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바람을 맞아보지 못한 것처럼 걸어보자
[서울둘레길을 걷다 ②] 7코스 봉산-앵봉산 코스
▲ 가양대교를 걸어서 건넜다. 강물이 출렁거리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기는 참 오랜만이다. ⓒ 유혜준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습기와 함께 서늘한 기운을 잔뜩 품었다.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가양대교를 걸어서 건너는 게 처음이라서 그런가보다. 다리 난간에 붙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리 그림자에 물들어 검은 빛으로 변한 강물이 출렁인다. 시선을 드니 저 멀리 방화대교가 보인다. 맑은 날씨였다. 늘 뿌옇게 보이던 시야가 말갛게 개였다. 오늘도 걷기 좋은 날이구나. 신난다.
지난 19일, 서울둘레길 7코스 봉산-앵봉산 코스를 걸었다. 전체길이는 16.6km, 소요예상시간은 6시간 10분이다. 지난주에 걸었던 '서울둘레길 6코스 안양천 코스'는 18km로 소요예상시간이 4시간 30분인데 비해 7코스는 길이가 짧은데도 불구하고 소요예상시간이 더 길다. 난이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초급과 중급의 차이다.
[서울둘레길을 걷다 ①] 6코스 안양천 코스
봉산-앵봉산 코스 출발지점은 가양역. 3번 출구로 나가면 된다. 가양대교는 2002년 5월 31일에 준공된 다리로 길이는 1700m이며, 강서구 가양동과 마포구 상암동을 잇는다. 봉산-앵봉산 코스는 강서구, 마포구, 은평구를 거치면서 이어지는 길이다. 걷기 시작할 때는 강바람을 맞지만, 봉산으로 들어서면 시원한 산바람을 맞을 수 있다. 바람을 신나게 맞으면서 걷는 코스라고나 할까. 한 번도 바람을 맞아보지 못한 것처럼 걸어보자.
▲ 길은 길로 이어진다. ⓒ 유혜준
▲ 난지생태습지원.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었다. ⓒ 유혜준
한강을 굽어보면서 가양대교를 건너 걸었더니 난지생태습지원이 나온다. 입구로 들어가 안을 기웃거리니 조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진한 꽃향기가 길 위를 흐른다. 지난주에는 벚꽃 비를 맞으면서 걸었는데, 이번에는 조팝나무 꽃들을 질리도록 보는 호사를 누린다. 철쭉도 화사하게 피었다.
나무마다 물이 올랐다. 연하디 연한 연둣빛 잎사귀들이 나무들을 치장하기 시작했다. 봄이 물러가고 여름이 깊어지면 연둣빛 잎들은 죄다 진한 초록빛으로 변하겠지. 나뭇잎만큼 세월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드물 것 같다. 봄에는 연둣빛, 여름에는 초록빛, 가을에는 붉은빛이나 노란빛으로 변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무를 떠난다. 미련 없이 훌쩍.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난지습지생태원을 기웃거리면서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노을공원, 하늘공원, 평화공원을 고루 지났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옆을 스쳐 지나갔다. 시간이 있다면 공원에 들러도 좋겠지만, 걸을 거리가 무한대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오늘은 서울둘레길에만 집중하자.
이곳에서 메타세쿼이아 길을 만났다. 이런 길, 마음을 설레게 한다. 발걸음을 내딛기 전에 마음이 먼저 걷는 길이기도 하다. 아직은 여린 잎들만 돋아난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까치발을 디딘 것처럼 서 있다. 곧게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나무들이 시원스러우면서 듬직해 보인다. 저절로 하늘을 우러러 보게 한다. 하늘, 참 말갛다.
▲ 메타세쿼이아 길을 만났다. ⓒ 유혜준
예전에 이 근처를 걸었을 때 매발톱꽃 군락지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매발톱꽃이 피려면 한두 달은 더 있어야 한다. 그 때쯤이면 다른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매발톱꽃을 볼 수 있으리라.
길은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지나 불광천으로 이어졌다. 천변에는 자전거도로와 산책로, 운동시설들이 잘 갖춰져 있다. 걷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운동기구에 매달려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걷다가 문득 시선을 들면 북한산의 웅장한 자태가 보인다. 서울둘레길은 그곳으로 이어진다.
증산공원부터 도심을 벗어난다는 느낌을 확 받았다. 걷기 좋은 숲길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길에서 봉산을 만난다. 높이는 고작 209m이지만 정상에 봉수대가 설치돼 있어 봉산이라 불리게 됐단다. 봉산 정상에는 봉수대와 봉산정이라는 누각이 설치되어 있다. 봉산에는 팥배나무 군락지가 있다.
▲ 숲에는 봄이 가득했다. ⓒ 유혜준
▲ 봉산의 봉수대. ⓒ 유혜준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내가 걸은 길이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발자국은 남아 있지 않다. 다시 앞을 보면 걸어야 할 길이 펼쳐져 있다.
걸어온 길이 아름다울까, 걸어가야 할 길이 멋있을까? 걸어온 길은 아쉬움으로 남고 걸어갈 길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을까? 길을 걸으면 길과 사람의 삶을 자꾸 비교하게 된다. 삶이란 결국 죽음을 향해 끊임없이 걷는 걸음이 아닐까 싶어서.
봉산-앵봉산 코스는 도심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힘들지 않다. 하지만 산길로 접어들면 저절로 호흡이 가빠진다. 오르막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을 사용하는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다. 근육통은 덤이다. 달갑지 않아도 견뎌야 하는.
서오릉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어서 잠깐 멈췄다. 파헤쳐진 도로 때문이다.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뽀얀 먼지가 날린다.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 주변을 둘러보면서 서울둘레길 리본과 길표지판을 찾는다. 아, 저기다.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나무 가지에 주황색 리본이 매달려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고 있다.
▲ 불광천 길에서는 북한산이 보였다. ⓒ 유혜준
길옆에 벌고개를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경기도 고양시란다. 나는 지금 서울시와 고양시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벌고개라는 이름은 스무 살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에게서 유래되었다. 봉산 아래에 있는 수국사는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인데, 벌고개는 의경세자의 무덤 때문에 그 같은 이름을 갖게 됐다.
불쌍한 지관. 죽은 세자의 무덤자리를 찾는 지관이니 조선에서 명지관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으리라. 그런 사람이 나서서 지금의 서오릉에 의경세자의 무덤자리를 잡았더란다. 문제는 땅속에 벌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지관은 그 사실을 손금 들여다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 그걸 건드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그래서 지관은 땅을 파는 인부들에게 한 시간 뒤에 땅을 파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인부들은 하늘에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자 비가 내릴 것을 염려해 지관의 말을 무시하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벌집을 건드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벌집에서 쏟아져 나온 성난 벌들은 떼를 지어 하필이면 지금의 벌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가는 지관을 향해 날아갔다. 마치 벌집을 건드리게 만든 지관을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지관은 벌들에게 쏘여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훗날 사람들은 지관이 벌집을 건드려서 벌들에게 벌을 받았다고 해서 이 고개를 벌고개로 부르게 되었다나. '전설의 고향'에 나옴직한 이야기지만 벌집을 잘못 건드리면 죽을 수도 있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지.
▲ 걷기 좋은 숲길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마음으로 먼저 걷게 만드는 길이다. ⓒ 유혜준
앵봉산을 넘어 구파발역으로 가는 4km 남짓한 길은 난이도가 중간 정도인 '깔딱고개' 되시겠다.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져 숨을 몰아쉬면서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언제쯤 내리막길이 시작되나 목 빼고 기다리면서.
아, 드디어 구파발역이다. 이렇게 외치는 순간을 기다리는 재미, 아주 괜찮다. 혹시, 나만 그런가?
강을 건너고 산을 넘으면서 걷는 길, 봉산-앵봉산 코스는 서울에도 숲의 정취를 한껏 느끼면서 걷기 좋은 길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한다. 직접 걸어보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다. 말로, 글로 설명하는 건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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