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을 살리는 게 출판을 살리는 것인가?
서점과 출판사, 저자가 공생할 방법 찾아야
너무 자주 희한한 논리가 보편적 진리가 된다. 출판계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어느새 농부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이 시대에 농부의 정신 아니 마인드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culture)의 어원을 생각한다면 절대 그럴 수 없는 데 말이다. 더구나 문화 콘텐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출판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는 우리 사회 구조 자체가 갖는 모순에서 기인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직접 재배하거나 제조하는 사람들보다 그것을 유통하는 사람들이 더 인정받고 큰 부자가 된다. 흔히 농사를 짓는 사람보다 그것을 파는 유통 상인들이 폭리를 취한다. 대형 할인마트들이 저지르는 행태들도 마찬가지다.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단가 인하를 후려쳐도 돈만 잘 번다.
요즘 많은 언론들은 가성비(가격대비 성능)라는 개념을 최신 트렌드라며 앞 다투어 다룬다. 저렴한 가격에 좋은 제품을 사면 좋을 법 하지만 만든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가격 대비 혜택만을 강조한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제대로 대가를 받았는지는 논외일 뿐이다. 이런 일반적인 상품만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IT에서는 SK. KT 등 이동통신사들이 중간에서 취하는 돈이 어마하다.
자신들은 생산하는 콘텐츠가 없으면서 엄청난 그냥 거둬들이는 이런 기업에 취직하고 싶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구조를 정부가 방조했으며 덕분에 시민들은 부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고, 전체 구성원들에게 고루 분배되고 있지 못하다. 포털 사이트만 해도 자신 스스로 만들거나 생산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가 하면 그것을 캐시 카우로 삼아서 다른 분야에 지배력을 계속 확장하고 있다.
출판의 상황도 비슷하다. 서점을 살리는 것이 출판을 살리는 방법적 진리가 되었다. 최근에 동네서점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많은 언론은 물론이고 지자체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서점조합이라는 것도 생겨나면서 성공모델로 부각되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서점의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이색 서점들이 많이 생겨나서 이 또한 많은 미디어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이런 동네 서점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유통사라는 점은 간과된다. 책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판매하는 것이라는 점 말이다. 전통시장과 동네 서점은 비슷한 정치적 역학에 있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만 되면 시장을 방문한다. 서민의 생활 현장을 보여주기 좋기 때문이다. 다른 생산과 창조의 공간은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손쉽게 방문을 한다. 그러나 그곳은 생산자에게는 미안해야 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어느새 그런 감각은 모두 잃어버렸다.
정치인들은 서점을 살려야 한다고 언급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마치 진보적인 발언인 것처럼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네서점이 부각되는 이유는 대형 서점에 대응하는 상대적인 관점 때문인데 동네서점일지라도 유통사라는 점을 간과한다.
이는 헌책방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이색 서점들을 다루는 언론들의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은 점을 다룰 때도 맹점이 드러난다. 그 서점들이 잘되고 안 되고에 대한 논쟁이 있기도 하는데 결국 그 서점들은 유통사들인데 그 서점들에 책을 공급하고 있는 출판사나 저자들의 처지나 고려는 찾아 볼 수 없다.
이런 태도들은 헌책방은 경우에 더욱 심각한 결과를 낳게 했다. 헌책방을 매우 긍정적으로 다루는 지식인, 저널리스트들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다. 그러나 헌책방도 역시 기존의 책을 2차로 다루는 유통사일 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헌책방이 비대해지면 곤란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것이 소규모 시장이었고, 출판 전체에 위협적이지 않아 문제가 안 되었다. 그것을 대규모 사업으로 하는 것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을 중심으로 이를 체계화된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면서 문제를 크게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러한 구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출판사와 저자 등 창작 제작자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죄책감이나 거리낌조차 없다. 이른바 모럴 헤저드가 발생했는데도 당당하기만 하다. 물론 희생된 것은 출판 그 자체이다. 헌책방이 잘 될수록 책을 직접 농사짓는 출판사와 저자 자체가 죽어버리는 일이 일어나는데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대형 서점이 대형 도서관이 되어 가는 문제는 책 유통의 모순 구조를 잘 드러낸다. 대형서점들을 중심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탁자들을 아예 마련해주고 있다. 실내 공간도 문화공간으로 디자인하여 독서에 최적화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런 조치에 대한 대형 서점의 취지는 이용자들이 서점 공간에 머물면서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취지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책을 만드는 것은 출판사들인데 생색은 대형서점이 내는 꼴이다. 무엇보다 이 책들은 서점들이 구매한 것이 아니다. 매절안 한 것이 아니라 위탁한 것이다. 자기 소유도 아닌 책을 이용자들에게 마음대로 읽히게 한다. 읽는다고 하여 구매를 한다는 조건도 없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러한 책들을 그대로 반품 시킨다는 점이다. 여러 사람이 만졌으니 책 상태가 당연히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서점의 책임은 없다. 최종 팔리지 않으면 출판사에 보내고 새책으로 달라고 하면 그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잘 모르는 이용자들은 서점들을 칭찬한다. 물론 그 책을 쓴 저자나 출판사에 대한 감사는 없다. 책을 쓰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는 상태라면 더욱 그러하다.
저자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연구나 사유에 대한 존중을 바라는 마음도 크다는 점은 드러나지도 않는다. 이러한 서점의 행태들은 도서 대여점만도 못하다. 차라리 도서대여점은 자신들이 책을 사기라도 한다. 책 전체를 구매해서 매장에 전시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면 최소한 일정 부수 이상은 구매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매장에 전시하는 책들 정도는 구매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출판 생태계라는 거대란 담론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창작자나 제작한 이들에 대한 상도상의 예의일 것이다. 대형 헌책방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다루는 책들을 만든 저자나 출판사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더구나 다른 상품도 아니고 책을 다루며 돈을 버는 이들이 더 무도한 짓을 한다는 것은 이미 자격이 없는 것이다.
갑자기 조선시대처럼 농자천하지대본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생산한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당연시되는 풍조는 문화 분야에는 더욱 맞지 않는다. 문화의 본래 기원은 재배하다 양육하다이다. 농사나 목축에는 단계와 과정이 있다. 그런 오랜 동안 노고를 통해 만든 생산과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21세기에 이런 원칙들은 너무나 간단히 무시되고 있으며 문화 영역까지 궤멸시키고 있다. 어떻게든 유통을 통해 이익을 남기는 자가 승자라는 인식이 일반적이기 때문이고 이제 사회의 영혼과 양식을 담아내는 출판에도 예외가 없어졌다. 더구나 대규모 상업농에 해당하는 대형출판사에 비해 열악한 소농들인 작은 출판사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는 형국은 심화되고 있는 데 말이다.
당연히 서점도 중요하다. 책을 만들었어도 독자들과 만나야 한다. 그 만남을 성사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서점이 한다. 서점과 출판사 그리고 저자가 같이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각기 서점이나 출판사, 저자를 개별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주장해서는 출판 자체가 힘을 얻지는 못한다. 이에 출판계를 구성하는 주체들이 다 같이 살 수 있는 관점과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한쪽이 없어도 출판은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사회 구조 자체가 갖는 모순에서 기인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직접 재배하거나 제조하는 사람들보다 그것을 유통하는 사람들이 더 인정받고 큰 부자가 된다. 흔히 농사를 짓는 사람보다 그것을 파는 유통 상인들이 폭리를 취한다. 대형 할인마트들이 저지르는 행태들도 마찬가지다.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단가 인하를 후려쳐도 돈만 잘 번다.
요즘 많은 언론들은 가성비(가격대비 성능)라는 개념을 최신 트렌드라며 앞 다투어 다룬다. 저렴한 가격에 좋은 제품을 사면 좋을 법 하지만 만든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가격 대비 혜택만을 강조한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제대로 대가를 받았는지는 논외일 뿐이다. 이런 일반적인 상품만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IT에서는 SK. KT 등 이동통신사들이 중간에서 취하는 돈이 어마하다.
자신들은 생산하는 콘텐츠가 없으면서 엄청난 그냥 거둬들이는 이런 기업에 취직하고 싶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구조를 정부가 방조했으며 덕분에 시민들은 부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고, 전체 구성원들에게 고루 분배되고 있지 못하다. 포털 사이트만 해도 자신 스스로 만들거나 생산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가 하면 그것을 캐시 카우로 삼아서 다른 분야에 지배력을 계속 확장하고 있다.
출판의 상황도 비슷하다. 서점을 살리는 것이 출판을 살리는 방법적 진리가 되었다. 최근에 동네서점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많은 언론은 물론이고 지자체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서점조합이라는 것도 생겨나면서 성공모델로 부각되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서점의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이색 서점들이 많이 생겨나서 이 또한 많은 미디어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이런 동네 서점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유통사라는 점은 간과된다. 책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판매하는 것이라는 점 말이다. 전통시장과 동네 서점은 비슷한 정치적 역학에 있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만 되면 시장을 방문한다. 서민의 생활 현장을 보여주기 좋기 때문이다. 다른 생산과 창조의 공간은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손쉽게 방문을 한다. 그러나 그곳은 생산자에게는 미안해야 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어느새 그런 감각은 모두 잃어버렸다.
정치인들은 서점을 살려야 한다고 언급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마치 진보적인 발언인 것처럼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네서점이 부각되는 이유는 대형 서점에 대응하는 상대적인 관점 때문인데 동네서점일지라도 유통사라는 점을 간과한다.
이는 헌책방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이색 서점들을 다루는 언론들의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은 점을 다룰 때도 맹점이 드러난다. 그 서점들이 잘되고 안 되고에 대한 논쟁이 있기도 하는데 결국 그 서점들은 유통사들인데 그 서점들에 책을 공급하고 있는 출판사나 저자들의 처지나 고려는 찾아 볼 수 없다.
이런 태도들은 헌책방은 경우에 더욱 심각한 결과를 낳게 했다. 헌책방을 매우 긍정적으로 다루는 지식인, 저널리스트들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다. 그러나 헌책방도 역시 기존의 책을 2차로 다루는 유통사일 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헌책방이 비대해지면 곤란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것이 소규모 시장이었고, 출판 전체에 위협적이지 않아 문제가 안 되었다. 그것을 대규모 사업으로 하는 것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을 중심으로 이를 체계화된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면서 문제를 크게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러한 구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출판사와 저자 등 창작 제작자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죄책감이나 거리낌조차 없다. 이른바 모럴 헤저드가 발생했는데도 당당하기만 하다. 물론 희생된 것은 출판 그 자체이다. 헌책방이 잘 될수록 책을 직접 농사짓는 출판사와 저자 자체가 죽어버리는 일이 일어나는데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대형 중고서점 통로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아이. ⓒ 이정혁
대형 서점이 대형 도서관이 되어 가는 문제는 책 유통의 모순 구조를 잘 드러낸다. 대형서점들을 중심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탁자들을 아예 마련해주고 있다. 실내 공간도 문화공간으로 디자인하여 독서에 최적화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런 조치에 대한 대형 서점의 취지는 이용자들이 서점 공간에 머물면서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취지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책을 만드는 것은 출판사들인데 생색은 대형서점이 내는 꼴이다. 무엇보다 이 책들은 서점들이 구매한 것이 아니다. 매절안 한 것이 아니라 위탁한 것이다. 자기 소유도 아닌 책을 이용자들에게 마음대로 읽히게 한다. 읽는다고 하여 구매를 한다는 조건도 없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러한 책들을 그대로 반품 시킨다는 점이다. 여러 사람이 만졌으니 책 상태가 당연히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서점의 책임은 없다. 최종 팔리지 않으면 출판사에 보내고 새책으로 달라고 하면 그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잘 모르는 이용자들은 서점들을 칭찬한다. 물론 그 책을 쓴 저자나 출판사에 대한 감사는 없다. 책을 쓰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는 상태라면 더욱 그러하다.
저자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연구나 사유에 대한 존중을 바라는 마음도 크다는 점은 드러나지도 않는다. 이러한 서점의 행태들은 도서 대여점만도 못하다. 차라리 도서대여점은 자신들이 책을 사기라도 한다. 책 전체를 구매해서 매장에 전시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면 최소한 일정 부수 이상은 구매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매장에 전시하는 책들 정도는 구매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출판 생태계라는 거대란 담론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창작자나 제작한 이들에 대한 상도상의 예의일 것이다. 대형 헌책방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다루는 책들을 만든 저자나 출판사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더구나 다른 상품도 아니고 책을 다루며 돈을 버는 이들이 더 무도한 짓을 한다는 것은 이미 자격이 없는 것이다.
갑자기 조선시대처럼 농자천하지대본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생산한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당연시되는 풍조는 문화 분야에는 더욱 맞지 않는다. 문화의 본래 기원은 재배하다 양육하다이다. 농사나 목축에는 단계와 과정이 있다. 그런 오랜 동안 노고를 통해 만든 생산과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21세기에 이런 원칙들은 너무나 간단히 무시되고 있으며 문화 영역까지 궤멸시키고 있다. 어떻게든 유통을 통해 이익을 남기는 자가 승자라는 인식이 일반적이기 때문이고 이제 사회의 영혼과 양식을 담아내는 출판에도 예외가 없어졌다. 더구나 대규모 상업농에 해당하는 대형출판사에 비해 열악한 소농들인 작은 출판사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는 형국은 심화되고 있는 데 말이다.
당연히 서점도 중요하다. 책을 만들었어도 독자들과 만나야 한다. 그 만남을 성사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서점이 한다. 서점과 출판사 그리고 저자가 같이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각기 서점이나 출판사, 저자를 개별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주장해서는 출판 자체가 힘을 얻지는 못한다. 이에 출판계를 구성하는 주체들이 다 같이 살 수 있는 관점과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한쪽이 없어도 출판은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출판 저널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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