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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엮다', 이순자의 '얽다'

이순자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읽으며 박근혜가 떠올랐다

등록|2017.03.29 11:37 수정|2017.03.29 11:37
지난 1월 25일 '정규재 TV'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인터뷰에서 "검찰에서는 최순실씨와 박 대통령이 경제적 동일체다. 그래서 정유라에게 뇌물을 건넨 것은 대통령에게 건넨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전개하는데"라며 "혹시 통장 같이 쓰신다든지"라는 질문이 나왔다. 질문 중의 '검찰'은 박영수 특별검사팀을 지칭한다. 

질문에 대해 박근혜 전 대통령은 "희한하게 그런 말 만들었는데, 엮어도 너무 억지로 엮은 거다"라며 "경제공동체라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니, 특검에서도 철회됐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라고 답변했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박근혜가 자신이 뭔가에 의해 엮였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특검을 포함한 거대한 실체가 대통령인 자신을 엮어서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 이순자·전두환 부부. 충북 청주시의 청남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와 비슷한 생각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순자도 갖고 있다. 3월 27일자로 펴낸 이순자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에도 그런 생각이 묻어 있다. 이 책 제19장에서 전직 대통령 전두환을 구속시킨 김영삼 대통령의 조치에 분노를 표출한 뒤, 이순자는 김영삼의 전임자인 노태우 대통령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노태우 정부도 그분을 백담사행이라는 절벽까지 몰고 가기 위해 언론을 이용해 소위 조직적인 언론 플레이를 했었다. 그분 퇴임 직후부터 시작해 수개월간 단 한마디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대중매체를 통해 계획적이고 줄기차게 악의적으로 그분 명예를 훼손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해명할 수조차 없게 얽어매놓고는 항복을 받아내는 방법이었다."

박근혜는 '엮다'란 표현을 쓰고, 이순자는 '얽다'라는 표현을 썼다. 글자는 서로 다르지만, 무언가를 이리저리 묶는 것을 뜻한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게 없는 단어들이다. '돌이켜보면 노태우 정부도'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자는 후임 대통령들인 노태우와 김영삼 모두 자기 남편을 범죄 혐의로 엮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이렇게 엮인 결과로 1995년 12월 3일 일요일 새벽에 자기 남편이 억울하게 구속됐다는 게 그의 말이다. 

김영삼이 주도권 장악 위해 전두환 구속했다는 이순자

이순자는 노태우·김영삼 중에서도 김영삼에게 한층 더한 분노를 표출했다. 이순자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3개월 뒤인 1993년 5월 13일 대국민 담화에서 했던 발언을 거론했다. 

"광주 문제가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5·18 진상 규명은 역사에 맡기도록 합시다."

이렇게까지 자신들을 안심시켰던 김영삼 대통령이 2년 뒤 갑자기 5·18과 12·12 쿠데타 건을 내세워 자기 남편을 구속했다면서 이순자는 분노를 표출했다. 김영삼이 비겁하게 약속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김영삼이 그렇게 한 동기를 두고, 이순자는 1995년 6월 지방자치 선거에서 패배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내부의 민정계(전두환·노태우 계열)를 물갈이하고 자파 중심으로 정계개편을 한 다음에 차기 총선을 치를 목적으로 자기 남편을 구속했다고 말했다. 민정계의 정신적 구심점인 전두환에 대한 사법처리를 통해 제5공화국 세력을 청산하고 이를 통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할 의도로 자기 남편을 구속했다는 주장이다. 

그 같은 김영삼의 의도를 알았기에, 1995년 12월 1일에 날아든 검찰 소환장을 자기 남편이 거부하고, 다음 날인 12월 2일 오전 9시 남편이 집 앞에서 그 유명한 '골목 성명'을 낭독하게 된 것이라고 이순자는 말했다.

뒤이어 이순자는 남편을 엮은 거대한 음모의 마지막 결정판을 다소 분노에 찬 어조로 회고했다. 골목 성명을 낭독한 뒤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고 고향인 경남 합천의 아버지 묘소에 가서 절을 올린 전두환이 그 직후에 당한 일을 이순자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아버지 묘소에 절을 올린 전두환이 합천 조카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인 12월 3일 이른 아침 상황에 관한 것이다.

"만물이 어둠에 쌓여 있던 새벽 6시 34분경, 그분은 여장을 풀었던 합천 장조카 집에서, 급파된 검찰 수사관에 의해 강제 구인되었다. 수백 명의 경찰 병력이 장조카 집을 에워싼 가운데 5·18 특별수사본부에서 파견된 아홉 명의 수사관이 그분 방으로 들이닥쳤다. 수사관들은 잠옷 바람으로 있던 그분을 깨운 후 서둘러 옷만 걸치게 하고는, 곧 수사관 서너 명이 그분의 양팔을 잡아채 연행 차량으로 끌고 갔다."

이 상황에 대한 분노의 심정을 이순자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빌려 이렇게 묘사했다.

"어느 새 집 주위에 모여든 많은 고향 친척들과 주민들이 그처럼 거칠게 끌려가는 그분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흥분했다. 그 새벽, 어이없는 상황 앞에서 함께 그분 곁을 지켰던 장남도, 또 혈기왕성한 고향 청년들도 안타까운 눈물만 삼킬 뿐, 그분을 끌어가는 수사관들에게 순순히 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전직 대통령인 '그분'이 구속되는 상황에 대한 자기 자신의 분노 어린 심정을 고향 친척과 주민들의 표정에 대한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남편을 어처구니없는 구속 사태까지 몰고 간 거대한 음모의 배후에 김영삼이 있었다는 게 이순자의 주장이다. 

물론 이순자라고 해서, 5공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자기 남편을 구속으로 몰고 갔다는 것을 전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자기 남편을 엮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남편이 세상에 큰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영삼이 자기 남편을 엮었다고 몰아세우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라도 변명거리를 찾고 분노의 대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순자처럼 거대한 음모에 엮였다 주장하는 박근혜

검찰 조사 마친 박근혜지난 22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소환되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시간 넘게 조사와 조서 검토를 위해 머문 뒤 귀가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박근혜도 이순자처럼 자기 자신이 거대한 음모에 엮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박근혜는 이순자와 똑같이 말하기가 곤란하다. 누가 자신을 엮었는지 꼭 집어 말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시점부터 지금까지 내내, 정권을 담당한 것은 박근혜 본인 혹은 박근혜 편이다. 전두환은 정권에서 물러난 뒤에 검찰 소환을 받고 구속까지 당했지만, 박근혜는 자신이나 자기편이 정권을 잡은 상태에서 정치적 코너에 몰렸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 하나를 꼭 집어서 '저 자가 나를 엮었다'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최순실 태블릿을 보도한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이 자신을 엮었다고 말하자니, 그것은 곤란할 것이다. 자기에 비해 힘이 현격히 떨어지는 언론인이 대통령을 엮었다고 말하기는 어색할 것이다. 그렇다고 JTBC라는 언론사 자체가 자신을 엮었다고 말하자니, 그것도 곤란할 것이다. 보도 당시의 JTBC 회장이 조중동의 중앙일보를 이끄는 홍석현이고, 넓게 보면 홍석현과 자신이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최순실과 자신의 관계를 집중 보도해서, 지난 대선 때 박근혜를 찍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덕수궁 앞에 가서 태극기를 들지 않고 광화문광장에 가서 촛불을 들도록 만든 보수 언론들. 이들이 박근혜 자신을 엮었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곤란하다. 보수 언론 역시 자기의 우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가 자기를 엮었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다. 국정원과 경찰과 검찰과 군대와 공무원 조직을 장악한 대통령이 전 야당 대표한테 엮였다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 거대한 권력을 갖고도 야당 대표한테 엮었다는 것은, 자기가 게을러서 정권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또 탄핵소추를 의결한 국회한테 엮였다고 말하는 것도 어색하다. 탄핵소추를 의결시킨 결정적 동력은 다름 아닌 여당 의원들이었다. 여당의 비박 세력이었다. 크게 보면 자신과 한편이었던 비박 세력이 국회 의결에 결정적 힘을 제공했으니, 국회한테 엮였다고 말하는 것도 쑥스러울 수밖에 없다.  

박영수 특별검사팀한테 엮였다고 말하는 것 역시 우스운 일이다. 박 특검한테 임명장을 준 것은 자신이 총리로 임명한 황교안 권한대행이었다. 검찰한테 엮였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검찰 역시 황 대행의 영향 하에 있다.

파면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가 자신을 엮었다고 말하는 것도 좀 그렇다. 헌법재판관 9명 중에서 3명은 국회가 선출하고 3명은 대법원장이 지명하지만, 헌법 제111조 2항에 따르면 국회 선출 3명과 대법원장 지명 3명을 포함한 재판관 9명 전원이 최종적으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다.

이렇게 대통령이 임명해놓은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을 엮었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직급만 높을 뿐 물리적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재판관들이 거대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을 엮었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어색한 일이다.

훗날 이순자처럼 회고록을 쓰게 된다면...

이처럼 박근혜는 누구를 꼭 집어서 '저 저자가 나를 엮었다'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이순자는 '처음에는 노태우가 그분을 엮더니, 나중에는 결정적으로 김영삼이 그분을 엮었다'고 주장했지만, 박근혜는 그런 말을 하기가 곤란하다.

사실은 국민 전체한테 엮였지만 '국민들이 나를 엮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신이 세상에 큰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꼭 집어서 '저 자가 나를 엮었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싶겠지만, 그 대상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자신을 탄핵소추와 파면과 구속 위기까지 몰아넣은 보수 언론, 여당 사람들, 검찰, 특별검사, 헌법재판소 등은 어떤 형태로든 박근혜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을 비판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밖에 안 된다. 사실 이들을 움직인 것은 거대한 국민의 힘이므로 이들을 비판할 이유가 없지만, 이들이 자신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이들을 비판할 수 없는 게 박근혜의 처지다. 그러니 그는 속으로 끙끙 앓을 수밖에 없다. 

훗날 이순자처럼 회고록을 쓰게 된다면, 박근혜는 누가 자신을 엮었다고 변명을 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엮은 실체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과 밀접히 관련된 사람들이 거대한 국민의 힘에 이끌려 자기를 응징하는 데 가담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땐 내가 참 외로웠어'라며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말로 그런 회고록을 쓰게 된다면, 박근혜는 이순자처럼 자서전 제목을 <당신은 외롭지 않다>로 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박근혜는 자신의 회고록 제목을 <당신은 외롭다>로 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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