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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도 따도 줄지 않는 마법의 나무를 만나다

[오십 넘어 무전여행③] 도전 제주도 밀감 따기 2

등록|2017.03.28 12:59 수정|2017.03.28 12:59
"내일은 뭐해?"
"어 우리 내일 밀감 따기로 했어."
"그래? 밀감 따는 거 보통 힘든 게 아닌데. 할 수 있겠어?"
"에이 그래도 농사꾼의 아들인데 그까짓 거 밀감 따기 쯤이야."
"그래도 안 하다 하면 힘들 테니 오늘은 일찍 자."

우리를 바라보며 친구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한 마디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친구가 자기 방으로 들어 간 후 우리는 술판을 벌였다. 제주도 아름다운 밤을 그냥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주도 오면서 둘이 죽이 맞았던 것 중에 하나가 '그러거나 말거나 놀 수 있을 때 놀기'라는 생각이었다. 그럼으로 우리는 다음날 계획잡기라던가 무엇을 하기 위해 오늘을 아끼는 짓은 하지 않기로 했었다. 우리는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희희덕거리며 맛난 한라산 소주를 홀짝였다. 술이 얼큰해져 기분이 좋아졌는데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난 친구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우리에게 한 마디 한다.

"덤 앤 더머! 안자? 내일 밀감 딴다며? 하여튼~음 쯧쯧."

친구가 들어간 후 '덤 앤 더머'라는 말에 둘은 한참을 배꼽 잡고 웃었다. 하긴 오십 넘은 두 중년 사내들이 돈도 없이, 아무 계획도 없이 제주도에 왔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신기한 일일 듯했다. 거기에 한다는 짓이 남들처럼 관광 다니는 것도 아니고 유목농업이 어쩌니 하면서 뜬금없이 밀감을 따러 간다고 하질 않나, 거기에 매일 밤 술타령에 뭐가 그리 좋은 지 하루 종일 희희덕거리고 있으니 어디가 좀 모자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오기 전 '오십 넘어 무전여행이라니. 부럽다 부러워' 하며 전화를 끊던 친구 말이 떠올라 우리가 좀 모자라 보이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아름다운 제주도 밤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오전 7시, 알람 소리가 요란하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미리 끓여 놓았던 김치찌개에 대충 말아 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 늦게까지 치른 파티에 몸은 찌뿌드드했지만 밀감 따러 간다는 기대에 마음만은 상쾌했다. 사실 우리는 밀감 따는 일이 처음이었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웬만한 농사일은 다 거들어 보았지만 충청도 산골에 밀감 나무가 있을 턱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물론 진안 촌놈인 동행자도 마찬가지였다.

농장 주인은 엊그제 잠깐 인사를 나누었던 후배가 다니는 여행사 사장이었다. 밀감 밭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지만 귤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어 밭 전체가 온통 노란빛으로 덮여 있었다.

"생각보다 밀감 밭이 작네요. 이것만 다 따면 되나요?"
"다 따면 좋겠지만 이거 다 못 따요. 이래 보여도 양이 엄청 많아요."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작은 밭이 정말 큰 밭이라는 것을.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 작아 보였던 밀감 밭이 따도 따도 줄지 않는 마법 같은 공포의 밭으로 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

제주 밀감밀감은 한 나무에 많이도 열린다. ⓒ 전병호


밀감 밭돌담에 둘러 쌓인 작아 보였던 밀감 밭이 밀감을 따보니 그렇게 큰 밭이 될 줄은 몰랐다. ⓒ 전병호


"먼저 콘테나를 옮겨 놓아야 해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했다. 학생 때 노가다판 처음 나가서 '빠루(장도리의 일본말?)' 가져오라는 말을 못 알아 들어 난처했던 기억이 났다. 어느 노동판에 가든 그곳에서 쓰는 말부터 먼저 배워야 일하기가 수월하다.

눈치로 대충 훑어 보니 한쪽에 쌓여 있던 노란 박스를 말하는 것 같았다. 아~ '콘테나' 아마도 '컨테이너'를 그렇게 부르는 듯 했다. 주인의 지시대로 우리는 '콘테나'를 밀감 밭 여기저기 옮겨 놓고 밀감 따기를 시작 했다.

"밀감을 잡고 잡아 당기지 말고 가위로 따세요. 그리고 꼭지를 한번 더 다듬고 넣으면 돼요. 꼭지를 안 다듬고 넣으면 꼭지가 밀감에 상처를 내 상품이 상하니까 조심해서 잘 다듬어 따세요."

미리 와 있던 현지 아주머니 한 분이 밀감 따는 법을 간략하게 알려 주었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무뚝뚝해 보이는 현지 아주머니는 밀감을 따면서 여러 가지 제주도 얘기를 해주었다.

"예전에는 밀감 나무 한 그루 있으면 자식 대학공부까지 시켰다고 해요."

그 만큼 밀감이 귀했고 비싼 나무였다는 설명이다. 지금이야 농사 짓는 사람도 많고 흔해져 밀감이 귀한지 몰라서 그렇지 제주도에서 밀감은 어느 집에서나 귀한 대접을 받았던 나무였다는 설명이다.

밀감 따기밀감을 가지에서 딴 후 다시 꼭지를 다듬어야 다른 밀감에 상처를 주지 않는다. ⓒ 전병호


재미있던 밀감 따기도 한나절이 지나니 조금씩 힘들어졌다. 둘은 점점 말 수가 줄어 들었다. 아마도 전날 친구 말을 듣지 않았던 탓이라 생각했다. 해장도 할 겸 잠시 쉴 겸 둘은 은근히 새참을 기다렸다. 그런데 밀감 따기 시작한 지 3시간이 지나 가는데 쉬자는 말도 새참 먹자는 말도 없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국 새참도 없이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다. 점심을 먹고 일을 시작하면서 둘은 투덜거렸다.

"뭔 놈에 일을 참도 안주고 시켜. 오후에는 막걸리라도 한 잔 주겠지. 노동에 막걸리가 빠지면 매너가 아니지."

하지만 오후에도 막걸리 새참은 없었다. 우리는 그저 따고 또 따고 하루 종일 주구장창 밀감만 땄다. 새참 없이 반복되는 밀감 따기는 오전에 그리 작아 보였던 밀감 밭을 따도 따도 줄지 않는 거대한 공포의 밭으로 보이게 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무렵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늘은 그만 하시고 내일 아침 같은 시간에 오세요."

시간을 보니 오후 5시였다.

"제주도는 원래 새참을 안주나?"

집에 돌아와 친구에게 물었다. 안주는 곳이 많다고 한다. 대신 일찍 끝내준다는 거였다. 그래서 내린 결정은 다음날 우리가 막걸리를 사가기였다. 역시 아름다운 제주도 밤을 한라산 소주 파티를 벌이고 찌뿌드드한 몸으로 둘째날을 시작했다. 일이 손에 익어서 그런지 전날보다 휠씬 속도가 붙었다. 하지만 새참도 없고 쉼도 없이 계속 밀감만 따다 보니 점점 지쳐갔다. 전날 오후에 맛본 따도 따도 줄지 않은 마법 같은 공포가 다시 시작되었다.

"새참도 안주고 쉬지도 않고 일하는 것은 노동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동행자는 사가지고 온 막걸리를 안주도 없이 한 모금 마시며 계속 투덜거렸다.

"아니 엊그제 후배 만나서 유목농민이 어떻고, 유목농업이 어떻고 핏대 올려 얘기 하더니 하루를 못 버티고 밀감을 따네 못 따네.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내 말에 둘은 빵 터졌다. 둘은 배꼽을 잡고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덤 앤 더머'처럼 웃으며 피로를 풀고 악으로 깡으로 밀감 따기를 버텼다. 우리의 발악을 하늘도 귀엽게 여겼는지 오후가 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밀감 따기는 못한다. 그 덕분에 오후에는 천막 아래서 밀감 다듬는 일을 했다. 오후 4시쯤 되니 주인이 이제 그만 하자고 한다.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지 우리는 소리 없이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밀감 따기2따도 따도 끝이 없는 밀감 따기, 우리가 밀감을 너무 쉽게 보았다. ⓒ 전병호


"비가 와서 더는 못 딸 것 같네요. 내일은 안 나와도 될 것 같아요. 어제 오늘 수고 하셨고 많이 못 드려 미안해요. 수고 하셨어요."

우리는 일당 봉투를 받았다. 초보 일꾼들이라 도움이 되었는지, 폐는 안 끼쳤는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당 봉투를 받으니 마음이 황홀해졌다. 일찍 일을 마치고 일당까지 받아 돌아 오는 길, 기분이 좋아 날아갈 것 같았다.

"그래 이 맛이 유목노동여행의 맛이지."

이 말을 해놓고 밀감 따기 싫다며 투덜거리던 일이 생각나 둘은 한참을 또 웃었다.

밀감따기 3저 많은 밀감도 누군가의 손에 하나하나 따야 우리가 먹을 수 있다. ⓒ 전병호


짧은 밀감 따기 노동이었지만 작은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마트에서 가끔 사다 먹는 밀감이 이렇게 많은 농부의 손길과 어떤 일당 노동자의 땀방울의 힘을 빌어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 말이다.

'세상에 모든 소비하는 것에는 이렇게 어떤 이들의 땀이 들어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앞으로 밀감 먹을 때는 항상 밀감 노동자의 고마움이 생각날 것 같다. 이렇게 제주도 '유목농업여행' 밀감 따기는 짧은 기간 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과 작은 깨달음과 노동이 주는 영혼의 카타르시스까지 나에게 챙겨 주었다. 물론 쏠쏠한 일당은 덤으로 말이다.

"야 돈 벌었다. 술 먹자."

그날 저녁도 역시 우리는 아름다운 제주도 밤을 만끽하며 하얀색 한라산 소주 파티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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