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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 로마황제가 갇힌 감옥이 있다

[이란 역사문화기행 ⑫] 고대도시 비샤푸르

등록|2017.03.30 12:00 수정|2017.03.30 12:00
비샤푸르 가는 길에 만난 봄

▲ 비샤푸르 가는 길에 만난 봄기운 ⓒ 이상기


오늘의 일정은 아바즈에서 비샤푸르를 거쳐 쉬라즈까지 가도록 짜여 있다. 거리가 568㎞로 9시간 정도 걸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점심 먹는 시간을 1시간으로 잡으면 10시간이 된다. 중간에 비샤푸르 유적을 2시간 정도 볼 예정이다. 아침 8시 호텔을 나선다. 그렇다면 쉬라즈 도착이 오후 8시다. 강상훈 대표는 쉬라즈 시내 교통 혼잡을 생각하면 9시는 되어야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아바즈를 출발한 우리 버스는 86번 도로를 따라 간다. 이 도로가 아바즈-쉬라즈간 간선도로다. 이 도로가 알렉산더 대제의 페르시아 정복로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겨울궁전이 있는 수사를 정복한 다음 여름궁전이 있는 페르세폴리스로 향했기 때문이다. 중간에 거쳐 가는 중요한 도시가 오미디예(Omidiyeh), 베바한(Behbahan), 각사란(Gachsaran), 누르 아바드(Nour Abad), 카에미예(Quaemyeh)이다.

▲ 유전의 불꽃 ⓒ 이상기


아바즈를 벗어나자 유전지대가 나온다. 유정에서 솟아오르는 불꽃으로 그것을 알 수 있다. 오미디예를 향해 내륙으로 들어가면서 들판에서 봄을 느낄 수 있다. 밀밭이 펼쳐지고 야자수를 볼 수 있다. 이곳의 위도가 북위 31도쯤 되기 때문에 봄이 일찍 오는 편이다. 다음은 베바한이다. 아바즈부터 베바한까지는 조금씩 해발이 높아진다. 아바즈의 고도가 12m, 오미디예의 고도가 30m, 베바한의 고도가 320m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바한부터 야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베바한에서부터 고도가 점점 높아져 산 고개를 넘으면 후제스탄주가 끝나고 코길루이예(Kohgiluyeh)주의 각사란(Gachsaran)에 이르게 된다. 각사란은 유전을 바탕으로 한 산업도시로 해발 720m에 위치한다. 이제부터는 자그로스산맥 속으로 들어선다. 부스탄(Bustan) 마을에서부터는 파르스주가 시작된다. 파르스주의 주도가 쉬라즈다.

▲ 누르 아바드의 튤립 조형물 ⓒ 이상기


이곳에서 우리가 점심을 먹은 누르 아바드까지는 해발 800m가 넘는 고원지대임에도 강이 흘러 목초지와 오렌지 농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누르 아바드에 이르러 늦은 점심을 먹는다. 누르 아바드에서 중간 목적지인 비샤푸르까지는 50㎞가 못 되기 때문에 45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카에미예에서 55번 국도를 타고 카제룬(Kazerun) 방향으로 가다 2.5㎞ 지점에서 좌회전해 비샤푸르로 가야 한다.

샤푸르 강변에 폐허로 남아 있는 고대도시 비샤푸르

▲ 고대도시 비샤푸르 지형도 ⓒ 이상기


고대도시 비샤푸르로 넘어가기 전 버스는 샤푸르(Shapur)강을 건넌다. 샤푸르강은 협곡을 따라 흐르면서도 수량이 많고 유속이 빠른 편이다. 강을 끼고 남쪽으로 도시가 발달해 있다. 고대도시 비샤푸르는 궁전, 모자이크 홀, 대형 목욕탕, 불의 사원, 이슬람시대 유적인 모스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들 유적 밖 서쪽으로 이슬람 아바드(Eslam Abad)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은 다음 안으로 들어가면 고대도시의 북동쪽 성벽이 나타난다. 강돌을 쌓아 벽을 만들고 모르타르로 붙인 방식이다. 성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지그재그식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들어오는 적을 물리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성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으로 박물관이 보인다. 이곳에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고 하는데, 동절기여서 12시까지만 문을 열어 놓는다.

▲ 비샤푸르 궁전 ⓒ 이상기


그래서 우리는 바로 궁전 쪽으로 들어간다. 궁전은 폐허가 되었지만, 크게 8개의 광장과 64개 방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중 우리는 궁궐, 접견실, 모자이크 홀, 아나히타(Anahita) 사원 그리고 로마황제 감옥을 살펴본다. 궁궐은 벽의 아랫부분이 남아 있고,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문 안쪽 내부 공간에 주춧돌이 세 줄 정도 남아 있다. 이 주춧돌 위로 기둥이 연결되고 그 위로 지붕이 덮였을 것이다.

그러나 파괴가 너무 심해 궁궐의 모습을 누구도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평면도로 궁전과 사원을 구별해 놓았을 뿐이다. 모자이크 홀과 접견실은 궁궐의 남쪽에 있다. 모자이크 홀은 이곳에서 로마식의 모자이크 벽화가 발견되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 다리우쉬가 이곳에서 발견된 모자이크 사진들을 보여준다. 이들 모자이크는 대부분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있고, 1점은 이란 국립박물관에 있다. 이 모자이크를 통해 로마의 문화와 예술이 사산제국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접견실 ⓒ 이상기


다음으로 찾은 곳은 접견실이다. 가로 세로 각 28m 정도의 정사각형 공간에 25m높이의 돔형 지붕이 덮여 있었다고 한다. 접견실의 사방 벽에는 16개씩 모두 64개의 벽감이 있었다고 한다. 이 벽감은 현재도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벽감 안쪽에서는 일부 조각도 확인할 수 있는데 卍문자다. 산스크리트어로 스바스티카(Svastika)라 부르며, 동서양 건축의 벽장식으로 사용되었다. 길상문(吉祥紋)으로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벽에서는 채색 흔적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벽에는 벽화와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접견실 바닥에서는 우물도 발견된다. 이를 통해 궁전으로 수로가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물은 샤푸르강에서 물의 사원을 거쳐 이곳으로 공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의 사원으로 들어간 물은 아나히타 여신을 통해 신성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나서 궁전의 이곳저곳 필요한 장소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아나히타 사원은 어떤 곳인가?

▲ 물의 사원 아나히타 ⓒ 이상기


아나히타 사원은 물의 사원으로 궁전의 동쪽에 있다. 서쪽에 있는 불의 사원과 대비된다. 아나히타는 물의 여신으로 풍요와 치료 그리고 지혜를 상징한다. 물의 사원은 샤푸르 유적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다. 그것은 물을 보관하는 수조가 지하에 있기 때문이다. 물의 사원 지하에는 정사각형의 수조가 있고, 그 위로 벽과 지붕을 덮은 형태다.

지하 수조로 내려가는 계단은 남쪽에 있고, 수조의 사방에 문이 있다. 그 문을 지나면 내부에 수로가 있어 밖으로 물을 흘려보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데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원리는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일부 수로에 습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금만 손을 보면 사용이 가능할 것 같다. 샤푸르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물이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있다.

▲ 내려가는 문과 계단 ⓒ 이상기


지금은 작동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샤푸르강에서 이곳으로 물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저장된 물을 정화과정을 거쳐 왕궁 전체에 공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물의 사원은 샤푸르궁의 생명선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물의 높이를 측정, 샤푸르강의 수위를 예측했을 수도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홍수 측정 장치처럼 올라가는 경사면도 보인다.     

이곳에 로마황제가 갇힌 감옥이 있다

▲ 샤푸르 궁전: 모자이크 홀 ⓒ 이상기


샤푸르 궁전을 지은 사람은 사산제국의 2대 황제 샤푸르 1세다. 그는 기원후 241년부터 270년까지 30년 동안 통치하면서 사산제국의 영토를 인도와 소아시아 지역까지 확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서쪽의 로마제국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로마는 이집트에서 시리아 카파도키아에 이르기까지 지중해 남쪽과 동쪽을 지배하고 있었다.

힘을 키운 샤푸르는 243년 레사이나(Resaina)에서 로마군과 싸워 패배했다. 당시 로마 황제는 고르디아누스(Gordianus) 3세였다. 그러나 244년 시리아 출신의 필리푸스(Philippus Arabs)가 로마황제가 되자 샤푸르 1세는 복수를 위해 바그다드 서쪽에서 로마와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사산은, 245년 시리아 지역은 로마에서, 이라크 지역은 사산에서 지배하는 협정을 체결한다.

▲ 샤푸르가 고르디아누스와 필리푸스의 항복을 받는 모습을 조각한 사산시대 부조 ⓒ 이상기


그러나 사산의 사서(史書)에 따르면, 244년 2월 고르디아누스 3세가 필리푸스와 함께 사산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Ctesiphon)을 공격한다. 샤푸르 1세가 지휘하는 사산군대는 로마군대와 필사적인 전투를 벌여 고르디아누스 3세를 사살하고, 필리푸스의 항복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 때문인지 사산시대 만들어진 암벽 부조에는 고르디아누스 3세가 샤푸르 1세의 말에 깔려 죽고, 필리푸스가 항복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253년에는 로마황제가 발레리아누스로 바뀐다. 샤푸르 1세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까지 공격해 그곳을 뺏는다. 발레리아누스는 257년 다시 시리아 지방을 회복하고, 261년 아나톨리아 지방의 에뎃사(Edessa)까지 공격한다. 이 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는 사산 군대를 얕잡아보다 샤푸르의 포로가 된다. 그는 사산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으로 끌려간 다음, 비샤푸르에 유폐되어 그곳에서 평생을 보낸다.

▲ 발레리아누스 감옥의 벽 ⓒ 이상기


비샤푸르는 샤푸르 1세에 의해 266년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도시가 261년 포로로 잡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엘람시대부터 파르티아시대까지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사산시대 처음으로 조성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건축기법이라든지 모자이크 등에서 로마적인 것이 나타나고 있어 로마의 기술이 사용된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로마의 기술과 사산의 노동력이 합쳐져 비샤푸르라는 고대도시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 발레리아누스가 유폐되었다는 감옥이 있다. 그렇지만 벽의 일부만 남아 옛 이야기를 전해준다. 우리는 이제 고대도시 비샤푸르 남쪽의 언덕으로 올라가 사방을 조망한다. 먼저 가보지 못한 서쪽을 바라본다. 멀리 불의 사원을 알려주는 두 개의 기둥이 보인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가 분위기를 더 쓸쓸하게 한다. 폐허가 된 문화유산은 늘 이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 폐허로 남은 비샤푸르 ⓒ 이상기


북쪽으로는 폐허가 된 궁전과 사원, 박물관이 보이고 그 너머로 샤푸르강이 흘러간다. 동쪽으로는 샤푸르강이 만드는 협곡 양쪽으로 웅장한 산이 보인다. 그 산 중턱 곳곳에 동굴이 있다. 망대와 초소로 사용되던 흔적이다. 남쪽으로는 궁전터 밖으로 야자수가 심어져 있다. 우리는 궁전터와 물의 사원을 지나 고대도시 비샤푸르를 떠난다. 다음으로 찾아갈 곳은 샤푸르강 북쪽 벽에 새겨진 마애부조다. 이곳에서 1㎞쯤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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