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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kg 짐 꾸려 떠난 길, '차로 걸었다'

[필름으로 담은 섬진강, 첫 번째 이야기] 순창에서 곡성까지, 봄빛에 홀린 듯이

등록|2017.05.06 13:11 수정|2017.05.06 14:06
본 기사의 사진은 모두 Pentax 67ii 기종으로 촬영하였으며 사진 설명의 괄호 안에 필름의 종류를 적어두었습니다. 모든 사진은 필름을 스캔한 후 리사이징 외 여타 보정을 거치지 않았음을 미리 밝힙니다. -기자말

그리 유명하지 않은 곳으로의 여행

예전에도 돌아다니는 것을 참 좋아했지만 요즘 부쩍 거르는 주말이 없이 매주 어디론가 떠나곤 한다. 20kg에 육박하는 카메라 가방을 메고서 말이다. 야영이라도 하게 되면 30kg도 넘는 숙박 짐을 100리터짜리 배낭에 꾸리고 카메라와 필름들은 배낭 가장 밑, 따로 지퍼를 열 수 있는 공간에 넣는다. 이렇게 해서 40kg에 가까운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걷는다.

야영장에서(1)(PRO400H)작은 텐트와 소소한 소품들과 함께 그리 유명하지 않은 야영장에서의 하룻밤. 무엇보다 푸른 풀밭 위에 있노라면 어느덧 마음이 어려지는 느낌이 든다. ⓒ 안사을


모든 여정 동안 이 짐덩이를 메고 다니지는 않는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짐을 놓아둘 곳과 이동의 수단 등을 꼼꼼하게 챙겨야 한다. 비록 즉흥적인 여행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여정을 체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월 둘째 주말부터 두 달 동안 매주 집을 나서서 산과 들로 가야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바빠서'였다. 사람은 누구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살아가는데 사람마다 그 방식이 다르다. 특별히 에너지의 출입을 예로 들어 구분을 하자면 빠져나간 에너지를 적절한 휴식과 웅크림을 통해 내면에서 재충전하는 부류가 있고, 다양한 활동 및 견문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면서 재충전하는 부류가 있다. 본인은 언제나 후자였다.

야영장의 저녁 햇살(PRO400H)서쪽 하늘에서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다. 이렇게 역광으로 사진을 담으려면 멀티평균측광 모드를 기준으로 3stop 정도는 노출을 오버해서 촬영해야 한다. ⓒ 안사을


직장에서 중책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맡게 되었다. 더구나 주어진 것에 항상 무언가를 더하여, 일을 나의 복으로 여길 수밖에 없도록 스스로를 새로운 일 가운데로 던져넣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창의적인 업무 추진'이라 하고 누군가는 '쓸데없는 정력 낭비'라고 할 만한 것들을 숙명처럼 만들어내는 필자는, 3월 신학기를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아침 7시 반에 출근하여 밤 열시에 사무실의 문을 닫고 나오는 생활을 딱 8일째 겪었던, 마침 금요일 밤이었던 그 날. 과거의 어떤 순간과 비교해도 가장 강력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뜨거운 열망으로 내면이 밀어낸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떠나야 한다.'

야영장에서(2)(PRO400H)해가 지고 나서의 모습.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훨씬 더 밝게 보이지만 노출값이 전체 화면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카메라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평균값으로 노출을 계산하여 최대한 양쪽 다 나올 수 있도록 하였다. ⓒ 안사을


짊어지고 온 짐들을 하나씩 풀고 한 시간을 꼬박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완성된다. 때로는 땅을 파야하고 때로는 장작을 패야하는 시간이다. 따가운 햇살 아래서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한낮에서 기온이 5도를 밑도는 추운 날씨에서는 얼어서 둔해진 손 끝을 녹여가면서 로프를 묶어야 한다. 고작 하루 뒤면 허물어질 집을 짓기 위해 고군분투하다보면 어느새 지난 한 주간의 기억이 까맣게 사라진다. 소주 한 병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망각 요법이다. 누군가는 이런 것을 '몰입의 즐거움'이라고 할 것이다.

아침햇살과 민들레(Ektar100)간밤과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아침햇살이 스며들고 새벽녘 차가워진 공기가 미세한 물이 되어 풀잎에 내려 앉았다. ⓒ 안사을


이날 묵었던 야영장은 평소 자주 오는 곳으로, 아홉개의 멋진 소나무들과 푸른 잔디밭이 깔려있는, 꽤 큰 학교의 운동장만한 넓이의 한적한 공간이다. 샤워실과 화장실이 항상 깨끗하게 관리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동절기에는 동파 방지를 위해 폐쇄) 항상 무료로 개방하며 취사와 야영까지 가능하다. 야영장의 입구에는 초소가 하나 있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할 수 있는 함들이 있다. 초소는 보통 비어있지만 관리하시는 분들이 상시적으로 왔다갔다 하시면서 쾌적한 환경을 유지해 놓으신다. 접근성이 떨어지고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이 가질 수 있는 놀라운 혜택이라고나 할까.

섬진강의 풍경 따라 아래로, 아래로

야외독서(Ektar100)학생부장 연수에서 단체로 지급해준 책이 마침 차에 있어서 꺼내어 읽었다. '언어의 온도' ⓒ 안사을


야외독서(2)(Ektar100)여정이 바쁘지 않으면 야외에서 독서를 잠깐이라도 즐기는 편이다. 실내에서의 독서와는 색다른 느낌을 준다. 동행인이 담아준 사진. ⓒ 안사을


원래 계획은 야영장에서 하룻밤을 호젓하게 보내고 근처의 풍경들을 내키는 대로 담아올 예정이었다. 그래서 위 사진처럼 야영장에서 느긋하게 오전 시간을 만끽했던 것이다. 특히 언제부터인가 대기가 좋지 않아 사진을 찍으려고 마음 먹고 나갔다가 속만 상하고 돌아올 때가 많았기 때문에 출사에 큰 뜻을 갖지 않고 나가는 경우가 점점 늘게 되었다.

하지만 섬진강과 그 주변의 수많은 녹색들이 나의 눈과 발, 그리고 셔터 위에 얹은 손가락을 자꾸만 잡아 채어 어느새 섬진강을 따라 순창에서 곡성으로, 보성강을 따라 곡성 읍내에서 석곡, 죽곡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간밤의 야영 짐들을 대충 자가용 뒷좌석에 포개어 놓은 채로 좋은 풍경이 보일 때마다 안전한 곳에 차를 놓고 사진을 찍는 행위를 스무 번 정도는 반복했으니, '차를 달렸다'라는 표현보다는 '차로 걸었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을 것이다.

섬진강 따라(1)(Ektar100)향가유원지를 둘러서 흐르고 있는 섬진강의 모습. 앞에 보이는 다리는 사람과 자전거만 오갈 수 있는 목교로써 건설되다 말았던 철교이다. 철도가 없는 터널이 다리 바로 앞에 있어서 소박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 안사을


유명한 여행지보다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곳을 선호하는 편이다. 도시나 건물보다는 자연의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관광객이 많은 곳은 제 아무리 수려한 경관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그 곳에서 얻을 수 있는 휴식이나 안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나름대로 꽤나 아름다운 곳들을 하나 하나 알아가는 재미 또한 쏠쏠하기 때문에 포털사이트의 지도와 도로뷰, 위성사진이나 항공뷰 등을 이용해 나만의 여행코스를 계획하는 것을 즐긴다. 이 날의 여정 또한 지나는 길에 사람이 참 적었다. 4시간 정도의 드라이브 및 출사 시간 동안 스쳐서 지나간 사람의 수가 5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길가에 핀 꽃(Ektar100)지방도를 천천히 달리다가 흐드러지게 핀 들꽃이 발걸음을 멈춘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꽃의 정체를 알아보니 무꽃이라 한다. ⓒ 안사을


섬진강 따라(3)(Ektar100)대강면에서 곡성 읍내로 향하는 섬진강의 물줄기. 강변 양 쪽으로 왕복 2차로의 포장 도로가 잘 나 있으며 군데 군데 철쭉이 피어있다. ⓒ 안사을


곡성의 메타세콰이어(Ektar100)곡성 읍내로 진입하는 길에 400미터 정도 짧게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줄지어 서있다. ⓒ 안사을


섬진강의 지류, 보성강까지

이 시기의 산과 들의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가을의 울긋불긋한 나뭇잎보다도, 이른 봄의 화사한 꽃 보다도, 겨울의 새하얀 설경보다도 벅찬 색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녹색들'이다.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 정도까지일까. 그 기간 동안 산은 온통 새로운 녹색들로 물들기 시작한다. 대충 눈으로만 훑어도 녹색의 가지수가 10개는 되어보인다. 다른 나무들은 구름의 그림자 밑에 있는데 가뜩이나 밝은 색을 띠는 연둣빛의 나무 몇 그루가 홀로 해의 조명을 받으면 형광펜으로 칠한 듯 눈을 의심할 만한 화려한 색깔이 산의 등판에서 솟아오르기도 한다.

보성강(1)(Ektar100)포장된 도로의 맞은편으로 건너가 자갈길을 한참 달려 만난 풍경. 고여있는 듯 하지만 물이 돌아서 활발하게 흘러나가는 중이다. ⓒ 안사을


거기에, 흐르는 강물 사이로 지난 가을부터 꾸준히 제 몸의 색을 빼낸 겸손한 식물들이 갈색빛으로 바탕색을 더하면 훌륭한 한 폭의 유채화가 따로 없다.

보성강(2)(67ii/Ektar100)곡성군 목사동면 목사동1교 위에서 서쪽 편으로 바라보는 보성강의 모습. ⓒ 안사을


위 사진의 지점과 가까운 곳에 한적한 시골과 어울리지 않는 꽤 큰 펜션단지가 나온다. '강빛마을'이라는 곳인데, 국내 최대의 은퇴자 마을로 조성되었고 코레일에서 관광 및 숙박 사업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통일감있고 절제된 모습이 주변 경관을 해칠 정도의 무분별한 건축물의 느낌은 아니었기에 사진으로도 담아 보았다. 가족단위로 이 근처를 찾을 때 숙박시설로 이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참 좋았기 때문이다.

▲ (Ektar100>강빛마을 숙박단지 ⓒ 안사을


▲ (Ektar100)강빛마을에서 바라본 풍경 ⓒ 안사을


이 곳에서 보성강을 따라 섬진강과 합수되는 지점까지 가면 압록 유원지가 나오는데 예전에는 모래톱이 매우 넓게 펼쳐져 있었으나 지금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래보다 자갈이 더 많아졌다. 이 날은 그 길로 향하지 않고 중간 죽곡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높은 곳에서 다양한 녹색들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서였다.

다양한 색깔들(Ektar100) 요즘들어 보기 드물게 먼지 없는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다양한 나무들이 원색을 드러내고 있다. ⓒ 안사을


구성재에서 바라본 신풍리(Ektar100) 굽이진 구성재 길을 오르다 보면 신풍저수지와 함께 생명력이 넘치는 나무들을 볼 수 있다. ⓒ 안사을


구성재를 내려와 곡성읍으로 달리다 보니 멀리서 보이는 하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얼핏 보면 유럽 풍의 허름한 성 같기도 한 모양새에, 국도에서 내려와 농로를 거쳐 건물 앞으로 다가갔다. 이국적이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이유는 재미있게도 '허름함' 때문이었다. 양철 재질인듯 한 지붕에 녹이 올라왔는데 그 색이 마치 봄이 틔운 새싹같은 빛깔이라 주변의 풍경에 녹아들어 운치있게 보였나보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곳으로의 여행은 이런 묘미를 가져다준다. 예상치 못하게 발견하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말이다.

*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떠난 '나를 찾아 걷는 순례길 행사', '섬진강 진메마을 - 장구목유원지' 여행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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