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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번째 통곡소리 들린 후, 더 힘든 시간 보내요"

팽목의 봄을 위한 노동자들의 동행... 망각을 거부한다

등록|2017.03.14 10:37 수정|2017.03.14 10:37

▲ ▲ 노동자교육기관 회원들은 팽목항 방파제에서 노란우산으로 ‘사람먼저’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이를 서영석 사진작가가 드론으로 촬영했다.<사진제공 노란우산 프로젝트> ⓒ 시사인천




아픈 상처가 있다. 반드시 아물어야만 하는 상처다. 그 상처가 내 상처는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아프지 않지만 아프다. 다른 사람의 상처지만 공감하기에 아프고, 다른 사람의 상처이기에 쉽게 잊을 수 있어서 아프지 않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어느덧 3년이 되어간다. 3년 동안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의 상처는 단 한 번도 아문 적이 없다. 그들의 짓무른 살갗을 정부는 방치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곪아가는 상처는 세상에 그대로 노출됐다. 누군가는 그 상처와 함께 했고, 누군가는 잊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점점 무뎌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기, 망각을 거부한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잊지 않기 위해, 기억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노란 리본과 함께 거리로 나서고 있는 노동자교육기관 회원들이 그들이다.

지난 1월 9일 세월호 참사 1000일을 맞아 인천 백운역에서 추모행사를 연 이들은 세월호 참사 3주년을 한 달여 앞둔 3월 4일, 팽목항으로 향했다. 그 길을 나도 동행했다.

새벽 5시, 희붐한 하늘빛이 세상을 비추기 전부터 100여명이 부평공원으로 모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가방에, 가슴에 노란 리본을 매거나 팔목에 노란 팔찌를 차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선연히 빛나는 노란빛깔이 어둡고 차가운 새벽 공기를 밝혔다.

5시 20분, 버스는 출발했다. 어스름을 뚫으며 줄달음치는 버스 안에서 빼곡하게 김이 서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바깥풍경이었지만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오전 10시 30분, 팽목항에 닿았다. 버스에서 내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녹색 펜스에 달려있는 헤지고 빛바랜 노란 끈들이었다. 포기할 수 없기에 끊어질 수 없는 많은 소망들이 바람에 흩날리면서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겨 분향소로 향했다. 분향소 입구 벽면에는 '차가운 바다 속에 아직도 사람이 있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실종자 9명의 사진과 이름이 걸려있었다. 나는 그 이름들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단원고 2학년 1반 조은화양, 단원고 2학년 2반 허다윤양, 단원고 2학년 2반 남현철군, 단원고 2학년 6반 박영인군, 단원고 교사 고창석님, 단원고 교사 양승진님, 권재근님과 아들 혁규군, 이영숙님..."

"하루빨리 304번째까지 이름을 찾기를"

분향을 마치고 분향소 옆에 있는 자그마한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여전히 팽목항을 지키고 있는 세월호 희생자 단원고 2학년 9반 진윤희양의 삼촌 김성훈씨와 아직 바다 속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2학년 1반 조은화양의 어머니를 만났다.

주검이 돼서야 바다 위로 올라올 수 있었던 희생자들 가운데 단원고 여학생 90%를 팽목항 임시안치소에서 직접 확인했던 김성훈씨는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올라온 아이들은 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고,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삼선 아디다스 트레이닝복도 입고 있었고, 머리는 가지런히 정리돼있었고, 손가락들은 다 펴져있었습니다. 부모님들은 한 아이 한 아이 확인하면서 자신의 아이를 찾았습니다.

한쪽에서 오열소리가 들리면 '한 아이를 찾았구나' 또, 반대편에서 오열소리가 들리면 '아 또 한 아이를 찾았구나' 생각했습니다. 임시안치소 옆에 있다 보니 24시간 통곡소리밖에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제 몸에서 포르말린 냄새가 나 체육관에 가면 저한테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며 가족들이 저를 피했습니다.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295번째 황지연양을 마지막으로 부모님들의 통곡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지금은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루빨리 296번째에서 304번째까지 모두 이름을 찾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도 올해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소원을 남겼다.

"남은 9명이 다 찾아지기를 기도해주세요"

▲ ▲ 기행 참가자들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을 찾자는 의미를 담아 노란우산으로 ‘사람먼저’라는 글자를 만들고 있다. ⓒ 시사인천


다음으로 조은화양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여러 방송과 언론매체에서 말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 속 어머니는 자식을 잃고도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는 어미의 한을 담아 언제나 울부짖고 있었다.

우리와 만난 자리에서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간의 모든 감정이 제멋대로 뒤엉켜 끝없이 흘러나오는 그 눈물의 깊이를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에 비하면 내 눈물은 너무도 보잘것없는 것이라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어머니와는 30분 정도 마주했다.

"저희는 유가족이란 자리가 너무 부러워요. 그 자리로 가서 엄마로서, 사람으로서 저희 아이를 보내주고 싶어요. 그런데 저희가 지금 갈 수 있는 자리가 미수습자라는 자리밖에 없어요. 우리가 엄마고 아빠면 아이를 불렀는데 아이가 대답을 바로 안 하면 속상하잖아요. 그리고 얘기했는데 엉뚱한 대답을 하면 나 무시하는 것 같고 그것만으로도 정말 속상하잖아요. 엄마들은 반찬을 해놓았을 때 아이들이 잘 안 먹고 맛없다 그러면 그 말 한마디에 상처받잖아요. 그게 엄마고 아빠고 사람이잖아요. 근데 4년째 바다 안에 아이를 두고 있는 저희는 과연 우리가 사람일까 우리를 엄마 아빠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해요.

저희가 이야기하는 것은 딱 하나에요. 저희 아이 찾아서 집에 갈 수 있게끔 도와달라고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그 다음에 아이가 왜 그렇게 오래 바다에 있어야만 했는지, 먼저 올라온 아이 친구들이 분향소에서 왜 그렇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요. 그리고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법과 제도를 바꿔서 다른 사람들이 아이들이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아이들 덕분에 이 나라가 이렇게 바뀌었다고, 아이들의 희생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어요.

오늘 집에 가시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네가 있어 행복하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해주세요. 은화 오빠가 한 명 있는데요, 셋이 같이 앉아 밥을 먹은 지가 몇 년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엄마나 아빠 중 한 명은 바다에 있는 딸을 찾아와야하고, 한 명은 그냥 주저앉아 있는 남은 자식의 인생을 살게 해야 해요. 저희가 집에 갈 수 있게끔 제발 도와주시구요, 날마다 행복하게 사세요. 그러시면 돼요. 그리고 계신 자리에서 세월호가 인양이 되기를, 남은 9명이 다 찾아지기를 기도해주세요. 그러면 감사할 것 같아요"

노란우산들로 새긴 '사람 먼저'

▲ ▲ 기행 참가자들은 분향소에서 노란우산을 펼쳐들고 팽목 방파제까지 걸어갔다. ⓒ 시사인천


여운 가득한 만남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와 노란우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노란우산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서영석 사진작가는 "사진작가로서 많은 사람들이 노란우산을 든 장면을 사진으로 촬영해 기록으로 남기면, 미수습자 아홉 분의 가족과 희생자 유가족에게 '함께 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 끝까지 힘을 내시라고 위로할 수 있겠다' 생각해 노란우산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들려줬다.

우리는 각자 노란우산 하나씩을 펼쳐들고 분향소부터 팽목 방파제까지 300여 미터를 이동했다. 그 다음 한 명씩 정해진 자리에 서서 우산으로 '사람 먼저'라는 글씨를 만들어냈다. 드론이 전체 과정을 촬영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잠시 개인시간을 가졌다. 붉은 등대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난간 한편에 기대어 2014년 4월 16일, 침몰하는 배와 함께 수백 명의 사람들을 삼킨 그토록 잔인했고 원망스러웠던 바다를 바라보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햇살은 따뜻했고, 파광이 어른대는 바다의 물결은 고요했으며 아름다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바다는 잔인하지 않았다. 언제나 잔인했던 건 그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감추기 위해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포기했던 사람들이었다.

팽목항에는 아픈 상처가 있다. 반드시 아물어야만 하는 상처다. 하지만 그 상처가 언제 아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도 누군가는 그 상처와 함께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의 상처가 아니기에 잊은 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를 향해 던지는 질문 하나.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멀어지는 팽목항을 돌아보며 다짐했다. 망각, 거부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강재원 기자는 노동자교육기관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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