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을 품어 다섯을 낳고 셋을 건지다
[여성의 일과 삶 이야기, 엄마를 인터뷰하다 ②]
'바위투성이 틈에 나리꽃 두 송이가 피었드라. 저기 있으면 못 살지 싶어 옮겨 심었지. 근데 돌아보니 구시모래 밭이더라. 또 다시 심어놓고 돌아서면 구시모래 밭이고……. 희한하지? 그렇게 놓치려고 그랬는지.'
우리 엄마 무숙씨는 일곱을 품어 다섯을 낳고 셋을 건졌다.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무숙씨는 친정에 있었다. 막노동을 하다가 병을 얻은 남편도 함께였다. 그해 가을 추잠(가을누에)을 하느라 무숙씨는 하루 종일 다래끼(아가리가 좁고 바닥이 넓은 바구니)를 메고 뽕잎을 따 누에를 먹였다. 오후가 되면 밑이 처지고 배가 뭉치며 아팠다.
몸을 추스른 남편은 땅 한 뙤기 없이 농사짓는 일이 덧정도 없다며 죽든 살든 서울로 가자했다. 돈암동 산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부른 배를 안고 물을 져다 밥을 하고 빨래를 빨고 살림을 했다. 하루 네 동이는 길어야 살림을 할 수 있었다.
남산만한 배를 하고 물동이를 져 나르는 무숙씨를 보고 주인집 할머니는 '주야 엄마야. 신랑이 안 져다 주면 사 먹어라. 그러다 골병들면 사내들이 알아줄 줄 아나' 하며 안타까움에 혀를 찼지만 한 동이에 5원씩 하는 물을 사 먹을 주제가 못되었다.
아이는 돈암동 고모할머니 집에서 낳았다. 가정대를 다니던 춘선이 고모가 태를 가를 가위며 모든 물품을 열탕소독하고 정성을 기울였지만 아기는 감염이 되었다.
"낳았는데 1주일 만에 파상풍으로 죽었지. 집에서 낳았는데 그때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퍼. 기집애가 참 야무지게 생기고 이뻤는데. 1주일 만에 죽는데 얼굴이 새카맣게 질려서……. 애를 껴안고 있는데 새까맣게 질려서 숨을 쌕쌕 거리다 좀 풀렸다 또 그러고. 사람이 간이 녹더라고. 결국 죽어 이불에 싸서 구석에 놨는데 조금 있다가 뽀글뽀글 소리가 나. 아이고, 깨나나보다 싶어 얼른 들여다보니 아니고 그대로 갔지. 그래도 그거는 고모네가 자기 호적에 출생신고를 해서 사망처리를 했지. 화장터에 가서 했어. 그래도 걔는 곱게 그렇게 갔지. 나중에 것은 너무 허무하지. 너무 허무하지. 그 얘긴 내가 안할란다."
무숙 씨가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친다.
그렇게 25살에 아이를 잃었다. 몸조리도 못하고 바로 산동네 집으로 돌아와 세 살배기 딸을 보살피고 물동이를 져다 살림을 했다. 그렇게 놓친 아이가 돌아왔는지 또 바로 임신이 되었으나 무숙씨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앉아 백일복을 뜨고, 전구를 껴서 양말코를 깁는 부업을 했다. 정부미 혼합곡의 찰기 없는 밥마저 양껏 먹지 못했다. 아이를 먹이고 남편을 챙기고 나면 늘 양식은 부족했다. 길고 긴 점심을 굶는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녀의 나이 26세, 아이를 품은 임산부로 입맛이 꿀맛이었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뱃속의 아이도 당연히 주렸다.
"걔는 영양실조가 된 게 먹지도 못하고, 매일 백일복 뜨느라고 쭈그리고 앉았었어. 애 몸틀 때까지 앉았다가 낳으니 얼마나 작은지 힘도 안주고 쑥 나오더라. 양수만 방으로 하나 터지고 그냥 깨구락지 같았어. 얼마나 작은지."
또 아이를 잃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삼 일 만에 일어나 이사를 했다. 돈암동에서 정릉까지 짐을 이고 지고 날랐다. 사람들이 폐병쟁이가 왔나 했다고 한다. 젊은 여자가 얼굴이 노랗고 비썩 마른 게 못쓰게 생겼더라고.
"3일 만에 죽었지. 아버지랑 증조할머니가 데리고 나가서 한강에 얼음구멍을 깨고 넣으려니 쏙 나오고 쏙 나오고 해가지고……. 어디 뒷산에 언 산에 대강 해 놨겠지. 어딘지도 몰라 나는……. 먼저 애는 제대로나 보냈지. 이거는 아무 데나 버려두고."
목구멍 풀칠하기도 바빠서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 어쩌면 다행이라고도 여겼다.
'덮어 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아들딸 구분 말고 둘 만 낳자' 같은 산아제한 슬로건이 쏟아지던 70년대 중반, 출산이 1이면 낙태가 2.57로 낙태가 산아제한의 방법으로 적극 권장되었다. 그 시절 무숙씨도 아이 둘을 낙태했다. 낙태를 하면서 '배꼽수술'도 같이 받았다. 남자들은 정관수술, 여자들은 '배꼽수술'이라는 불임수술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서른넷의 무숙씨는 두 번째 낙태 수술을 하면서 배꼽수술을 서비스로 받았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살지 이러고 살면 뭐하나 했어. 실밥도 안 뽑고 이틀만인가 화장품 장사를 나갔더니 지점장이 '이 아줌마가 죽을라고 환장을 했나' 하드라. 겁이 나는지 아픈지도 몰랐어."
무숙씨는 일곱을 품어 다섯을 낳고 셋을 붙잡았다. 겨우 붙잡은 삼남매를 지키느라 아픈지도 설운지도 모르고 살았다. 가끔 '아이고 그것들이 다 살았으면 어떻게 키웠을까? 잘 죽었지.' 했다가 아이들이 다 크고 살림이 나아지자 '아유 그것들이 다 살았으면 얼마나 오부지고 좋았을까? 기집애들이 참 야무지고 이뻤는데…….' 무숙씨도 덤덤히 말했고 나는 그것을 그녀의 일이요 지난 기억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이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숙씨의 사랑은 끝난 게 아니었다.
"절에다 해놨어. 둘 다 절에다 올렸지. 하나에 130씩 주고 천도제도 했어. 옷도 한 벌씩 사서 놔주고 떡도 올리고 과일도 올려서 보냈어. 어려서 그러면 늘 부모한테 붙어있대. 갈 데가 없대. 부처님한테 올리며 위패도 만들고 제사도 지내줬어."
75세의 무숙씨는 50여년을 묵혀뒀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인천에 있는 절까지 혼자서 갔다. 애통하게 잃어버린 두 딸과 지워버린 아이 둘의 천도제를 지냈다. 평생 어깨를 내리 누르던 돌덩이와 가슴에 무엇인가 매달려 있던 것 같은 느낌이 사라졌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아플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긴 세월을 지나 혼자 절을 찾아가 제를 올렸다는 얘기를 듣자, 아이를 태중에 품고 열 달을 보낸 젊은 여자의 얼굴이, 죽어가는 아이를 품에 안고 어쩌지 못하는 젊은 엄마가 떠올랐다.
긴 세월을 건너와 지키지 못한 자식들의 제를 올리는 늙은 엄마의 오래 묵은 사랑이 이제야 아팠다. 마른 울음처럼 끅끅 목 안에 걸리던 슬픔이 눈물이 되지 못하고 몸살로 왔다. 밤새 앓았다. 다음날 아침에야 통곡처럼 기도처럼 눈물이 솟구쳤다.
"다 하고 났더니 늘 가슴에 뭐가 매달린 것처럼 무지룩 하던 게 없어졌어. 그 일이 가슴에 끼어 있었나봐. 평생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은 것도 없어지고……. 꿈도 꿨어. 웬 보라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다 큰 처녀가 내 손을 놓으며 '난 이제 저기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고 가더라. 이제 가나 봐 진작 해줄 걸."
무숙씨가 눈물에 씻겨 맑게 진 얼굴로 웃는다.
"나 죽으면 천도제는 꼭 지내줘라. 한이 많아서 잘 가야지. 절에 이름만 올리면 되. 내가 다 해놨어."
내가 물었다.
"50년이 다 된 일인데 생각이 나든가?"
"자식을 보내고 어찌 잊니? 그럴 수가 없다, 잊을 수가 없는 거야. 그땐 어떻게 애들 굶기지 않고 키우나 정신이 빠져 있어서 그렇지 어떻게 잊어? 세월이 다르지 사람이 다르냐……."
이 긴 이야기를 끝내며 무숙씨가 말했다.
"부끄럽지…….뭐 잘 한 일이라고 말을 할까 만은, 그렇게도 살았다구……."
우리 엄마 무숙씨는 일곱을 품어 다섯을 낳고 셋을 건졌다.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무숙씨는 친정에 있었다. 막노동을 하다가 병을 얻은 남편도 함께였다. 그해 가을 추잠(가을누에)을 하느라 무숙씨는 하루 종일 다래끼(아가리가 좁고 바닥이 넓은 바구니)를 메고 뽕잎을 따 누에를 먹였다. 오후가 되면 밑이 처지고 배가 뭉치며 아팠다.
몸을 추스른 남편은 땅 한 뙤기 없이 농사짓는 일이 덧정도 없다며 죽든 살든 서울로 가자했다. 돈암동 산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부른 배를 안고 물을 져다 밥을 하고 빨래를 빨고 살림을 했다. 하루 네 동이는 길어야 살림을 할 수 있었다.
남산만한 배를 하고 물동이를 져 나르는 무숙씨를 보고 주인집 할머니는 '주야 엄마야. 신랑이 안 져다 주면 사 먹어라. 그러다 골병들면 사내들이 알아줄 줄 아나' 하며 안타까움에 혀를 찼지만 한 동이에 5원씩 하는 물을 사 먹을 주제가 못되었다.
아이는 돈암동 고모할머니 집에서 낳았다. 가정대를 다니던 춘선이 고모가 태를 가를 가위며 모든 물품을 열탕소독하고 정성을 기울였지만 아기는 감염이 되었다.
"낳았는데 1주일 만에 파상풍으로 죽었지. 집에서 낳았는데 그때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퍼. 기집애가 참 야무지게 생기고 이뻤는데. 1주일 만에 죽는데 얼굴이 새카맣게 질려서……. 애를 껴안고 있는데 새까맣게 질려서 숨을 쌕쌕 거리다 좀 풀렸다 또 그러고. 사람이 간이 녹더라고. 결국 죽어 이불에 싸서 구석에 놨는데 조금 있다가 뽀글뽀글 소리가 나. 아이고, 깨나나보다 싶어 얼른 들여다보니 아니고 그대로 갔지. 그래도 그거는 고모네가 자기 호적에 출생신고를 해서 사망처리를 했지. 화장터에 가서 했어. 그래도 걔는 곱게 그렇게 갔지. 나중에 것은 너무 허무하지. 너무 허무하지. 그 얘긴 내가 안할란다."
▲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 - Kathe Kollwitz(1867-1945) 작죽은 아이를 안고 오열하는 모든 어머니들의 참혹한 슬픔 ⓒ 정현주
무숙 씨가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친다.
그렇게 25살에 아이를 잃었다. 몸조리도 못하고 바로 산동네 집으로 돌아와 세 살배기 딸을 보살피고 물동이를 져다 살림을 했다. 그렇게 놓친 아이가 돌아왔는지 또 바로 임신이 되었으나 무숙씨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앉아 백일복을 뜨고, 전구를 껴서 양말코를 깁는 부업을 했다. 정부미 혼합곡의 찰기 없는 밥마저 양껏 먹지 못했다. 아이를 먹이고 남편을 챙기고 나면 늘 양식은 부족했다. 길고 긴 점심을 굶는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녀의 나이 26세, 아이를 품은 임산부로 입맛이 꿀맛이었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뱃속의 아이도 당연히 주렸다.
"걔는 영양실조가 된 게 먹지도 못하고, 매일 백일복 뜨느라고 쭈그리고 앉았었어. 애 몸틀 때까지 앉았다가 낳으니 얼마나 작은지 힘도 안주고 쑥 나오더라. 양수만 방으로 하나 터지고 그냥 깨구락지 같았어. 얼마나 작은지."
또 아이를 잃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삼 일 만에 일어나 이사를 했다. 돈암동에서 정릉까지 짐을 이고 지고 날랐다. 사람들이 폐병쟁이가 왔나 했다고 한다. 젊은 여자가 얼굴이 노랗고 비썩 마른 게 못쓰게 생겼더라고.
"3일 만에 죽었지. 아버지랑 증조할머니가 데리고 나가서 한강에 얼음구멍을 깨고 넣으려니 쏙 나오고 쏙 나오고 해가지고……. 어디 뒷산에 언 산에 대강 해 놨겠지. 어딘지도 몰라 나는……. 먼저 애는 제대로나 보냈지. 이거는 아무 데나 버려두고."
목구멍 풀칠하기도 바빠서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 어쩌면 다행이라고도 여겼다.
'덮어 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아들딸 구분 말고 둘 만 낳자' 같은 산아제한 슬로건이 쏟아지던 70년대 중반, 출산이 1이면 낙태가 2.57로 낙태가 산아제한의 방법으로 적극 권장되었다. 그 시절 무숙씨도 아이 둘을 낙태했다. 낙태를 하면서 '배꼽수술'도 같이 받았다. 남자들은 정관수술, 여자들은 '배꼽수술'이라는 불임수술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서른넷의 무숙씨는 두 번째 낙태 수술을 하면서 배꼽수술을 서비스로 받았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살지 이러고 살면 뭐하나 했어. 실밥도 안 뽑고 이틀만인가 화장품 장사를 나갔더니 지점장이 '이 아줌마가 죽을라고 환장을 했나' 하드라. 겁이 나는지 아픈지도 몰랐어."
무숙씨는 일곱을 품어 다섯을 낳고 셋을 붙잡았다. 겨우 붙잡은 삼남매를 지키느라 아픈지도 설운지도 모르고 살았다. 가끔 '아이고 그것들이 다 살았으면 어떻게 키웠을까? 잘 죽었지.' 했다가 아이들이 다 크고 살림이 나아지자 '아유 그것들이 다 살았으면 얼마나 오부지고 좋았을까? 기집애들이 참 야무지고 이뻤는데…….' 무숙씨도 덤덤히 말했고 나는 그것을 그녀의 일이요 지난 기억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이입하지 않았다.
▲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 Kathe Kollwitz(1867-1945) 작자식을 지키기 위해 강인해지는 여자들의 모습이 눈물겹다. ⓒ 정현주
"절에다 해놨어. 둘 다 절에다 올렸지. 하나에 130씩 주고 천도제도 했어. 옷도 한 벌씩 사서 놔주고 떡도 올리고 과일도 올려서 보냈어. 어려서 그러면 늘 부모한테 붙어있대. 갈 데가 없대. 부처님한테 올리며 위패도 만들고 제사도 지내줬어."
75세의 무숙씨는 50여년을 묵혀뒀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인천에 있는 절까지 혼자서 갔다. 애통하게 잃어버린 두 딸과 지워버린 아이 둘의 천도제를 지냈다. 평생 어깨를 내리 누르던 돌덩이와 가슴에 무엇인가 매달려 있던 것 같은 느낌이 사라졌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아플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긴 세월을 지나 혼자 절을 찾아가 제를 올렸다는 얘기를 듣자, 아이를 태중에 품고 열 달을 보낸 젊은 여자의 얼굴이, 죽어가는 아이를 품에 안고 어쩌지 못하는 젊은 엄마가 떠올랐다.
긴 세월을 건너와 지키지 못한 자식들의 제를 올리는 늙은 엄마의 오래 묵은 사랑이 이제야 아팠다. 마른 울음처럼 끅끅 목 안에 걸리던 슬픔이 눈물이 되지 못하고 몸살로 왔다. 밤새 앓았다. 다음날 아침에야 통곡처럼 기도처럼 눈물이 솟구쳤다.
"다 하고 났더니 늘 가슴에 뭐가 매달린 것처럼 무지룩 하던 게 없어졌어. 그 일이 가슴에 끼어 있었나봐. 평생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은 것도 없어지고……. 꿈도 꿨어. 웬 보라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다 큰 처녀가 내 손을 놓으며 '난 이제 저기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고 가더라. 이제 가나 봐 진작 해줄 걸."
무숙씨가 눈물에 씻겨 맑게 진 얼굴로 웃는다.
"나 죽으면 천도제는 꼭 지내줘라. 한이 많아서 잘 가야지. 절에 이름만 올리면 되. 내가 다 해놨어."
내가 물었다.
"50년이 다 된 일인데 생각이 나든가?"
"자식을 보내고 어찌 잊니? 그럴 수가 없다, 잊을 수가 없는 거야. 그땐 어떻게 애들 굶기지 않고 키우나 정신이 빠져 있어서 그렇지 어떻게 잊어? 세월이 다르지 사람이 다르냐……."
이 긴 이야기를 끝내며 무숙씨가 말했다.
"부끄럽지…….뭐 잘 한 일이라고 말을 할까 만은, 그렇게도 살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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