 수 있겠죠. 그러나 배우는 높은 경지를 뜻해요. 연출가도 대가를 이르는 말이고요. 보통은 연출자라고 부릅니다. 저는 예술가들에게 자격증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있으면 노력할 동력이 생기고 희생을 감수할 수도 있고 뿌듯하고 만족감도 생깁니다. 예술이 발전하려면 보상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자기 좋아서 한다고 생각하지만,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떤 보상도 없다면 예술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을 겁니다. 문화예술은 분명히 사회에 적지 않게 기여한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보상시스템이 없다면 우리나라 예술은 발전하기 힘듭니다."
'문화선진국' 배우들의 보수도 우리나라와 수준이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나 예술인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크다고 한다. 우리는 예술가를 일명 '딴따라'라고 비하해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예술가를 경외와 존중의 시선으로 보는 분위기라고 김 지회장은 덧붙였다.
"문제는 교육입니다. 예술가들을 우습게 아는 경우가 많아요. 예술가들은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하나요? 능력이 출중한 우리나라 예술가들은 국내에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가끔 특별 행사를 할 뿐이죠. 예술시장이 없기 때문이에요. 문화예술의 성과는 지표로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스며들고 녹아드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문화예술교육 자체가 너무 천박합니다."
신학과 준비하다 고3 때 갑자기 진로 변경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초ㆍ중ㆍ고등학교를 졸업한 김 지회장은 서울예전에서 연극을 전공했다. 연기자로 활동하다 1997년 연출로 전향했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다 인천의 한 단체에서 상임연출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2000년부터 인천에서 연극 활동을 했다. 요청 외에도 인천에 온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서울에서 연극하면서 연출가로 발전하려면 선생님을 잘 모셔야하는 관례가 있어요. 그게 저는 소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제(徒弟=제자)를 중요시 여기는데 저는 선생님들의 후광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 시스템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향에서 뜻 맞는 사람들과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 2003년 극단 '산만'을 만들었다. '산만'은 '우리의 에너지를 퍼트려 무대를 꽉 채우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지금 생각해도 좋은 이름이란다. 왜 연극을 하고 싶었는지 물었더니 의외의 답을 했다.
"신학과를 가려고 준비하다 고3 때 갑자기 진로를 바꿨어요. 같은 교회를 다니던 전도사와 싸운 후죠. 내가 성직자가 됐는데 누군가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번졌고, '그럼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데 어릴 때 교회에서 성극을 하면서 좋아했던 추억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때 연극을 하지 않았으면 나쁜 길로 갔을지도 몰라요."
어릴 때 태권도를 8년간 배웠던 김 지회장은 이른바 '힘 좀 쓰는 동네 형들'을 알았고, 그들과 어울려 싸움을 적지 않게 했다. 부모의 불화로 행복하지 않았던 사춘기를 보낸 그는 교회에서 연극 '금관의 예수'를 할 때 한센병 환자 역할을 했다. 예수의 금관을 훔쳐가려는 사람들로부터 금관을 지키려다 맞아 죽은 한센병 환자 역을 하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도 있구나. 나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진로를 고민하며 기도한 어느 날 어릴 때 연극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김 지회장은 '신의 게시'라고 생각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반골 기질'이 느껴져 물으니, 자신의 연극은 '정의롭다'는 동문서답인 듯하면서도 정답 같은 말을 했다.
"저는 정의로움을 좋아해요. 정의로워야 합니다. 값싼 동정심이 아닌, 실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냥 관심 있다는 말만 하는 게 싫어요. 제 자랑이지만, 얼마 안 되지만 유니세프나 국경없는 의사회 등에 후원하고 있습니다. 불쌍하다고 말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 변하지 않아요. 제 연극 중 근로정신대에 끌려갔던 할머니들을 다룬 작품이 있는데 2012년 '나의 조국, 미운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어요. 지난해 서울예대 학생들과 다시 무대에 올리기도 했죠. 연극의 기능 중 하나가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술은 힘이 있으니까요."
선생님을 모시면서 비굴함을 느꼈던 김 지회장은 그때의 기분이 '더러웠다'고 표현했다. 존경하는 스승님을 모시는 것은 좋지만 불합리한 상황에 무조건 맞춰야하는 게 천성이 맞지 않았다고도 했다.
연극인으로 살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냐고 물으니, 무거운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우리 극단에 김아무개라는 배우가 있었는데 2015년에 고시원에서 죽은 지 며칠 만에 발견됐어요. 그 친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림도 잘 그리고 운동도 잘 한, 재능이 많은 친구였어요. 격투기 한국챔피언을 해서 운동을 했다면 힘들지 않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연극이 좋다고 계속 했죠. 연극을 사랑하면서 마지막에도 연극 작품을 올리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어요. 연극인들의 삶은 그런 거 같아요. 항상 돈에 쪼들리고, 돈에 쪼들리면서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을 못할 때가 많아요. 가령 경조사비 내는 것도 힘들어서 인간관계가 멀어지고 우리끼리만 만나면서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계속 연극을 해야 하나, 회의적인 생각도 했습니다. 이 친구가 죽고 나서 예술인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고, 지금도 그런 고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재밌는 연극을 보려면 인천으로 가야
한국연극협회 인천시지회는 1972년 경기도 인천시지회로 출발했다. 1983년 인천직할시지회로 독립했고, 1995년 지금의 인천광역시지회가 됐다. 지회의 주요사업은 인천(항구)연극제와 인천청소년연극제다. 인천항구연극제는 올해가 35회이고, 청소년연극제는 21회다. 올해 인천연극제는 4월 1일부터 16일까지 열린다.
"작년부터 시작한 게 시민연극제이고, 재작년부터 시작한 게 힐링연극콘서트입니다. 시민연극제는 인천의 관객을 개발하자는 의도로 시작했어요. 지역에 시민연극단체들이 있는데 그들의 연극 수준을 높이는 데 전문가들이 도움을 준다면 지인들이 보러 와서 연극에 관심이 생기겠죠. 그러면 또 보러 오게 돼 연극 관객들을 확보하는 데 보탬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힐링연극콘서트는 1년간 연극협회에서 했던 연극 중 재밌는 것들을 모아 관객에게 보여주는 행사다. 콘서트라는 이름을 붙인 건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토크콘서트나 파티와 결합하는 축제와 같은 연극제를 만들기 위해서란다.
2015년에 지회장직을 맡은 그의 임기는 내년 2월까지다. 임기 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365 프로젝트'를 하려고 합니다. 재밌는 문화공간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관에서 여러 문화공간을 만들었는데 효용성이 없어요. 다목적 공간이기 때문이죠. 예술가 중심의 공간이 없다는 생각에 예술가와 시민이 같이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어서 고민했습니다. 소극장타운이 생겨 축제와 공연, 파티를 한곳에서 하는 거죠. 이 프로젝트는 365일 매일 재밌는 공연을 볼 수 있게 하려고 기획하고 있습니다. 전 정말 인천을 사랑해요. 인천이 문화예술의 불모지라고 얘기하는데 자존심이 상합니다. '인천에는 색다른 연극을 볼 수 있어. 연극을 보려면 인천으로 가야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인천이 되게 미력하나마 노력해볼 작정입니다."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예술인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 김선찬 한국연극협회 인천시지회장. ⓒ 김영숙
"인천에도 연기학원이 10여 곳 있는데 학생들이 인천에 있는 학원에 가지 않고 서울로 다녀요. 비용도 30만원 차이가 나는데도 말입니다. 내가 보기엔 강사진은 비슷하지만 관련 전공학과가 있는 대학에 합격한 사람이 서울에 많으니까 그 데이터를 보고 가지요. 서울은 학원이 포화상태라 인천으로 와 학원을 여는데 인천 학생들이 서울로 가니까 학원 운영이 어려워 다시 서울로 갑니다. 악순환이지요. 인천은 서울 근처라 여러 가지로 불리합니다."
본의 아니게 서울의 위성도시로서 인천 예술의 어려움부터 얘기하기 시작했다. 김 지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인천에 살면서도 서울에서 연극영화과를 다녔던 학생들이 인천에서는 활동하지 않아요. 인천에서 1년 이상 거주하면 지원금을 주는데 지원금만 받고 서울에서 활동하죠. 서울이 가깝기 때문에 인천에서 열심히 할 필요가 없죠. 하지만 부산이나 광주 등, 다른 지역은 서울까지 가기 힘드니까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해요. 인천에서 좋은 작품을 하겠다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고, 자원이 남아있지 않아요. 배우들도 인천에서 잘 하다가 서울 대학로에 가면 인천으로 다시 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과 가까워 어려움이 많다는 김 지회장은 생활예술인들과 전문 예술가 사이에서 생기는 어려움도 토로했다. 첩첩산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생활예술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 연계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문 예술인들이 지도해야 아마추어가 프로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생활예술은 예술 강사 중심이라서, 전문가가 보기엔 그들은 예술가라고 하기엔 좀 어렵습니다. 실기교육은 전문가들이 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엔 인천 예술이 전반적으로 낙후돼있고, 예술의 문턱이 낮아서 생기는 일이라고 봐요. 문턱이 높으면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데 낮으니까 혼선이 생기는 거죠. 이 문제가 인천이 문화예술도시로 발전하는 데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어요. 문화예술이 하향 평준화될 수도 있고요."
긴장하며 들었지만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았다. 어떤 의견을 내기에도 조심스러웠다. 아마추어 예술가들도 연륜이 쌓이면 전문가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경계는 무엇인가? 역시 어려웠다.
김 지회장은 연출의 경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최소 5년 이상은 해야 전문 연출가라고 말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작품을 한 지 1~2년밖에 안 됐는데 자칭 배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배우와 연기자는 다릅니다. 연기자는 연기를 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할 수 있겠죠. 그러나 배우는 높은 경지를 뜻해요. 연출가도 대가를 이르는 말이고요. 보통은 연출자라고 부릅니다. 저는 예술가들에게 자격증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있으면 노력할 동력이 생기고 희생을 감수할 수도 있고 뿌듯하고 만족감도 생깁니다. 예술이 발전하려면 보상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자기 좋아서 한다고 생각하지만,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떤 보상도 없다면 예술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을 겁니다. 문화예술은 분명히 사회에 적지 않게 기여한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보상시스템이 없다면 우리나라 예술은 발전하기 힘듭니다."
'문화선진국' 배우들의 보수도 우리나라와 수준이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나 예술인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크다고 한다. 우리는 예술가를 일명 '딴따라'라고 비하해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예술가를 경외와 존중의 시선으로 보는 분위기라고 김 지회장은 덧붙였다.
"문제는 교육입니다. 예술가들을 우습게 아는 경우가 많아요. 예술가들은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하나요? 능력이 출중한 우리나라 예술가들은 국내에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가끔 특별 행사를 할 뿐이죠. 예술시장이 없기 때문이에요. 문화예술의 성과는 지표로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스며들고 녹아드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문화예술교육 자체가 너무 천박합니다."
신학과 준비하다 고3 때 갑자기 진로 변경
▲ 지난해 인천항구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극단 십년후의 ‘배우 우배’의 한 장면. ⓒ 김영숙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초ㆍ중ㆍ고등학교를 졸업한 김 지회장은 서울예전에서 연극을 전공했다. 연기자로 활동하다 1997년 연출로 전향했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다 인천의 한 단체에서 상임연출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2000년부터 인천에서 연극 활동을 했다. 요청 외에도 인천에 온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서울에서 연극하면서 연출가로 발전하려면 선생님을 잘 모셔야하는 관례가 있어요. 그게 저는 소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제(徒弟=제자)를 중요시 여기는데 저는 선생님들의 후광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 시스템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향에서 뜻 맞는 사람들과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 2003년 극단 '산만'을 만들었다. '산만'은 '우리의 에너지를 퍼트려 무대를 꽉 채우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지금 생각해도 좋은 이름이란다. 왜 연극을 하고 싶었는지 물었더니 의외의 답을 했다.
"신학과를 가려고 준비하다 고3 때 갑자기 진로를 바꿨어요. 같은 교회를 다니던 전도사와 싸운 후죠. 내가 성직자가 됐는데 누군가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번졌고, '그럼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데 어릴 때 교회에서 성극을 하면서 좋아했던 추억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때 연극을 하지 않았으면 나쁜 길로 갔을지도 몰라요."
어릴 때 태권도를 8년간 배웠던 김 지회장은 이른바 '힘 좀 쓰는 동네 형들'을 알았고, 그들과 어울려 싸움을 적지 않게 했다. 부모의 불화로 행복하지 않았던 사춘기를 보낸 그는 교회에서 연극 '금관의 예수'를 할 때 한센병 환자 역할을 했다. 예수의 금관을 훔쳐가려는 사람들로부터 금관을 지키려다 맞아 죽은 한센병 환자 역을 하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도 있구나. 나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진로를 고민하며 기도한 어느 날 어릴 때 연극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김 지회장은 '신의 게시'라고 생각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반골 기질'이 느껴져 물으니, 자신의 연극은 '정의롭다'는 동문서답인 듯하면서도 정답 같은 말을 했다.
"저는 정의로움을 좋아해요. 정의로워야 합니다. 값싼 동정심이 아닌, 실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냥 관심 있다는 말만 하는 게 싫어요. 제 자랑이지만, 얼마 안 되지만 유니세프나 국경없는 의사회 등에 후원하고 있습니다. 불쌍하다고 말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 변하지 않아요. 제 연극 중 근로정신대에 끌려갔던 할머니들을 다룬 작품이 있는데 2012년 '나의 조국, 미운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어요. 지난해 서울예대 학생들과 다시 무대에 올리기도 했죠. 연극의 기능 중 하나가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술은 힘이 있으니까요."
선생님을 모시면서 비굴함을 느꼈던 김 지회장은 그때의 기분이 '더러웠다'고 표현했다. 존경하는 스승님을 모시는 것은 좋지만 불합리한 상황에 무조건 맞춰야하는 게 천성이 맞지 않았다고도 했다.
연극인으로 살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냐고 물으니, 무거운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우리 극단에 김아무개라는 배우가 있었는데 2015년에 고시원에서 죽은 지 며칠 만에 발견됐어요. 그 친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림도 잘 그리고 운동도 잘 한, 재능이 많은 친구였어요. 격투기 한국챔피언을 해서 운동을 했다면 힘들지 않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연극이 좋다고 계속 했죠. 연극을 사랑하면서 마지막에도 연극 작품을 올리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어요. 연극인들의 삶은 그런 거 같아요. 항상 돈에 쪼들리고, 돈에 쪼들리면서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을 못할 때가 많아요. 가령 경조사비 내는 것도 힘들어서 인간관계가 멀어지고 우리끼리만 만나면서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계속 연극을 해야 하나, 회의적인 생각도 했습니다. 이 친구가 죽고 나서 예술인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고, 지금도 그런 고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재밌는 연극을 보려면 인천으로 가야
▲ 청소년연극제에 참여했던 청소년들이 김선찬 지회장에게 연극수업을 받은 뒤 연습을 하고 있다. ⓒ 김영숙
한국연극협회 인천시지회는 1972년 경기도 인천시지회로 출발했다. 1983년 인천직할시지회로 독립했고, 1995년 지금의 인천광역시지회가 됐다. 지회의 주요사업은 인천(항구)연극제와 인천청소년연극제다. 인천항구연극제는 올해가 35회이고, 청소년연극제는 21회다. 올해 인천연극제는 4월 1일부터 16일까지 열린다.
"작년부터 시작한 게 시민연극제이고, 재작년부터 시작한 게 힐링연극콘서트입니다. 시민연극제는 인천의 관객을 개발하자는 의도로 시작했어요. 지역에 시민연극단체들이 있는데 그들의 연극 수준을 높이는 데 전문가들이 도움을 준다면 지인들이 보러 와서 연극에 관심이 생기겠죠. 그러면 또 보러 오게 돼 연극 관객들을 확보하는 데 보탬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힐링연극콘서트는 1년간 연극협회에서 했던 연극 중 재밌는 것들을 모아 관객에게 보여주는 행사다. 콘서트라는 이름을 붙인 건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토크콘서트나 파티와 결합하는 축제와 같은 연극제를 만들기 위해서란다.
2015년에 지회장직을 맡은 그의 임기는 내년 2월까지다. 임기 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365 프로젝트'를 하려고 합니다. 재밌는 문화공간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관에서 여러 문화공간을 만들었는데 효용성이 없어요. 다목적 공간이기 때문이죠. 예술가 중심의 공간이 없다는 생각에 예술가와 시민이 같이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어서 고민했습니다. 소극장타운이 생겨 축제와 공연, 파티를 한곳에서 하는 거죠. 이 프로젝트는 365일 매일 재밌는 공연을 볼 수 있게 하려고 기획하고 있습니다. 전 정말 인천을 사랑해요. 인천이 문화예술의 불모지라고 얘기하는데 자존심이 상합니다. '인천에는 색다른 연극을 볼 수 있어. 연극을 보려면 인천으로 가야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인천이 되게 미력하나마 노력해볼 작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시사인천>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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