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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은 장방형' '1회 경구투여'... 의약품 설명서 어렵다

[주장] 국립국어원 순화어, 의약품 등에 우선순위 둬야

등록|2017.03.20 10:49 수정|2017.03.20 14:13
두어 달 전이었습니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아 구급약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친구 녀석과 함께 닭볶음탕 집에 갔습니다. 기분도 좋은데 한잔할까? 권했더니 왠지 속이 좋지 않아 오늘은 어렵겠다며 미안하답니다. "뭐, 미안할 것까지야" 하고는 탕이 잘 익도록 국자로 전골냄비를 이리저리 휘젓는데, 갑자기 녀석이 숨을 헐떡입니다. "뭐야? 왜 그래?" 묻는 제 말에, 친구는 대답 대신 품에서 약을 급히 꺼내어 제 손에 쥐어놓고는 그대로 쓰러져버렸습니다.

식당 안은 아수라장이 됐지만 이내 차분함을 되찾았습니다. 손님들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친구가 기댈 공간을 마련해주었고 식당 사장님은 바로 119에 신고를 해 주셨죠.그리고 저는 친구가 쥐여준 약 상자에 적힌 복용법을 급히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직육면체로 된 작은 상자의 여섯 면을 모두 뒤져서 찾은 '복약법'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성인 및 6세 이상 소아 일 1회 10ml 경구투여... 무슨 무슨 염산염...  무슨 외용제와 복용'.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더군요. 결국 구급대원분들이 오셔서 필요한 조치를 해 주셨고 친구는 무사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위급한 상황에서 제게 가장 적절한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저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이 됐죠.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런 기사가 뜨더군요.'닭도리탕을 닭볶음탕으로 순화하는 것이 옳은가.' '도리'가 일본어라는 근거가 없고 닭볶음탕의 조리 과정에 볶는 과정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 논쟁을 다룬 재미있는 기사였습니다. 순화되지 않은 말 때문에 경을 치고 돌아온 길이라 기사에 소개된 논쟁을 읽고 있노라니 기가 차더군요. 메뉴도 하필 그날 먹은 닭볶음탕이라 지금도 기사의 내용이 잊히질 않습니다.

성상은 장방형, 변을 보고 싶은 마음은 '변의'?

의약품 설명서장방형, 변의, 성상, 경구투여 등의 한자 용어나 불필요한 외래어 사용이 많이 보인다. '1알'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을 10ml로 기재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불편도 있다 ⓒ 강동희


이 글을 읽는 몇몇 분들은 '경구투여가 뭐가 어렵나' 하실지도 모릅니다.글쓴이의 교육 수준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요. 하지만 저는 취업 때문에 '셰어 하우스의 순화어는 공유 주택'이라며 순화어 목록을 달달 외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한국어 능력을 갖춘 제게도 약 상자의 문구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스티커'를 '붙임 딱지' 따위로 '순화'하는 동안 정작 그 어떤 말보다도 순화하여 쉽고 편하게 써야 할 필요성이 큰 영역이 방치돼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약 상자에 쓰여 있던 문제의 문구는 그냥 '6살 이상 및 어른부터 하루에 한 알씩 입을 통해 삼킨다'고 적어도 뜻이 통하는 말이었습니다.

문득 다른 약들도 그런가 싶어 제가 가진 약들을 살펴봅니다. 다행히도 비교적 건강하여 봄철 알레르기약과 변비약 정도만 준비돼있습니다. 그런데 알레르기약의 설명서를 읽어보니 '성상'은 흰색 '장방형'이고 효능은 피부 '소양증'이며 연령이나 증상에 따라 '증감'할 수 있고 '알코올'과 함께 투여될 수 없으며 엄격한 품질관리를 '필했다'는군요.

변비약에 '변의'... '전의'를 상실했다

성상,장방,소양 모두 국립국어원의 순화어 목록에 들어맞는 말은 없습니다. 이번엔 변비약을 꺼내봅니다. 세상에, '변을 보고 싶은 상태나 의지' 를 뜻하는 표현으로 '변의'라는 말이 등장하는군요. 정말이지, '전의'를 상실하고야 말았습니다.

짧은 제 배움에 의하면 한자어는 전문적이거나 구체적인 내용을 담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의적인 표현을 피하고자 일부러 한자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죠. 의약품 분야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양과 생김새가 흰색의 마름모이고 가려움증에 효과가 있다'는 말을 굳이 흰색 장방형으로 쓸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최소한 의료 소비자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병기(같이 씀)하는 정도의 배려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어린이에게 '거기 찬장에서 장방형 약 얼른 부탁해!'라고 하면 제대로 찾아다 가져올 수 있을까요.

국립국어원의 순화어 정책 역시 정책을 위한 정책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게이트'를 '의혹사건'으로 순화한 것은 그 순화된 말이 여전히 한자어란 점에서 한계가 보이고, '드레스코드'를 '표준옷차림'으로 순화 및 표준화한 것은 아예 단어의 원래 의미 자체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오늘 저녁 표준옷차림은 크리스마스입니다'와 같은 문장이 어색하단 사실만 봐도 금세 알 수 있죠.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쉽게 알 수 있도록 의약품의 설명서는 쉬워져야 합니다. 또한, 국립국어원은 어떤 말부터 순화해야 하는지 우선순위를 알고 접근해주길 바랍니다. 필요한 곳에서 순화된 '말'이, 한 생명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www.kangdonghee.com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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